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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3:20:29

김찬(1905)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고려인 출신으로 북한의 정치인, 금융인. 초대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2. 생애

1905년 10월 10일,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Посьет) 구역의 랴사놉카 촌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교원이었으며, 김찬은 1922년, 자신의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일본군이 알렉산드르 콜차크그리고리 세묘노프 등 백군 정권을 돕기 위해 출병하자 김찬은 반일 운동에 가담하여 볼셰비키군을 원조하였다.

콜차크 정권이 붕괴되고 일본군이 철수하자 연해주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볼셰비키군은 지역 한인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며 자위대를 구성하라고 하였고 이에 김찬도 자위대에 참여하여 분대장, 소대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랴사놉카 촌 소비에트 위원 겸 책임비서가 되어 연해주의 소비에트화에도 앞장섰다. 1925년 군에서 전역한 김찬은 포시예트 구역에서 콜호즈를 조직하였으며 1926년 푀예트 구역 공청회 위원으로 선출, 군 공청동맹 검열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전연방공산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1928년 9월, 전연방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당의 지시로 모스크바 중앙은행 재정대학으로 파견되어 은행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1년 5월, 전연방공산당 정규 당원으로 승진했으며 1932년에 재정대학을 졸업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련 중앙은행 포시예트 지부 은행장으로 취임하였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되자 우즈베키스탄 코칸드로 이주당했다. 재정 전문가였던 그는 코칸드시 재정계획과장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사마르칸트 상업대학 경제계획통신학부를 수료했다. 1942년 마르켈란시 상업부장으로 전출되었으며 1943년 마르켈란 시당위원회 제2서기로 승진했다. 1944년에 페르가나주 당위원회 조직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찬의 딸인 김 엘라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8월에 붉은군대에 소집되어 소련군 25군 산하에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참가했다고 하는데 기록을 보면 1945년 12월, 허가이, 방학세, 박의완, 김열, 강상호, 기석복, 김승화 등과 함께 당과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북한에 파견되었다고 되어있다. 북한에 도착한 이후 북조선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으로 거듭난 1차 당대회에서 검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련계가 다 그랬듯이 김일성을 적극 지지하여 1차 당대회 중 허가이, 김열, 한일무와 함께 오기섭, 정달헌 등 국내계가 재정사업에 있어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조장하고 있다고 맹공격했다. 북로당 탄생의 결과로 초대 강원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인민경제계획을 수립하면서 유일관리제 및 독립채산제 도입을 준비하였다. 김찬은 생산협의회 개념을 제시하면서 기술자, 기사, 노동자로 구성된 생산협의회라는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조직을 통해 생산기술 향상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 수립된 초대 내각에서 재정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제2군단 군사위원으로 부임하였다. 2군단을 따라 철원, 양구, 인제를 거쳐 서울, 수원까지 갔으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모스크바로 후송되어 제2외과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부상으로 인해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 다시 재정업무를 보았다. 종전 이후 상업성 부상에 임명되어 전후복구계획에 투입되었다. 1953년 9월,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대표단이 전후복구를 위한 원조를 얻기 위해 소련으로 출발하였다. 북소회담이 진행되던 중 김찬은 소련대사 수즈달레프를 찾아가 중국이 약속한 식량원조 20만톤 대신에 공산품을 제공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면서 북한에 식량난이 찾아올 위기가 있으니 소련의 원조금 중 10억 루블을 이용해 소련으로부터 식량을 구입하게 원조계획을 바꾸고 싶다고 타진하였다. 김일성은 격노하여 이를 두고 반당종파주의자들이 원조로 몇해 동안 '때려먹자는' 주장을 했다고 맹비난하였다. 당연히 소련에서 식량을 구입한다는 계획은 취소되었고 이후 김일성은 3개년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1955년에 대기근을 불러 일으킨다. 1954년 초에 중앙은행 총재에서 해임되어 상업성 제1부상으로 이동하였다. 후임 총재로는 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장 김제영이 임명되었다.

이후 김일성은 소련계가 북한 내부에서 소련식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을 버리려 하지 않고 소련에 자꾸 북한의 내부사정을 고해바치는 점, 소련계가 자신의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점 때문에 대규모 소련계 비판을 전개하였다. 김일성의 공업화 노선에 딴지를 걸었던 김찬도 살아남기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이었다. 김찬의 입지는 계속 좁아져서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했다.

한편 김찬의 아들 김 게오르기는 원래 레닌그라드 건설대학에서 공부하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조선인민군에 입대, 전후에도 제1항공 방사기 사단에서 비행중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김찬은 김일성에게 아들이 다시 레닌그라드 건설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제1비행사단의 대다수가 소련 유학파들이라서 김찬을 보내준다면 너도나도 소련으로 가서 비행사단이 해체될 판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내각회의에서 김찬을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며 비판한 후 즉시 소련으로 꺼지라고 사실상 추방하였다. 심지어 김찬의 며느리는 북한 공민이므로 갈 수 없다고 졸지에 이산가족까지 만들어버렸다.

1956년 말에 김찬 일가는 소련으로 돌아왔고 모스크바를 거쳐 다시 페르가나로 돌아갔다. 김 게오르기는 레닌그라드 건설대학 4학년에 편입했으며 김찬은 페르가나주 은행 부지배인이 되었다. 1958년 우즈베키스탄 SSR 정부가 김찬을 레닌그라드 고급 재정간부 연구원으로 파견하여 1년간 연구원으로 일하였으며 1960년 국가계획위원회 재정부장까지 올랐다가 1975년에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여 연금생활자가 되었다.

북한의 건설을 위해 몸바쳤음에도 온갖 멸시를 당하고 쫓겨난 원한을 잊지 않아 소련의 북한 정치인 고려인들이 조국통일 구국전선을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을 지냈다. 1992년 7월 28일,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