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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9:36:19

김계관

前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金桂官 | Kim Kye Gwan
파일:김계관.jpg
출생 1943년 1월 6일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운산군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학력 평양외국어대학 (학사)
평양국제관계대학 (학사)
직업 외교관, 정치가
주요서훈 로력영웅(1995)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지역구 남포시 천리마구역 화석선거구(제674호)

1. 개요2. 생애
2.1. 전 6차 북핵 6자회담 북한 측 수석대표2.2. 2018년 6월 남북고위급회담 취소 관련 입장 발표2.3. 북미정상회담 취소 관련 입장 발표
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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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강석주의 후임으로 외무성 제1부상을 역임하였으며, 북핵위기 당시 대미 담당 협상가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2. 생애

1943년 1월 6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평양외국어대학과 국제관계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駐 알제리 북한대사관에 서기관으로 부임하면서 외교관의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1975년 10월, 1등 서기관 신분으로 외교부 과장에 이르렀다. 1985년 9월, 1급 연구원 신분으로 외교부 전문위원이 되었으며 1989년 9월, 외교부 순회대사가 되었다. 1991년 3월, 외교부 참사에 임명되었으며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과 함께 많이 돌아다녔다. 1993년 6월,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측 차석대표로 출석했다. 1994년 10월, 정무원 외교부 부부장에 전격적으로 임명되었는데, 류현우가 밝힌 그 비화가 실로 기가 막히다. 제네바 합의를 이룩한 공으로 김정일이 김계관을 목란관에 불러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김정일이 그를 외교부 부부장으로 오해하고 부부장으로 불렀다. 이에 김계관이 아직 자신은 참사에 불과하다고 넌지시 일렀는데, 김정일이 그 자리에서 부부장으로 임명해버린 것.

1995년 5월,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 1997년 3월, 4자회담 설명회 북측 대표, 1997년 8월, 1~3차 4자회담 예비회담 북측대표, 1997년 12월~1999년 8월 1~6차 4자회담 본회담 북측대표, 1998년 3월 북미 고위급회담 수석대표로 출석하는 등 상관인 강석주와 더불어 대미 전문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1998년 4월,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출범으로 김일성 헌법이 입헌되어 정무원이 내각으로 개편되자 내각 외무성 부상으로 유임되었다. 이후 강석주와 함께 저팔계 외교를 담당했다.

1998~2000년 사이 북미 회담의 수석대표로 계속 나타났으며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2004년 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6차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10년 9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석주가 내각 부총리로 이동함에 따라 후임 외무성 제1부상에 임명되었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3년 12월, 장성택이 처형될 때 장성택과 연관이 있다고 소환된 외교관들의 처분에 대하여 주재국에서 망명을 시켜주겠다고 하는데도 충심으로 귀국한 동무들이니 평양에서 계속 살게 해달라고 탄원하여 김정은이 장성택과 깊은 연관이 없는 인물들은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일하도록 조처해주었다고 한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맡았다. 김계관과 강석주가 잇달아 죽고 리수용, 리용호가 새로운 외교 실세로 떠오른 후에도 계속 유임되었다.

2017년 4월, 최고인민회의 13기 5차 회의에서 외교위원회가 재설치되면서 외교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외무성 제1부상 자리는 최선희에게 물려주고 9월부터 외무성 고문으로 물러났다.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관계에 담화문을 내고, 현재에도 북한의 북미외교와 대외전략에 관여하고 있다. 고영환의 평으로는 현재의 북미 관계와 협상전략을 수십년전 부터 설계한것이 김계관이라 현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빠질수가 없다고 한다. 제 1부상에서 물러난것도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그동안 통일전선부에 밀렸던 외무성이 통전부 간부들의 실책 자료들을 모아 70프로가 갈려나갔는데 이게 반작용으로 로동당 조직지도부에서 괘씸죄에 걸려 외무성이 검열을 받았는데 여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한다

2021년 1월,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탈락했다. 다만 그를 대신했던 리수용, 리용호도 모두 밀려났고 최선희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가 2022년 4월 28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경축행사 참가자 기념사진 촬영식에서 휠체어를 탄체로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북한 방송에 나타났다. 각종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예우받는 모습이었으며 김정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는 등 정권의 원로로 예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념사진 촬영 때 휠체어에 앉아 김덕훈과 조용원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다. 참가자들이 모두 일어서 김정은에게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서 박수를 치는 등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23년 7월 27일, 전승 70주년 기념보고회에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2.1. 전 6차 북핵 6자회담 북한 측 수석대표

2008년에 열린 6차 북핵 6자회담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미국 측이 요구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관련하여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요구하고자 개최한 6차 6자회담에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게 되며 결국 6자회담은 2008년을 이후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게 되었다. 최근 김정은시진핑에게 6자회담 재개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게 화제가 되었지만 아직 6자회담의 개최는 불분명한 것은 확실하다.

2.2. 2018년 6월 남북고위급회담 취소 관련 입장 발표

2018년 5월 16일 북한이 맥스 썬더 훈련을 거론하고 일방적으로 회담을 취소함과 동시에 김계관 명의로 미국이 북한에게 지속적으로 일방적 핵포기를 바란다면 북미정상회담을 재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존 볼턴의 리비아식 핵 포기를 계속 주장한다면 북미정상회담 연기 가능성이 낮지 않음을 경고한 것이었는데.

2.3. 북미정상회담 취소 관련 입장 발표

5월 25일, 우리 시간으로 24일 밤 늦게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북한이 보이는 태도[1]를 이유로 정말로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전격 발표하자 본인도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트럼프 대통령 발표 8시간 만에 ‘위임에 따라’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으로 담화를 발표했다. 북에서 통상적으로 ‘위임에 따라’라는 문구는 북한 지도자[2]의 직접적인 뜻이 담겼음을 의미한다.

김 제1부상은 이번 담화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인류 염원에 부합되지 않는 결정”이라는 일부 비판의 내용을 담았지만, 미국에서 문제 삼은 자신이나 최선희의 말은 그저 감정적인 '반발'에 불과하다고 '해명'하며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용단'을 높게 사고 있었다는 북한으로서는 보기 드문 저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번 사태가 북미정상회담의 필요성을 말해준다며 북한은 언제든지 대화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북한 외무성이 판을 엎을 생각은 없었고 관성적으로 '벼랑 끝 전술'을 취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미국식 '미치광이 전략'을 보여주자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3. 여담


4. 참고문헌


[1] 최근 김계관 및 최선희의 담화를 예시로 들며 매우 공격적이고 대화의 의지가 낮아보인다라고 평가하였다.[2] 김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