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1부수상 1959년 1월 20일 직함 신설 | |
김일 1959년 임명, 1962년, 1967년 유임 | ||
<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2부수상 1970년 7월 11일 직함 신설 | ||
박성철 1970년 임명 | ||
<rowcolor=#003478,#C39335> 내각 부수상 | ||
1기 1948-1957 | 박헌영·홍명희·김책(1948) 허가이(1951) 최창익·정일룡(1952) 최용건·박의완(1953) 박창옥·김일(1954) 정준택·정일룡재임명(1956) | |
2기 1957-1962 | 김일·홍명희·정준택·남일·박의완·정일룡(1957) 리주연(1958) 리종옥·김광협(1960) | |
3기 1962-1967 | 김일·김광협·김창만·정일룡·리종옥·리주연·남일(1962) 최용진(1964) 고혁·김창봉·박성철(1966) | |
4기 1967-1972 | 김일·김광협·박성철·김창봉·리주연·남일·리종옥·최용진·정준택(1967) 김만금·홍원길(1970) 최재우(19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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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내각 부수상 겸 재정상 최창익 崔昌益 | Choe Chang ik | |
출생 | 1895년 12월 21일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
사망 | 1960년 1월 (향년 64세) |
국적 | 조선1895~1897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1897~1910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1910~1945 북조선인민위원회1946~1948 [[북한| ]][[틀:국기| ]][[틀:국기| ]]1948~1960 |
정당 | (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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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 북한의 정치인. 이명으로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健宇)가 있다.2. 생애
1895년 12월 21일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출신이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20년대부터 조선공산당 ML파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1930년대에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합류했다 그를 떠나 연안으로 가서 김두봉과 함께 중국공산당 지휘 하에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해 활동했다. 조선독립동맹에서는 위원장 김두봉 밑에서 한빈과 함께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이 재건되면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입북 이후 1946년 6월,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정치위원회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도 같은 직위에 재선되었으며,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내각 재정상에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남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출범하면서 정치위원회에서 물러났으며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북한 체제 수립 과정에서 최창익은 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이 곧 계급투쟁이라는 북한식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했다. 1950년 6월, 홍남표 장의위원,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2년 11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일룡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이때 재정상 자리를 윤공흠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로력훈장을 받았다. 기존의 연구들은 최창익을 오랜 혁명가 경험 때문에 김일성에게 꼬장꼬장하게 맞선 반대파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며 사실 최창익은 김일성의 우상숭배와 수령독재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박헌영과 고려인 공격에도 적극 앞장섰다.[1] 나중에 망명한 고려인들은 최창익과 연안계야말로 김일성의 교활한 주구들이었다고 씹어댔다. 그리고 연안계는 파벌이 아니라 그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통칭에 불과하고 만주파나 남로당파와 달리 조직적 파벌이 아니었다. 1953년 4월, 김정주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박의완과 최창익 등은 이러한 '종파' 구분이 1955년 이후에야 나타난 현상임을 강하게 지적했다.
흔히 최창익이 김일성의 경제정책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안계 출신들이 김일성이 환장했던 중공업화 노선이나 급진적인 농업 집단화에 반대하면서 민생을 살려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자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최창익이 이러한 주장에 동조했단 증거가 없다. 특히 결정적으로 최창익은 김일성의 경제발전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동되는 1954년 3월 23일, 3월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시 재정상을 겸하는 등 중용되는 모습을 보였다. 8개월 후인 1954년 11월 18일, 리주연에게 재정상을 물려주고 1955년 1월 20일, 리기석의 뒤를 이어 인민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리기석은 신설된 도시경영상으로 이동한다. 인민검열위원회가 국가검열성으로 개편된 후 국가검열상에 유임되었으며 1955년 8월 5일, 리효순에게 국가검열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6년 1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환갑 기념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5년 말에 김일성은 고려인들을 싫어하는 연안계를 동원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고려인들을 가혹하게 비난하고 박살냈다. 1956년 초에 이르러 고려인들은 거의 궤멸당했고 김일성은 세력균형을 위해 이번에는 연안계가 동지들을 핍박한다고 비판하여 숙청했다. 뒤통수 맞은 연안계는 당황했고 최창익은 소련 대사관에 이러한 수모는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결국 최창익, 박창옥, 리필규, 고봉기, 김두봉, 서휘 등 소련계와 연안계는 옛 원한을 잊고 연합하게 된다. 하지만 리필규 정도의 강경파를 제외한다면 최창익은 여전히 김일성을 유능한 지도자로 고평가하고 있었고 김일성의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최용건, 박정애, 김창만, 박금철, 김영주 등만 제거하면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소련대사 이바노프와의 접촉에서 김일성을 조선로동당 위원장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위원장이 되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 때 최창익은 통역을 부르지 않고 자기 혼자 이바노프와 직접 대면할 정도로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이들의 항명을 철저히 진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8월 종파사건이다. 최창익은 당직과 공직에서 추방당하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4인이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소련에서도 리상조가 도움을 요청함으로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중국의 펑더화이가 북한을 방문,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를 열게 하고 최창익 등을 복권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개입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던 김일성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눈치보다 결국 최창익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최창익의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회복시켰어도 상무위원회 위원 자리는 돌려주지 않음으로 그를 강등한 것은 분명히 했다. 이후 중소분쟁이 격화되고 1957년에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내정간섭을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김일성은 더 이상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1960년 1월에 박창옥, 고봉기 등과 함께 서철, 리송운, 김익선, 김경석이 주도한 비밀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7년 사망설 등의 증거없는 풍문들이 돌아다녔으나 나중에 발라즈 샬론타이,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등이 소련의 외교문서를 발견하면서 사망 날짜가 확인되었다.
3.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북조선로동당 1,2기 정치위원회 위원 | ||
1946년 8월 31일 | 1953년 8월 9일 | 북조선로동당 1기 1중전회에서 선거 2차 당대회에서 재선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소환 |
내각 재정상 | ||
1948년 9월 9일 | 1952년 11월 18일 |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해임 |
내각 부수상 | ||
1952년 11월 18일 | 1956년 9월 1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숙청 |
내각 재정상 | ||
1954년 3월 23일 | 1954년 11월 18일 |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해임 |
인민검열위원장, 국가검열상 | ||
1955년 1월 20일 | 1955년 8월 5일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국가검열상으로 직함 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해임 |
조선로동당 3기 상무위원회 위원 | ||
1956년 4월 29일 | 1956년 8월 31일 | 조선로동당 3기 1중전회에서 선거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숙청 |
4. 여담
그의 아내는 허정숙이다. 1930년대 후반 연안에 있던 시절 결혼했으나 1946년 최창익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이혼했다고 한다. 이후 허정숙은 8월 종파사건 재판에서 최창익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 또한 최창익과 달리 허정숙은 끝까지 김일성에게 충성하면서 숙청되지 않고 고위직을 맡았다.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최창익의 가정폭력이 너무 심해서(...) 이혼했다고 한다.5. 매체에서
- 1990년작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양영준이 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