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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23:21:50

고봉기(북한)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연안계 독립운동가 출신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6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으로 건너가 1938년 5월,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강릉분교를 졸업하고 1939년 조선청년전위동맹 2구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해방 이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북조선로동당에 합류하였다. 이후 북로당 신의주당 부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정주군 당위원장, 중앙당 기요실장, 즉 김일성의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9년, 남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출범하던 시점에서 함경북도 당위원장을 지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25일, 루마니아 대사에 임명되면서 한상두에게 함북 당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2년 2월에 부임하여 1년 7개월 간 재임하였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3년 9월 2일, 루마니아 대사에서 해임되어 정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환, 평양시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설치된 당규약 개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서휘와 함께 김일성의 경제정책을 찬양하였으며 남로당 숙청에 참여하는 등 초기에는 다른 연안계 간부들이 다 그러했듯이 김일성을 지지하였다. 1955년 초, 최창익 등과 함께 반탐오, 반낭비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1955년 12월, 김일성이 박영빈, 기석복, 박창옥 등 고려인 간부들을 조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측근인 박금철, 한상두 등이 연안계 간부들에게 고려인을 공격하라고 사주하였다. 고려인들과 연안계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고봉기도 매우 적극적으로 고려인들을 비판하였다.

그런데 고려인들의 세력이 충분히 위축되고 겁에 질린 이들이 급기야 소련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자 1956년 1월말부터 김일성은 연안계 동무들이 소련계 동무들을 지나치게 비판하면서 고봉기를 고려인 전체를 비방하려고 시도한 '일부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순식간에 토사구팽당한 고봉기는 평양시 당위원장에서 해임되어 황해남도 당위원장으로 좌천되었다. 후임 평양시 당위원장으로는 갑산파의 일원으로 역시 김일성의 측근인 리송운이 임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연안계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고 서휘, 리필규, 윤공흠 등은 고려인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행동이 박금철, 한상두의 사주임을 밝히고 사과하고 이들과 연합하여 8월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김일성이 연안계의 불만이 높아진 것을 알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내민 당근이었으나 박금철, 박정애 등 고려인과 연안계의 증오를 받고 있던 김일성의 측근들이 당 지도부로 포진한 것 때문에 8월 그룹은 그 정도로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결국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윤공흠 등이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했으나 김일성의 기민한 대응으로 인하여 거사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체포된 최창익, 박창옥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봉기가 연루된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김창만이 파견되어 1956년 9월, 황해남도당 전원회의가 개최되어 고봉기가 축출되고 고봉기는 당대렬을 약화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평양시 당위원회도 1956년 9월부터 집중검열에 들어가 부위원장 홍순관, 김명욱, 조직부장 김충식 등이 모두 출당되었다.[1] 황남 인민위원장 백순제, 개성시 인민위원장 리달진 등도 모두 숙청되었다. 이후 가택연금형에 처해졌다.

펑더화이아나스타스 미코얀의 개입으로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가 개최되면서 고봉기의 숙청은 일시적으로 유보되었으나 중소분쟁으로 이들이 더 이상 김일성에게 신경쓰지 않으면서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최종적으로 출당이 확정되었다. 이후 황해남도에서 발생한 배천바람 열풍 역시 모두 고봉기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1958년 11월에 체포, 1960년 1월, 최창익, 박창옥 등 19명의 정치범들과 함께 서철, 김익선, 리송운, 김경석이 주도한 비밀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총살되었다.

3. 여담

나중에 출소하여 소비조합 부위원장에 임명, <고봉기의 유서>를 집필했다는 정보도 있지만 이는 고봉기의 지인인 독립운동가, 조선인민군 군보 기자 출신의 조선족 작가 김학철이 고봉기의 이름으로 쓴 책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거의 정설이다. # # 위작임이 밝혀지기 전까지 많은 연구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위작이라는 것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 근래에도 참고한 문헌이 보인다. 다만 김학철이 고봉기의 지인이기도 하였고, 스스로도 해방 초기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이니 아주 황당무계한 위서까진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중국에 망명상태였던 김일성의 전 기요과장, 평양시 당위원회 부위원장 홍순관의 증언 등을 참조한 흔적이 역력하다.

4. 참고문헌


[1] 홍순관과 김충식은 모두 중국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