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03:21:14

이관술

<colbgcolor=#E40001><colcolor=#FED11E> 조선공산당 중앙검열위원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
이관술
李觀述|Lee Gwan-sul[1]
파일:이관술.jpg
출생 1902년 4월 25일[2]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3]
사망 1950년 7월 3일 (향년 48세)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현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당적

파일:조선공산당 글자.png

서훈
[[북한|]][[틀:국기|]][[틀:국기|]] 조국통일상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40001><colcolor=#FED11E> 학암(鶴巖)
자관(子觀)
족보명 이수해(李樹海)
이명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
본관 학성 이씨[4]
학력 입신학교 (폐교)
울산간이농업학교 (졸업)
중동학교(현 중동고등학교) (졸업)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 (지리역사과 / 학사)
경력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현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조선공산당 중앙검열위원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 ||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2.2.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2.3. 조선반제동맹 활동2.4. 이재유 그룹 활동2.5. 경성 콤그룹 활동2.6.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2.7. 투옥2.8. 사망
3. 논란 및 비판
3.1. 북한 지령을 받기 위한 무전기 설치3.2. 북한으로부터의 불법 자금 수령3.3. 불법 공산당 비밀정부 운영3.4. 공장자주관리운동 관련 논란3.5.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정3.6.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같다고 하면 상식부족" 발언 논란3.7. "공산당을 비판하면 반동" 발언 논란3.8. 박헌영을 추대하기 위한 공작과 전쟁 책임3.9. 이재유에 대한 배신적 발언3.10. 전향서 제출3.11. 중혼
4. 어록5. 관련 자료6. 가족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공산주의 운동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였으며, 광복 후 조선공산당의 2인자로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 대부분에 깊게 관여했다. 남조선로동당의 수장 박헌영의 최측근으로서, 박헌영의 오른팔로 통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고향은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이다. 유서 깊은 양반 집안 장자인 아버지 이종락(李宗洛)과 어머니 덕산 이씨(德山 李氏) 이성진(李誠震)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족이 울산을 떠나 울릉도에 거주할 때인 1902년 태어나 1905년쯤 울산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이관술이 다닌 입신학교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사립학교규칙이 제정되면서 전국 2000여 개 사립학교가 잇달아 폐교할 때 폐교했다. 일제 당국이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를 대신해 민족계몽에 힘쓰는 근대교육을 펼치자 통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입신학교가 폐교하자 이관술은 울산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다. 1921년 경주 외동에서 태어난 박가야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에 당시 경성부 종로 수성동에 있었던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3월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관술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사회주의를 접한 적도 있으나 1929년 전까지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고등사범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주의 강화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 나의 생각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내가 맑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경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그것을 연구하여 우리 민족 현실에 알맞은 길을 발견하자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당시 북경에 머물던 김창숙이 만주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는 심산 김창숙을 말한다. 그런데 김창숙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발생해 손후익이 수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가 입암으로 업어서 데려왔다. 손후익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딸이 독립운동가들의 비밀편지를 전달한 숨겨진 독립운동가이자 나중에 김창숙의 며느리가 되는 손응교였다. 김창숙이 돌아간 직후 일제 경찰의 검거가 시작됐다. 일경은 특별조사반을 구성해 수사했고 전국에서 약 50명을 체포했는데 입암마을에서 손진인, 손후익, 이우락, 이재락이 체포됐다. 2차 ‘유림단 사건’의 시작이다.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이관술이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보니 마을 전체가 유림단 검거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김창숙과 연관돼 손응교의 집에서 두 명이나 체포되자 마을 사람들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관술이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손응교가 자필로 쓴 회고록을 보면 “우리 집을 무슨 범죄의 온상처럼 보는 사람이 얄밉기만 했는데 이관술 씨가 우리 집은 훌륭한 가문이고 우국지사의 집이라고 칭찬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이관술은 움츠려 있는 손응교 형제들을 위로했고, 범서보통학교 입학까지 소개해줬다. 손응교는 그 전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 안 된다는 집안 어른들 입장 때문에 처음 학교에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색다른 경험은 조부 손진인이 출소하면서 다시 끝나게 된다. 이관술이 이듬해 방학 때 돌아오자 손응교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배움을 청했다. 손응교의 회고록에서 이관술을 통해 “신학문도 배우고 독립사상도 지도해주기에 무척 따랐고 잡지 개벽, 시집, 소설 등을 탐독하며 이상과 꿈을 키워 왔다”고 기억했다.#


이관술은 1929년 3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하였다.

2.2.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이관술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로 이관술이 공산주의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학생들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동덕여고보가 참여한 경성 여학생 운동을 지도한 근우회는 사회주의 계열이 속속 연행돼 구속됐고, 민족주의 계열은 이들의 항일투쟁을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민족 계몽을 명분으로 학교를 운영해왔던 인사들은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휴교를 하거나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동덕도 학생 만세운동이 진행될 때 동맹휴업이 계속될 것을 우려해 겨울방학을 앞당겨 실시하면서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월 중순으로 예정된 개학 시기를 늦췄다. 학생들은 학교재단이 겁을 먹고 굴종한다는 분노로 일렁거렸다.#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서 경향이 불 끓듯 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된 바가 있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는 그 때 학교 내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 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 투쟁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세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자 학생들을 지키려고 동료교사 신명균 등과 함께 교사들의 동반사직을 주동한다.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휴투쟁에 있어 신 선생은 사상의 차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협동자이었고 열렬한 반일투쟁의 지도자이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2.3. 조선반제동맹 활동

1932년 11월 중순 이관술은 이순근, 조정래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날 결정된 반제동맹의 활동 구호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수업료 감면, 학교 내 경찰 침입 반대, 입학에 대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반대,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책임 부담, 여자 교육에 대한 남존여비적 교육에 반대 등 6개 조항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반제동맹 산하 독서회는 보성고보,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경성부기학관, 경성기독청년학관으로 확대되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직접 지도했다. 교내 독서회는 이경선, 임순득, 김영원, 박인순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도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여동생 이순금과 윤금자, 김길순이 가두독서회로 참가했다.

경성반제동맹은 1932년 11월 하순, 12월에 동경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연안제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조선에서도 반제국주의에 앞장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파견한 조정래가 검거된데다 대회가 연기되면서 실패했다.

이후 반제동맹은 1933년 초 일제에 발각된다. 세포 조직 수가 13개에 이르고 체포된 숫자 미상의 인원 중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된 연루자만 43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
파일:반제동맹활동개요.jpg
파일:반제동맹조직책동.jpg
파일:반제송국.jpg
반제동맹을 보도한 기사 중 일부. 경성반제동맹은 대대적으로 대서특필된다. 전향을 거부한 조정래 등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전향서를 쓰고 재판정에서 전향을 맹세한 이관술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1934년 3월 31일 전향서를 쓰고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재판정에서 전향을 맹세하여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5] 이관술은 이미 박가야와 결혼을 했었기 때문에 중혼이었다.

2.4. 이재유 그룹 활동

이관술이 석방된 지 4일 후인 4월 13일 이재유가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했다. 이관술은 당시 기분을 회상기에 써놓았다.
내가 나온 지 3, 4일 후에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에게는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도로 운동선상으로 들어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 형용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나와서 보니 내가 검거될 때 잔류해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그간에 전부 잡혀 들어갔고 새로 활동하던 동지들 역시 이재유 사건으로 일망에 타진된 형세라 경성 중심의 운동은 전부 파괴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전전긍긍하며 요양하다가 결국 이재유를 찾으러 1934년 8월 하순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1934년 9월 중순 박진홍과 이순금의 노력으로 이재유와 접촉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장충단공원 뒤 <앵구> 약수터에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재유 동무의 첫인상은 논리가 명철한 것 매사에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 그러고 대단히 사무적인 것이 특색이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와 만난 첫날 이관술은 지식인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재유는 이미 이관술에게 몇몇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맡길 생각이었던지라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적당한 부서에서 당장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이관술을 설득했다.

이관술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도 이재유와 상의했는데[6] 이재유는 재판을 받으라고 조언했고 이관술은 이에 따라 재판에 출석하여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일단 자유의 몸이 된다.

이관술이 활동한 경성트로이카 2기 조직의 정식명칭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이다. 이관술은 학생부문을 맡았다.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7]은 노동운동 분야를 총괄했으니 이관술은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 된 것이다. 경성재건그룹은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여러 종류의 팸플릿을 발간해 경성과 인천 지역에 배포한다. 이인행, 이석면, 공성회 등 1기 경성트로이카에 관련된 인물과 접촉하는 책임은 이관술이 주로 맡았는데 그 결과 상당한 정도로 조직이 재건되었다.[8] 이런 경력을 통해 이관술은 일제의 수배자 명단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거물급 노동운동가가 될 수 있었다.
파일:경성재건그룹지도부.png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경성재건그룹의 목표는 연말연시를 기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경성의 또다른 노동운동 조직인 권영태 그룹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을 이관술이 맡았다. 이관술은 연말의 총파업을 준비하자는 내용의 팸플릿 등 경성재건그룹 문건을 가지고 권영태 그룹과 접촉한다. 그라나 권영태는 자신이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아 파견되어 왔으므로 이재유 그룹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이관술의 제안을 일축했고 경성 지역 양대 조직의 통합은 실패한다.

그리고 통합이 실패한지 석 달 만인 1935년 1월에 이재유 그룹은 검거 선풍을 맞는다. 이인행과 박진홍, 박영출이 먼저 체포되었으며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했지만 나머지 조직원 수십 명이 곧 연행되었다.

이후 이재유와 이관술은 인력거를 6차례나 바꿔 탈 정도의 숨가쁜 추격전을 벌이며 유순희, 이종희 등 동지들을 구출하고 잠적시켰다. 구출 작전을 마친 뒤 이관술과 이재유는 비밀 서류들을 땅에 묻어 두고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걷다가 홍천과 춘천까지 가게 된다. 이때 체포를 막기 위해 두 사람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맞는 복장으로 변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구실을 짜냈으며 그 과정에서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변장술이나 숨어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법[9]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두 사람은 두 달 간 강원도를 배회했는데 그동안 웃긴 일화들도 많이 겪은지라 이관술은 친척들에게 그 웃긴 일화들을 이야기해주곤 했다.[10]

강원도 배회를 끝낸 두 사람은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신주막동 비석골, 지금의 서울 창동 부근으로 와 수해민 형제로 위장한다.[11] 버려진 임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는데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한 기자에 따르면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장정 둘이 지냈을까 놀랄 만큼 협착했다고 한다. 지명수배자와 탈옥수 신세였던 이들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과 열악한 거주 환경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재치있게 살았다고 한다.출처
파일:이관술이재유아지트.png
이관술과 이재유가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그렇게 숨어 살면서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는 상당히 두꺼운 분량으로 이관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적기의 제작에 쏟았다.

그 과정에서 이관술과 이재유는 김희성의 '콩그룹'[12]이라는 조직과 연대하려 했는데 거부당했으며 이후 이관술과 이재유는 조직 명칭을 '경성재건그룹'으로부터 '경성준비그룹'으로 바꾼다.

이후 이관술이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적기 제1호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명의로 1936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적기》의 슬로건[13]
* <적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받으면 이전에 읽은 사람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모든 면을 쓸어 자기 지문만 찍어놓을 것
* 읽은 후에는 반드시 소각하고 적기를 들고 타인을 방문하거나 배회, 산책하지 않도록 할 것
《적기》의 보안 수칙

이후 적기 제2호를 11월, 제3호를 12월에 출간했고 책들은 투자한 시간답게 모두 두꺼운 분량이었다. 이렇게 나온 적기는 여러 운동가와 신문기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었으나 그만큼 일제의 포위망도 점점 좁혀지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1936년 12월 24일까지 적기 인쇄를 계속했다.

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는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재유는 잡혔을때도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파일:이재유체포.jpg
이재유 체포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2007

파일:이재유이관술악수로이별.jpg
1937.4.30 <매일신보> 이재유와 이관술…악수로 이별에 / 문제되는 이관술 행방

이관술은 오후 2시가 넘어가자 집을 나서 강원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재유의 체포와 이관술의 도주 소식은 철저히 보도가 금지되었다가 4개월이 지난 1937년 4월 30일 이후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체포 당시 철저히 비밀로 붙이며 보도를 통제한 것은 이관술을 비롯한 남은 세력을 모두 잡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관술은 잡을 수 없었다.
파일:경고특비이관술.jpg
1937.7.21. “경고특비 865-1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자의 행동에 관한 건” 경기도 경찰부

강원도로 빠져나간 이관술은 산중의 외딴집에서 새끼를 꼬아 망태와 멍석 만드는 일을 하며 겨울을 나는데 그를 좋게 본 주인이 데릴사위로 삼으려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왔노라고 나중에 가족들에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파일:박진홍.jpg
박진홍

1937년에 이관술, 박진홍, 공성회, 김순진, 이순금, 안병춘, 김재선, 이성학, 남남덕, 조병목이 그룹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그룹은 2년 후인 1939년에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는 단초를 제공한 조직이다.[14]

이관술의 제자 박진홍은 1937년 5월 석방되어 경찰 감시로 자유롭지 못한 와중에도 운동을 다시 하기 위해 공원회와 그의 동생 공성회, 김순진, 안병춘 등과 만났다. 그런데 공원회는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진단하였으며, 안병춘은 이재유가 파벌일 뿐만 아니라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맞서 박진홍은 이재유를 옹호했다.

한편 이관술은 1937년 6월 영등포에서 공장노동자 조직에 착수하였다. 1937년 7월 1일 박진홍은 이관술의 연락을 가지고 왔다는 한 운동자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음날 그의 안내로 상도동 부근에서 시장에 가는 방물장수로 변장한 이관술을 만났다. 두 사람은 번대방동, 신길동을 거쳐 시흥군의 신림리와 봉천리 사이를 원형으로 돌면서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박진홍은 이관술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확대강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15]

박진홍은 이관술의 모습에 놀랐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교사 시설에는 언제나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다녔는데 궤짝을 메고 있는 방물장수로 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관술은 궤짝에서 잡화품을 꺼내 박진홍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박진홍은 그런 이관술을 기억하며 ‘명랑한 혁명가’라는 칭호를 붙여 줬다.

1937년 7월 7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은 안병춘에게 이재유가 쓴 <자기비판문>과 운동자금을 주었다.[16]

1937년 7월 15일 이순금이 석방된다. 이순금은 박진홍이 말해준대로 7월 17일 오빠를 만나러 여의도 경성비행장 부근으로 들어간다. 몇 해 만의 만남에 초조해하던 이순금은 처음에는 농부로 변장한 오빠를 알아보지 못한다. 바로 앞에 와서야 오빠임을 알아채고 이순금은 눈물을 쏟았지만 이관술은 안부 말 한마디만 하고는 조직 재건에 대한 논의를 명령한다. 해방 후 이순금은 그런 오빠의 모습에서 위대한 혁명가의 면모를 느끼고 이런 혁명가를 오빠로 가졌다는 데 감격했다고 술회한다. 그런데 이 만남이 경찰에 발각된다.

이관술은 이순금이 맞고 있는 동안 혼자 도망갔다. 7월 18일 이순금은 출옥 나흘 만에 다시 붙잡히고 만다. 이순금은 또다시 옥중에 갇히게 됐다. 이렇다 할 ‘범죄행위’가 없었지만 일본 경찰이 사활을 걸고 수년째 추적하는 비밀운동의 지도자 이관술을 눈앞에서 놓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순금은 장장 9개월간이나 수감됐다.# 이 때문에 박진홍 또한 다시 경찰에 취조받게 되었다.
파일:이관술돌연경성출연.jpg
1937.7.23. <조선일보> ‘이재유 일당 이관술 돌연 경성에 출현, 여의도서 발견…’
"홀연히 경성시내에 그림자를 나타내었다가 홀연히 사라져서 극도로 경찰을 초조하게 하고 있다"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아서 그만 놓치고 말았다”

지하운동하는 이관술과 합법 생활 중인 공원회, 안병춘 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이순금과 박진홍의 부재로 이관술과 다른 조직원이 만나지 못하게 된 사이 공원회가 안병춘과 연결되며 1937년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일제 말 공산주의자들은 이재유 그룹의 운동을 파벌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국제선과 연결된 정통 운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박진홍은 9월 6일 기소중지로 석방되었다. 박진홍은 9월 7일에 공원회를 방문했다. 박진홍은 공원회를 지도자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공원회는 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역량이 부족했다. 박진홍은 지하운동을 원했지만 공원회는 만류했다. 1937년 10월 13일 박진홍과 공원회는 삼청공원에서 만났다가, 일제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양성호와 마주쳤다. 둘은 위협을 느끼고 지하로 잠적하기로 했는데, 직후 박진홍과 이순금이 경찰에 연행되어서, 박진홍의 1937년 그룹 만들기 운동은 중단되었다.[17]

한편 이관술은 1937년 7월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반찬가게 주인 등으로 위장하고 반전반제적인 소그룹을 다수 지도했다. 대구에서 전에 동덕여고보 청강생으로 넣어 공부를 도와주었던 손응교를 만나지만 쫓기는 몸이라 눈으로만 반가움을 표시한다. 이 때 이관술은 변장하고 대구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고 한다. 손응교는 이후 시내 이층집에 불이 나서 불을 끄다 보니 다다미 밑에 많은 책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 책이 이관술의 책으로 드러났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관술이 여러 개의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2.5. 경성 콤그룹 활동

경성콤그룹이 활동한 시기는 언론이 없어서 보도조차 되지 못할 만큼 폭압적인 시대였다.#

동생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수원에서 접촉한 뒤 1939년 1월 초 충주에 있던 김삼룡을 찾아가 새로운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후 경성에서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과 태창직물 소그룹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6개의 공장 세포와 10개의 가두세포(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직)를 형성한다. 이들이 활동을 재개하자 이현상권오직이 합류한다. 1939년 4월경 경성 콤그룹의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39년 5월에는 석방된 박진홍과 정태식도 가담한다.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모임 교재 『노동자 리플렛』을 집필하고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8.1 캄파니아 투쟁지침서'를 만든다. 이관술은 이론적 지도와 기관지 책임도 맡았다.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는 전국에 배포되어 읽히게 된다. 이관술은 「경성형무소의 반항사건을 보라」, 「남해제사의 동요사건」, 「염전인부 40명의 단결」, 「조선제강 양성직공의 단결」, 「예방구금령에 대하여」 등 기사를 직접 쓰면서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기관지는 이관술이 직접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오빠는 이 월간 출판물의 책임자로서 이 비밀 출판물을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이 당시 오빠는 기술문제와 여비문제로 고물장수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많았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심히 궁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동하였다.
이순금

한편 당시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출소해 있었다. 이관술은 박헌영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간 경위는 일제의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나온다.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이현상을 보내 출옥한 박헌영이 변절하지 않았는지, 항일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 수차례에 걸쳐 시험했다고 한다. 이관술은 1939년 12월 12일에 박헌영을 만나고 경성콤그룹에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박헌영, 권오직 등은 화요계, 서중석 등은 상해파였다. 경성콤그룹은 계파를 불문하고 모든 운동가를 결합한 조직이었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의 동료교사인 신명균과 교류하며 조선어학회와의 연대도 모색했다.

이관술은 그 후 함경도로 가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 조직, 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조직 등에 착수하고 노조를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이관술은 광부들을 조직하여 자신이 쓴 팸플릿으로 학습을 지도한다. 많은 광부들이 조직되어 조선혁명계림탄광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게릴라전에 대비해 전기배선도를 확보해 놓기도 했다. 이관술은 노동자들과 산중에 동굴을 파고 은거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한다.
1939년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 김형관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 조직에 착수하고 일방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이면서 나는 산중 토굴을 파고 <붉은 길>이란 출판물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隊) 조직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은 여러 가지 관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예의 서대문서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김태준 동무의 집에 갔다가 숨어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하여 서대문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김삼룡과 이현상이 체포되자 이관술은 이를 수습하고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관술은 김태준 집에 갔다가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1941년 1월 7일이었다.

서대문사건을 시작으로 박진홍 등 중간 지도자들이 검거되어 조직은 급속히 마비되었다. 검거된 조직원은 150명이 넘었다.

한편 이관술의 할아버지는 이관술이 공덕리에 숨어살 때 세상을 뜨고 계모는 수배 중일 때 사망했으며 아버지 이종락은 이관술이 체포된 이듬해인 1942년 2월 6일 사망한다.

이관술이 사라졌다는 걸 알자 경찰은 이관술 가족과 친척, 이웃을 연행해갔다. 가족들은 물론 입암에서만 아홉 명이 연행되어 고문당했고 고모가 사는 망성 마을 사람들까지 경찰서에 끌려갔으며 삼촌은 마침 출타 중이었는데 붙잡혀 고문당할까 두려워 그 길로 도주해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부산 사는 사촌여동생은 임신중인 몸으로 모질게 고문을 당했다. 또 이관술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매일 집에 찾아와 군화발로 온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들을 흩어놓았다. 이관술의 사진과 편지를 모조리 압수해갔고 서가의 책도 불온서적이라고 뽑아갔다.

이현상도 옥중 단식투쟁의 결과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가 신기하게도 도피에 성공하여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이렇게 탈출한 이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래서 조직원들은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 박헌영이 광주에만 있던 것과 달리 경성콤그룹 재건의 주된 장소는 대전이었다.[18] 이관술은 대전을 중심으로 엿장수나 고물장수로 변장해 가며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대전의 이층집을 습격하자 활동가들이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념서적이 한가득 발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안재성은 이것이 경성콤그룹 조직원의 거처라고 추측한다. 대규모 검거 이후에도 경성콤그룹 세력의 조직원 숫자가 상당했음을 의미한다.[19]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2.6.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되었다. 이관술은 서완석, 김형선, 최원택과 함께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된다. 4명으로 이루어진 중앙검열위원은 당의 모든 분야를 감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였으며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였다. 또한 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총무와 재정을 담당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대단했으며,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의 2인자이자 조선인민공화국의 선전부장이었기 때문에 광복 후 2개월이 지난 1945년 10월에 중도우익성향 잡지 ‘선구’에서 진행한 최초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렸다. 김일성, 김규식, 김원봉보다 높은 순위였다.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colbgcolor=#121212><colcolor=#fef2ca>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순위 이름 득표율
1위 여운형 33%
2위 이승만 21%
3위 김구 18%
4위 박헌영 16%
5위 이관술 12%
6위 김일성 9%
7위 최현배 7%
8위 김규식 6%
9위 서재필 5%
10위 홍남표 5%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출처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관술은 전국인민위원 명단에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관술 앞에 있는 이는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이었다.
<colbgcolor=#121212,#fef2ca><colcolor=#fef2ca,#121212>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김오성이 1946년 9월 쓴 <지도자 군상>에 따르면 "이관술이 중앙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한번도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무슨 권세의 자리처럼 자기의 실력도 없으면서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애쓰건만, 이관술은 시종일관 사양"했다고 한다.# 조선공산당에서도 이관술은 가장 실세 자리 중 하나인 조직부장에도 추천되었지만 사양하고 김삼룡 등에게 양보했다.[20]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방문하자 지역 인민위원회 주요 인사들이 모두 환영했다. 이관술은 경성에 나가 있는 울산 출신 인사 중 가장 고위급 인물이었다.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울산에서는 대대적인 환영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관술은 이 때 "지나치게 좌익적인 구호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으로 민심을 이반시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순금도 전국부녀총동맹 회의에서 "회의 분위기가 너무 극좌로 흐른 것은 앞으로 극복이 되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1946년 2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을 보면 "당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로 박헌영과 이관술이 언급된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여러 정치적 행위를 했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독촉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945년 11월 11일 기자 회견에서 이관술은 독촉 참가에 대한 질문에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참가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관술은 기자들에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완전히 제외한 통일전선”이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통일전선이라는 미명 하에서 일본제국 잔유세력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도발을 허하는 반민족적, 반인민적 전선”일 뿐이라고 경계했다.#
파일:이관술중경임정담화.jpg
1945년 11월 19일 <자유신보> 중경 임정에 대한 이관술 담화

이관술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종래 상식적인 견해에서 아직 더 무슨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국내와 해외의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을 규합하여 민족통일정권을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보편된 정치 상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경임시정부의 성격을 아직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음으로 앞으로의 귀추를 살펴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파일:이관술하지대담.jpg
1945년 12월 31일 <자유신보> 하지 중장과 회견한 공산당 이관술

이관술은 12월 30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만났다. 하지 중장이 각 정당 대표들을 군정청으로 불러 3상회의 결과뿐 아니라 신탁통치보다 앞서 만들 임시정부 구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대담 결과는 이관술이 기자들 앞에서 직접 정리해 밝혔다.#
“나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며 현재 우리의 노선은 민족통일전선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다만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관술은 소련의 지령이 있은 후 찬탁으로 돌변한다.

이관술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된다.
이관술씨는 그의 피로 쓴 지하운동의 과거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로 맹세하고 13일간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던 것을 이용하여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다. 그리고 3일간을 단식한 후 쓰러진 체하여 의사를 부른 사이에 미리 병에 받아 놓았던 커피를 머금고 있다가 의무실에 가서 각혈을 하는 것같이 토하여 보석을 하게 만든 것 등이다. 나의 쓰라린 경험을 말하면 한 없다. 이재유 동지와 강원도로 낙향하게 되자 양주로 가서 참외막을 만들고 그것을 아지트로 쓰면서 한 해 참외농사를 하여 가며 서울과 연락하다가 이재유 동지가 돌연 체포되었고 나는 피하여 4개월 동안을 엿장수 쓰레기장수 봇짐장수 등으로 몸을 감추고 다녔다. 1937년 12월 대구로 갔을 때는 몸만 감추기도 대단히 곤란한 때라 처음에는 다리 밑을 집으로 삼았고 거기까지 마수가 뻗치게 됨으로 이곳저곳 다리 밑 집을 이사다녔던 것이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2.7. 투옥

이관술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투옥되고 그 결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하게 된다.

1946년 5월에 다른 피의자들이 체포되었지만 이관술과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10월 17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4호 법정에서 열린 이관술에 대한 첫 단독심리 현장은 매우 스산한 풍경이었다. 재판정을 취재한 기자들의 기사를 보면 방청석에 불과 10여 명이 앉아 있어 쓸쓸했다고 적고 있다. 반대로 출석한 이관술의 모습은 매우 침착했다고 전한다. 당시 <동아일보> 취재기자가 쓴 법정 스케치 기사를 보면 ‘이관술은 처음부터 온순한 태도를 유순한 언어로 침착하게 답변을 계속했다’고 적고 있다. 재판장이 보인 일방적인 자세에도 이관술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근거들을 조목조목 언급했다.#
파일:오히려검사를동정.png
1946년 10월 27일 <독립신보> 오히려 검사를 동정
"나는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피고인들에게 미안함을 금치 못한다. 그들의 가족에게도 미안하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나 결국은 공산당 사건이며, 그 의도하는 바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공산당을 치려고 하던 차에 김창선 사건이 발생하자 이것을 기회로 이런 사건을 허위 구성하였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막연하고 부당한 논법을 가지고 합리화시켜 어떠한 목적으로 이 사건을 논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된 조 검사의 심정을 동정하여 마지 않는다. 검사는 지금이라도 정의의 길로 나가기를 바란다."
이관술
파일:일장곡이관술만은태연자약.png
1946년 11월 29일 <한성일보> 일장곡 일장가 / 이관술만은 태연자약


투옥 초반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이관술은 반제동맹 사건과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수감이었다. 이후 이관술이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던 중 광복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형무소로 수감되었다.

투옥 중인 1947년에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21]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했다.
파일:반곡초공적비.png
반곡초등학교 공적비.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했다고 적혀 있다.

2.8.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관술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파일:골령골학살.jpg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파일:골령골유해.png
2020년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유골 구덩이

3. 논란 및 비판

3.1. 북한 지령을 받기 위한 무전기 설치

광복 후 박헌영은 이관술의 집에 무전기를 구비해놓고 북한측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22].

즉 해방정국 박헌영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원활히 받게 하는 것은 이관술의 역할이었다.

3.2. 북한으로부터의 불법 자금 수령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는 다른 논란으로, 소련 <테렌티 시티코프 비망록>, 박병엽 회고록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에서 이관술의 활동시기 조선공산당이 북한으로부터 지폐를 받는 형태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것이 교차검증된다. 박헌영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의 재정부장인 이관술이 이를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실제로 미국 정보부도 이관술이 북한발 불법 지폐 유통의 주범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1945년 말까지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의 공산당에 고무되어 소련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자들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에 관한 주한미군정의 첫 번째 공식적인 추측은 라디오를 통해 1945년 11월 1일 하지 장군에 의해 발표되었다.

“남한의 공산주의 활동을 조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아직 얻지 못했고,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정보원들은 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이 평양의 본부에 종속되어 있고 지시를 받는다고 보고한다. 한국 전체의 공산주의자 지도자는 최익한이라고 알려져 있고, 김단야(김태연)와 최무정도 추가적으로 중요한 인사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최근 회담에 참가한 한 북한 인사의 진술이다. 그는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로 불려갔었다. 소련인들은 그에게 그가 대표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열리는 회담에 참석이 요구될 것이며, 소련 측 경계선의 전초기지를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이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후에 이는 자발적인 참가로 수정되었다. 소련 측 경계선의 전초기지를 통과하는 통행증은 발급되었다고 했다. 이 발표는 회담의 의장인 허헌의 발표와 일치하지 않았는데, 허헌은 북한에서 오는 대표들은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한다고 말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a) 서울에 있는 소련 영사의 존재, b) 남한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북한 내 조선은행의 모든 돈을 남한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소련 측이 인출하여 몰수한 것, c) 공산주의자들이 외부로부터, 짐작건대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왔다는 보고들, d) 300명의 공산당 조직원들이 북한의 함흥에서 남한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보고들, e) 내부의 사건들이 지역 공산당 지도자들의 추정 역량을 넘어서는 조직과 동향을 보여준다는 것.”

남한의 이 파견단은 북측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갑작스럽고 잠깐 동안 당혹스럽게 하는, 신탁통치에 관한 공산당의 태도와 관련있는 1946년 1월 3일 당의 입장 변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비록 이 때에 미군 당국은 심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후 4월 초에 남한을 지나는 한 한국인으로부터 뺏은 문서는 미군 당국의 확신이 근거가 충분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양측에 있는 공산주의자들 간에 실제 연락이 존재한다는 첫 번째 명백한 증거는 사실 1946년 1월 말 최헌리(Tch'oi Hon Ni)가 경주에서 강도 행위를 하다가 체포되었을 때 밝혀졌다. 최는 다섯 명의 다른 자들과 함께 북한 제1의 한국인 공산주의자 지도자 김일성 장군에 의해 보내졌고, 남한의 공산당 우두머리인 박헌영에게 보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진술했다. 최는 자신이 그 집단의 하급 당원일 뿐이며, 그 집단의 목적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좌와 우의 연합체를 만들고자 했던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의 실패는 정치 고문 랭던에 의해 소련의 음모 탓으로 돌려졌다. 랭던은 1946년 2월 22일의 무선 전보를 통해 하지 장군이 현재의 민주의원을 한계까지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민주의원을 진짜 연합체로 전환하기 위해 분투할 것인지의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계속해서 지적했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미국은 파시스트와 친일파 같은 사람들을 지원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반면에 후자를 선택한다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민주의원은 매우 강하게 좌측으로 기울어질 것인데, 북한에서 내려오는 집단에 의해 5대 8의 기준(도의 수에 따라서), 그렇지 않더라도 2대 1의 기준(인구 수에 따라서)에 민주의원이 맞닥뜨릴 때,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 그룹들이 민주의원을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이 딜레마는 전체 기간 동안의 결정적인 요소였다. 안정된 정치 집단이 남한에 형성되어, 북한에서 소련의 승인을 얻은 집단과 통합된 정치 기구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이후에 결합한다면, 장래의 한국 정부는 바로 극좌의 품으로 넘겨질 것이었다.

동시에 1946년 2월 22일 하지 장군은 정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소련 측은 북한에 그들의 집단을 세우고 있고(2월 8~9일에 수립된 임시인민위원회), 조선민주당(Chosen Democratic Party), 연안독립동맹(Yenan Independence Alliance), 조선공산당(Korean Communist Party)이라는 세 개의 당 이름 하에 공산주의자들을 위장하고 있다. 분명한 공산주의자인 여운형에 의해 지도되는 남한의 인민당(People's Party)[조선인민당]은 ‘민주적’ 사회단체로 인정받고자 하는 여러 저명한 집단들을 모으고 있고, 한편 우익과 중도는 뛰어난 지도자들을 배경으로 해서 집단들의 대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통제는 최근 강화되었다. 공산당의 입국 허가가 없는 남측으로부터의 통행자는 미국의 스파이로 체포되고 있다. 소련은 그들의 정부를 북한의 민주적 대표로서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것이 틀림없고, 동시에 남한의 공산주의자 대표들에게 공산주의자에 의한 조선과도정부의 통치권을 주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의 위신을 계속 유지되도록 계획하고 있고, 한국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진보 언론이나 다소 좌파인 언론에서는 나를 공격하겠지만, 현지에서의 그 외 다른 조치는 치명적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까지 공산주의자 조직의 북측과 남측 지부가 연락한다는 암시를 주는 첩보는 제24군단의 정보참모부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는데, 1946년 3월 초에 남한의 공산당으로 자금을 보내기 위한 협상이 서울의 소련 영사관에서 있었다. 소련은 조선공산당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이후의 활동들을 지원하기 위해 7,000만원의 금액을 약속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위의 금액에서 2,000만원을 가져간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그 돈은 대체로 신문을 발행하는 자금을 대는데 사용했다.

동시에 “평소 믿을 만한 한국인 정보원”으로부터 정보가 밝혀졌는데, 소련은 남한에서의 조직 작업에 이용하기 위한 조선은행 지폐의 여분을 구하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북한에서 소련군 화폐를 발행했다. 또한 1946년 2월 2일 민주주의민족전선(Leftist Democratic People's Front)의 조직을 위한 서울의 예비회담에서는 『조선인민보』의 지원을 위한 약 1,200만원의 금액이 가결되었다고 보고되었는데, 이 신문은 남한에서 공산당의 공식적인 기관지였다. 『조선인민보』의 편집인이자 발행인 겸 사장인 홍증식은 위의 정보원에게 신문사를 경비하기 위해 매일 약 8,000원이 지출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와 같은 금액은 당의 자금에서 나온 것으로 추론된다. 홍증식은 이상하게도 이 직업을 갖기 전에는 비교적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1946년 9월부터는 꾸준히 더 부유해졌다. 그 외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좋은 옷과 자동차를 과시하기 시작했고, 호화로운 접대를 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

1946년 3월 말에 하지 장군은 상당한 양의 새로운 돈이 남한에 들어와 있는데, 이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지극히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하지 장군은 계속해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6,000만원(아마도 공식적인 일본의 지원으로부터)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다 써버렸고, 다시 채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하지 장군은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내는 전문에서 “비록 그 돈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었지만, 소련 대표단(공동위원회를 위한)의 도착과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기 위해 수십만 원의 돈이 남한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소련 측의 새로운 혹은 예상치 못한 방식이라고 여겨서는 절대 안된다. 단지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와 다를 바 없다.”

워싱턴 당국에서는 즉시 추가적인 내용을 알고 싶어 했고, 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 위한 소련 대표단원들, 또는 서울의 소련 영사와 회합하는 현지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의 규모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방첩대는 영사관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정보원들은 실제 정당에 참가하는 사람들로 구했다. 일주일 이내에 하지 장군은 답장의 형태로 다음의 정보를 전문으로 보냈다.

“일관되고 믿을 수 있는 보고들을 받았고,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인 박헌영과 인민당의 당수 여운형이 최근 3~4달 간 소련 영사관을 빈번하게 방문했음을 확인하였다. 몇몇의 보고에서는 두 사람 모두 영사관에서 자주 거주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영사관에서 한국인들과 정치 회담이 열렸다는 믿을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북한의 공산주의자이자 인민정부의 지도자인 김일성이 최근 서울에 도착했고, 영사관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 조사 중이다. 추가적인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곳에서 ‘스탈린그라드’로 알려져 있는 숙사에 거주하는 소련 대표단 내 적은 수의 단원들은 한국인들의 많은 접대에 참여하고 있다. 어떻든지 간에 정치 지도자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군의 대위이자 소련 대표단의 단원이었던 한 한국인은 현지 한국인들과 회담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적으로 분명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문제에 관한 지속적인 감시를 유지하고 있다.

추가 정보는 다음과 같다.

“...다음은 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의 통역으로 서울에서 근무 중인 한국계 소련군 장교, 김소령과 스네그(Sneg, 이름은 알 수 없음) 소령의 활동 내역이다. 김과 스네그는 사복을 입고 서울의 여러 곳을 빈번하게 방문하고 있다고 하며, 매번 다른 운전수를 요구한다고 보고되었다. 그들은 대개 운전수를 목적지 근처에 기다리게 하고, 남은 거리는 걸어서 이동하거나, 차량 근처를 걸어 다니면서 다양한 한국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남북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확실히 자리를 잡은 당의 방침을 따라서 남한 공산주의자 지도자들과 기관지에 의해 주창되는 친소련적 선전의 지속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현지의 “신문들” 가운데 가장 강경하게 목소리를 내는 신문은 『조선인민보』였는데, 서울에 있는 공식적인 공산당 기관지이고, 이는 공산당 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더 많은 증거가 이 시기에 드러나게 되었는데,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서 북측으로 보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4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의 서울 본부에 대한 방첩대의 급습에서 노동자 정치 학교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의 원산으로 향하는 당원의 실제 통행 허가증이 발견되었다. 통행증의 뒷면에는 사람 이름이 소련어로 적혀 있었다. 마찬 가지로 조선공산당 본부에서 획득한 다른 문서에는 평양의 정치 학교로 파견될 4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신임장과 위임장이 있었다. 8월 7일 조선인민당의 조직부장인 김세용의 자택을 급습했을 때에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북한 통행증이 발견되었다. 그 통행증은 박헌영에 의해 서명되었고, 일부는 소련어로 적혀 있었다.

1946년의 늦봄과 초여름까지 북측과 남측 간의 연결은 모든 의혹의 그림자 너머로 확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5월 16일 서울 본부의 급습에서 압수한 조선공산당의 장부들을 통해, 여러 번의 북한 방문이 매달 당의 자금에서 지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특별히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한 번의 단독 방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실수인 것 같은데, 특정 예금으로서 받은 돈의 실제 자금줄을 보여주었다. “1월 7일, 정재달이 북측에서 1만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군정 법령 제55호(정당의 등록)의 요건에 따라 군정에 보고된 영수증과 당의 지출 내역이 압수한 장부들의 내역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장부들은 미국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게다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5월까지 기간의 총 수입 금액은 284만 6,185원 25전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약 248만 7,100원은 나중에 위폐 사건의 중요 피고인인 이관술로부터 받았다. 당을 위한 돈을 받을 때, 사람 이름을 쓰는 이 체계는 실제의 출처를 드러내지 않고 효과적으로 감추었다. 이관술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출처 불확실한 주요 자금을 가지고 있었고, 이 돈을 언제든 당의 자금이 줄어들었을 때 꺼내어 주었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었다. 이 주요 자금은 더 중요하게 보호되고 있는 다른 장부들에 의해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지만, 미군 조사관들은 그런 장부들을 절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남한의 좌익 지도자들이 정책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북측의 상대들을 자주 방문한 것이 북측과 남측의 밀접한 동맹 관계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극좌 세력으로부터의 이 외부 지령은 첫해동안 내내 미군의 점령을 괴롭혔다. 사실 이 꼭두각시 지도자들의 주요 목적은 미국이 점령하는 지역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고, 이는 미국에 의해 외관상 훌륭하게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절망하는 한국인들을 극좌 진영의 겉모양만의 위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목적이 완수될 수 있었다면, 소련은 국제 관계라는 장기판에서 최소한 말 하나를 추가하여 영향력이 상당히 강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미군정 문서 소련과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관계

3.3. 불법 공산당 비밀정부 운영

위 북한으로부터의 불법 자금을 숨기기 위해 이중장부를 운영하였으며, 당연히 불법이었다. 정판사 재판에서 이관술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점령이 시작되자마자 남한에 있는 공산당의 전략은 미군정의 노력들을 사보타주하여 미국 점령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한국의 대중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자극을 유발하는 몇몇의 상황 혹은 활동의 형태로 나타났고, 사건의 진실에 비해 지나치게 포장되었다. 고발, 선전, 소문, 혼란 등과 같은 먹구름이 밀려왔고, 미군정 아래의 남한에서 만들어진 진전은 자주 순간적으로 흐릿하게 되었다. 특별히 아프게 느껴졌던 점들은 미곡 수집, 인플레이션, 군정 내의 인사, 토지개혁의 결여 혹은 한국인들로 구성된 정권의 부재 등인데, 마지막 두 가지는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북한의 상황과 반대되는 것이다. 폭력과 화폐 위조, 원래의 의도와 상당히 다른 뜻으로 미국의 성명을 왜곡하는 행위 등을 일으키도록 선동하는 조직들은 모두 공인된 공산주의 전략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아주 많고 다양해서 예를 들기조차 불가능하다.

일례로, 1945년 12월 21일 이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이자 『조선인민보』의 사장인 홍증식은 사실과 정반대되도록,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장군이 한국민주당(Hankook Democrats)에 의해 “매수”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을 반대했다고 밝혔다. 홍증식은 이것이 아놀드 장군이 군정 장관 자리에서 “해고”된 이유라고 말했다.

1946년 1월, 공산주의자들의 통치를 받는 조선학생스카우트(Korean student scouts)는 미국인들을 위해 고용된 통역사들이 그들의 직업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벽보들을 만들었다. 같은 달의 말에는, 북한의 평양 공산당이 그들의 목적을 추진하고 우익 단체들을 테러하기 위해 남한으로 사람과 돈을 보내고 선전 활동을 시킨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또 3월 25일에는 방첩대가 북측에서 내려온 새로운 테러 조직을 보고했다.

4월에는 공산주의자가 농민들의 조직을 지배하고 있고, 인민위원회에서 남한의 농민들에게 그들이 수확한 미곡을 가지고 있다가 암시장에 팔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 서울의 공산당 본부 습격에서는, 공산당이 시위를 목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조직들에 돈을 지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밝혀졌다. 5월에는 두 명의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전라남도 지방의 유세에서, 지방에 나타나는 미군정의 부패를 비난하고 한국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자극했다.

공산주의 지도자와 조직들에 의해서, 군정이 후원하는 경찰에게 가해진 거듭된 언어적 매질은 점령 첫해 전체의 특징이 되었다. 친일파와 만행, 부패, 경찰에 의한 좌익 압박 등에 대한 비난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때로는 경찰에 대한 이러한 반대가 폭력으로 선동되었다. 또한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남한 도처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나는 파업과 노동 쟁의들의 많은 수가 북측에서 남한으로 침투한 공산주의자 조직들에 의해서 선동된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작은 노동 쟁의들을 재빠르게 이용했고, 반체제적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채질했는데, 목적하는 것은 당연히 미군 사령부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1946년 5월 25일,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는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뉴스는 공동위원회의 문제조차 잠깐이나마 2순위로 밀어냈고, 공산주의자의 위신과 박의 당 장악에 심각하게 충격을 주었다. 1946년의 봄 동안에는 엄청난 양의 100원권 위조지폐들이 서울과 남한에 범람했다. 이후의 재판에서 약 900만원에서 1,100만원이 위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5월 3일 경찰은 마침내 한 빌딩에서 위폐를 제조하는 인쇄소를 찾아냈는데, 그 빌딩에는 공산당 본부와 극좌신문인 『해방일보』의 인쇄기가 있었다. 공산당의 당원들은 즉시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연루된 자들 중에는 공산당의 재정부장인 이관술(Lee Kwan Soo)과 잘 알려진 공산주의자이자 『해방일보』의 사장인 권오직이 포함되었다.註 011 사실 이들 가운데 한명을 제외하고는 결국 체포된 이후에 당원으로 밝혀졌기는 하지만, 미군 당국은 당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그 자체로 고소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공산당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모든 문제를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단정했고, 공산당 혹은 공산당의 어떤 관계자도 위조 집단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 사건은 그들에 따르면 “우리 당의 존엄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악랄한 음모”였다. 1946년 7월 29일 서울의 법원 앞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전례 없는 폭동의 혼란과 유혈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기소된 위조범들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폭동 과정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았다. 그때 하지 장군은 비록 “공산당이 그 사건에서 얻은 이익의 정도에 관해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중대한 의혹을 사고 있을지라도”, 재판이 계획된 것처럼 동일한 기준으로 각 개인의 재판으로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판결은 최종적으로 1946년 11월 30일에 내려졌는데, 이관술 외 3명은 종신형을, 그리고 다른 4명의 피고는 그보다 적은 형을 선고받았다. 법적 절차의 마지막에는 피고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노래하여 시선이 집중되었다.

군정을 향해서 행해지는 점점 더 발작적인 선전 중에 대표적인 것은 1946년 8월 15일 조선공산당의 서울 위원회가 배포한 전단이었는데,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군정은 식민지 정책을 버려야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넘겨야 한다.
“8·15의 일주년 기념을 맞아 완전한 민주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
“동포들이여, 북한을 보라.
“토지 개혁, 노동 법령, 남녀평등 법령이 완전하게 시행되었다. 일본인들과 반민족자들의 회사는 국유화되었다. 공장들은 활발하게 가동 중이고, 실업자는 없다. 북한의 사람들은 지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권은 인민들의 손에 있다. 민주주의 조국의 건설은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에서 해방의 첫 해에 소련군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동포들, 남한은 어떠한가!
“해방의 기쁨은 굶주림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사람들의 자유는 반동 경찰의 총검과 총에 의해 조각났다. 이승만과 김구의 지도 아래에 있는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들은 미군정의 도움을 바탕으로 인민들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이뿐인가? 그들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는 미소공동위원회(U.S.-Soviet Joint Conference)[위원회의 오기]의 휴회를 야기했고, 한국을 외세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이것이 미군정 아래에 있는 남한의 상태이다!

1946년 8월 초에 하지 장군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 공산당의 활동들을 상급 기관에 요약하여 보고했다. 하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특정 혐의들을 만들었는데, 모든 것은 미군 수사관의 손에 들어온 확인된 공산당 문서들을 기반으로 했다.

1.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의욕과 능률, 충성심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의 경찰과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로 침투한 점.
2. “불화를 만들어내고 한국인들을 혼란시키고 분열시키려고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기 위해” 남한 내에서 공산당이 노력한 점.
3.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All Korean Farmer's Union)에서 1945년 수확한 미곡과 1946년 여름 수확한 곡물을 미군정의 곡물 수집 정책에 내어주는 것을 막기 위한 지시를 발표한 점.
4. “대도시와 식량 부족 지역에서의 식량 배급을 방해하여 사람들 사이에 고통과 불안, 불화를 만들 더 좋은 기회를 조장하고, 법률 기관의 명성을 떨어뜨려서 더 많은 당의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점.
5. 공산당이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세금과 지대를 지불하지 않도록 하고, 공공사업을 계속 이행하고 하자가 있는 경제 시설들을 수리하는데 그 돈을 사용하도록” 충고한 점.
6. “폭동을 부추기고 민간 소요사태를 만들 모든 기회를 포착하고”, 더해서 “언제든 기회가 있을 때 문제를 조장하기 위해 훈련된 선동가들을 활동시키고 군중들과 집회에 침투시키도록” 지시한 점.
7. “광범위한 스파이 체계”가 지속되고 있는 점.
8. 학생과 청년 운동의 대중적인 선전 활동과 공산주의 이론의 학습이 행해지는 점.
9. 세심한 조작과 다중 당원 가입, 비밀 스파이 활동 등을 통해, 몇 개의 노동조합들과 농민조합, 청년단체 중 핵심 세력의 “사주를 받은 수천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점.

하지 장군은 이 고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론 내렸다.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아주 민주적인 권리와 남한에 존재하는 특권을 이용하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혼란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고, 한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으며, 미국 행정부와 원조에 대해 불신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고,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목적을 성공시키려 한다.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방식 내에서 정치권력을 구하는 민주주의 정치 조직의 모습이 아니었고, 남한의 경제와 정치의 진전에 손상을 입히고 방해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잘 계획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의 핵심 세력을 작동시키는 동기는 한국의 본질적 특성, 그리고 이해관계와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활동이 분명하고 엄격하게 남한의 밖에서 지시된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들의 지도자들의 목적은 한국 민족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없이 명백하게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국가들의 목록에 추가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활동은 미국의 인내심을 크게 시험했는데, 이는 미군에 대한 완전히 노골적인 간첩 행위였고, 결국에는 이것이 파국을 가져오도록 만들었다.
미군정기 주한미군사 주한미군사 2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미국인들, 소련인들, 그리고 한국인 공산주의자들 사보타주

3.4. 공장자주관리운동 관련 논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공업부문 생산은 75.2퍼센트나 감소했고 실업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재조직하기 위해 공장을 접수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화·조직화돼 있던 공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공장뿐 아니라 운수업, 상업, 어장, 극장, 학교 등으로 확산됐다. 1945년 11월 4일까지 16개의 산별노조에 7백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다.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장관리에 개입했고,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관리위원회조차 노동자들의 협조 없이는 공장을 운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 간부인 이관술은 공장관리운동이 “중앙간부로서 귀찮으니 자본가한테 넘겨줌이 어떠냐”는 발언을 했다.
[23]

3.5.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정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이 지배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체를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르는 대한민국으로서는 비판점이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 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정권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관술의 임정요인의 환국에 대한 견해 발표

3.6.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같다고 하면 상식부족" 발언 논란

(問) 일부에서는 인민공화국 또는 인민위원회와 貴黨과의 관계가 투명치 않다고 하여 貴黨이 즉 인민위원회라고도 보는 이가 있는데
(答) 이것을 같다고 보면 상식부족이다.
조공 이관술, 민족통일운동 현황 문답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와의 관계가 투명치 않은 것이 사실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도 교육받지 못한 민중은 충분히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혼동할 수 있는데 상식부족이라고 일축해버렸다.

평전 등 옹호자들의 이관술에 대한 해석과는 달리, 이관술이 남긴 발언을 실제로 보면 매우 과격한 공산주의자임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에 보낸 축사도 다른 인사의 축사와 비교해보면 혼자만 상당히 과격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철쇄(鐵鎖·쇠사슬)에 얽매이었던 조선일보가 다시 나오게 된 것은 귀보(貴報)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방금(方今·이제) 조선이 모든 반역자를 박멸(撲滅)하고 단연코 민족을 통일하여야 할 중대한 현 단계에 있어서 조선일보가 전통 있는 그 본령을 충분히 발휘할 것으로 크게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5년만의 복간

3.7. "공산당을 비판하면 반동" 발언 논란

(問) 일부에서는 貴黨의 정강이 급진적이고 貴黨의 행동이 너무 편협과격하다고 비난하는 편이 있는데.
(答) 우리 당의 당면 주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당면 주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이것을 과격이니 편협이니 한다면 그는 반동적 부류에 소속된 인간들일 것이다.
조공 이관술, 민족통일운동 현황 문답

이관술은 공산당을 비판하면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여운형과 같은 온건 정치인은 자신의 당을 비판한다고 반동이라고 하지 않는다.

3.8. 박헌영을 추대하기 위한 공작과 전쟁 책임

해방정국 조선공산당, 남로당의 다수 공산주의자들이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관술은 "박헌영의 오른팔"로 불리게 될 만큼 박헌영을 조선공산당의 1인자로 추대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고, 이는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자료에서 교차검증가능하다. 그리고 이관술이 여러 공작으로 추대한 박헌영은 6.25 전쟁의 주범이 된다.

3.9. 이재유에 대한 배신적 발언

이재유와 파벌 운동을 한 것처럼 말을 하는데 실제로 나는 그런 생각에서 한 일이 아니고 나는 운동할 의사는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재유를 따라서 한 데 불과하다. 장래는 당신의 방침을 따라서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이관술은 전적으로 박헌영을 따르게 되는데, 박헌영을 따르는 과정에서 그 이전 따랐던 이재류를 파벌이라고 매도한 점이 비판이 소지가 있다. 이재유는 이관술을 지키기 위해 체포 당시에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관술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는데, 정작 이관술은 그러한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비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도 계속 이관술이 소속된 그룹은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비난하곤 한다.

3.10. 전향서 제출

이관술은 조선반제동맹 사건 당시 전향서를 제출하고 다른 동지들이 실형을 선고받을 때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물론 시대상황상 전향서를 제출할 수는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비판점이 아니다. 다만 박갑동 등 일부 이관술 찬양자들의 말과 달리 노덕술의 고문에 굴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애초에 한 번이라도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는 것 자제가 박갑동의 말과 이를 인용한 소설 남로당 이외에는 근거가 없다.

3.11. 중혼

본처인 박가야가 있음에도 조선총독부 직원이었던 박선숙과 재혼한 것이 비판의 소지가 있다.

4. 어록

이재유와 파벌 운동을 한 것처럼 말을 하는데 실제로 나는 그런 생각에서 한 일이 아니고 나는 운동할 의사는 있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재유를 따라서 한 데 불과하다. 장래는 당신의 방침을 따라서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 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정권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 당의 당면 주장을 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당면 주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이것을 과격이니 편협이니 한다면 그는 반동적 부류에 소속된 인간들일 것이다.
중앙간부로서 귀찮으니 자본가한테 넘겨줌이 어떠냐.

5. 관련 자료

6. 가족



[1] Lee Gwan-sul은 변은진이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표기이다. 미국 문서에는 Lee Kwan Sool 혹은 Lee Kwan Soo 두 가지 방법으로 표기되어 있다. MBC 다큐프라임은 Lee Gwansul로 동영상을 올렸다. 이관술 본인이 사용한 표기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2] 제적등본에 1902년 4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933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2년 7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안재성이 쓴《이관술 1902-1950》의 친족의 구술에 따르면 출생지는 울릉도이고 울릉도 가구도 있다고 하니 실제 출생지는 울릉도일 것이나 제적등본이나 호적 등에는 어디에도 울릉도 주소는 나오지 않고 입암리 출생이라고 쓰여 있다.[4] 18세 수(樹) 항렬[5] 이관술 (李觀述)(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6] 왜 재판 이야기를 하냐면 이관술은 재판을 받던 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이라 재판이 정지된 것이지 아직 끝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7]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8]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9쪽. 판결문에 따른 것으로, 관련자 30명 중 10여명이 이관술이 맡은 사람이었다.[9] 예를 들어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식당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밥을 사먹는가 등에 대한 것이다.[10] 대표적인 일화가 폭설이 산야를 뒤덮은 산중에 갇힌 이관술과 이재유는 꼼짝 못하고 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는데 1월의 한파 속에 노숙을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지라 두 사람은 옷을 몽땅 벗어 바닥에 깔고 알몸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서로의 온 몸을 손으로 문질러 열을 냈다고 한다. 알몸으로 부비기를 한지 사흘 만에야 마을을 찾아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11] 가명을 각각 김대성, 김소성으로 지었으며 나이가 많은 이관술이 형이었고, 이재유가 아우였다.[12] 이 단체는 경성콤그룹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이관술이 만드는 경성콤그룹과는 다른 단체이다.[13]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14]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5]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6]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7]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8]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19]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20] 출처: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 운동사[21] 반곡초등학교는 원래 언양초등학교 분교로 해방 전인 1943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 위치인 울주군 언양읍 반곡리 709번지로 이전한 것은 1946년이었는데, 1947년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부지를 기증받고 건축비를 모았다.[22] 박헌영 평전 2009년판 각주[23] 해방 후(1945~46년) 공장관리운동 60주년 - 한국사 최초의 대중적 노동자 민주주의[24] 족보명 이수학(李樹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