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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8:09:47

기석복

奇石福
1913년[1] 11월 3일 ~ 1979년 10월 (향년 65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고려인 출신으로 북한 초기의 정치인. 본관은 행주(幸州)[2].

2. 생애

1913년 11월 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네지노촌(村)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기준도(奇俊度, 1849.2.13. ~ 1915.1.19.)[3]와 어머니 김해 김씨(1845.6.17. ~ ?)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에 소학교에 입학, 1925년에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초중에 진학하여 1928년에 졸업했다. 이후 우수리스크한인사범학교에 진학하여 1931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전연방공산당 원동변강당의 지시로 하바롭스크한인공산대학에서 신문기자 강습을 1년간 받았고 원동변강 교육출판국 교과서 편찬관리국의 부책임자로 1932년 9월까지 근무했다.

1932년 10월, 연해주 올긴 구역 초중의 부교장 겸 교무주임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고려인 대이주가 결정되면서 한인 사범대학이 통째로 크즐오르다로 옮겨지자 크즐오르다로 이주했다. 당시 조선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대숙청에 휘말려 투옥된 상태였기 때문에 대학교육이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 때문에 기석복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종합대학 어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1년, 어문학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사마르칸트주 빼쓰트 다르곰쓰크 구역 고중 교장에 임명되어 1945년 8월까지 근무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준비함에 따라 기석복은 군사동원부의 명령을 받고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 장군의 25군 산하 정치부장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그로모프 대령 직속으로 발령받았다. 초기에 소련군 정치부 통역관으로 일했으며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다음에는 1945년 12월, 허가이, 방학세, 박의완, 강상호, 김열, 김승화, 김찬 등과 함께 북한으로 파견, 조선인민군의 창건에 참여했다. 1947년, 소장 계급을 받고 군사정치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1948년 1월까지 근무했으며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로동신문과 근로자 책임주필에 임명되었다. 기석복은 김일성 숭배와 소련제도 도입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대남 선전공작도 벌였다. 평양학원 조직 이후 당증수여를 위한 반심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전창철 등과 함께 사업했다. 1950년 11월, 기석복은 문화선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외무성 부상에 임명, 제네바에서 열린 협상에 북한 대표로 파견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1955년 4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박일우, 방호산 등이 맹렬한 비판을 받았고 김일성고급군관학교장이었던 방호산은 철직되어 자리에서 쫓겨났다. 기석복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후임 교장으로 임명되었다고 기억하지만 사실 교장은 최용건이었고 기석복은 육군중장으로 승진, 부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전 조선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 등 소련군사아카데미 졸업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학의 권위를 높이려고 많이 노력했다 카더라. 기석복의 아들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이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그를 뒷받침하는 로동신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55년 대기근, 소련의 계속된 간섭, 소련계의 불만, 고압적인 소련계에 대한 불만 등이 겹치면서 김일성은 대대적인 소련계 비판을 추동하였다. 1955년 12월 2일에서 3일 사이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기석복, 정률, 송진파 등 고려인 출신 선전, 문화 책임자들이 한설야, 리기영 등의 혁명작가들을 비방하고 리태준, 림화 등 남조선 출신 반동 작가들을 옹호했으며 자신의 반대파들을 반소행위자로 몰아서 핍박했다고 마구 공격했다. 이에 기석복, 정률, 전동혁 등 고려인들은 모여서 불만을 토로했는데, 이것이 고발을 당하면서 김일성은 더욱 큰 칼날을 뽑아들었다.

기석복은 1955년 12월 27일~28일 사이에 열린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 소환되어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참여자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1956년 1월 18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박창옥, 박영빈, 정률, 전동혁 등과 함께 숙청되어 문화선전부상에서 해임되는 한편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또한,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났다. 기석복은 1956년 3월 19일과 21일자 로동신문에 자신을 가족주의자라고 인정하는 공개자아비판문을 게재하는 등 싹싹 빌 수밖에 없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기석복은 중앙위원회에서 탈락당했다. 이후 공화국 도서출판사 사장으로 좌천됐으나 공포에 질려서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에게 찍힌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는 것을 본 기석복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아들들을 데리고 1957년 11월에 북한을 떠났다.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8일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기석복은 언젠가 북한의 정치상황이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우즈베키스탄공산당으로 파견되어 타슈켄트에 있는 중앙당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이미 학기 시작 3개월이 지난 후였지만 이론과 현실 모두에서 잔뼈가 굵었던 기석복은 순식간에 학급의 탑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의 타슈켄트 주재 기자부 부장으로 배치되었다. 또한 개인적인 행운도 찾아왔는데 1959년 3월에 그의 사마르칸트대학 동창인 샤로프 라시도프가 우즈베키스탄공산당 제1서기로 부임하면서 친구 덕을 톡톡히 보아 말년에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으며 공훈문화일군 칭호도 받았다.

이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삶을 적극 취재하면서 그 유명한 김병화를 알린 것도 그였다. 이후 1979년 10월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3. 참고문헌


[1] 행주기씨 인터넷족보에는 191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정무공-복제공 27세 노(老) 항렬. 족보명은 기노청(奇老靑).[3] 초명 기준영(奇俊永), 자는 양준(良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