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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07:37:39

경성 트로이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4px-Hammer_and_sickle.svg.png 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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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파일:이재유친구들화질좋은.jpg
경성트로이카 활동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박진홍.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경성트로이카 활동가 사진은 흔히 이 일곱 명을 선정하는데, 안재성의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영향을 받은 인물 선정이다.
이명 이재유 그룹
지도자 1기: 이재유, 이현상, 안병춘, 변홍대, 최소복
2기: 이재유, 이관술, 박영출
3기: 당재건조직 : 이재유, 이관술[1]
목적 독립운동, 노동운동, 대중투쟁[2], 혁명
후신 경성콤그룹
1. 개요2. 특징
2.1. 트로이카 이론2.2. 일정 지역 기초·산별 노조2.3. 국제주의와 국내주의의 조화
3. 목표4. 성과5. 기관지 《적기》관련
5.1. 보안 수칙5.2. 제작 방법
6. 1937년 이관술 그룹 형성7. 경성콤그룹에 미친 영향8. 오해와 진실
8.1. 이재유-김삼룡-이현상이 최상부 트로이카다?(X)8.2. 경성트로이카는 세 명씩 짝을 짓는다?(X)
9. 관련 자료10.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자 노동운동 단체. 이 단체의 운동은 ‘경성트로이카’(1933. 8.), ‘경성재건그룹’(1934. 11.),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으며 이 구분은 이재유가 직접 제시한 것이다. 이 단체의 활동가들은 이재유 그룹이라고 불렸다.

2. 특징

2.1. 트로이카 이론

이재유 그룹은 이전까지의 조선공산당의 전위당 이론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당 건설에 반대하였으며 '트로이카 운동'이라는 독창적인 조직론을 만들어서 대중운동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가 보기에 종래의 당재건운동은 대중적 기초 없이 전국적 조직을 가지고 당을 먼저 만든 다음 대중을 얻으려 하였기에 전위와 노동대중이 분리되는 폐단이 있었다. 이재유는 전위가 노동자가 되어 노동대중 속에 파고 들어 가 개인적으로 동지를 얻어 대중적 기반을 마련한 다음 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조직선도 없고 누가 권력자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동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3]

대중을 얻어 상당한 그룹이 결성된 때에 비로소 조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종래와 같이 사람을 지도한다거나 지도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것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제1보를 내딛어 스스로 최하층의 노동자들과 교유하면서 대중 층에서 동지를 얻어 서서히 상부조직으로 전개하려고 한 것이 나의 근본방침이었다.
이재유


트로이카는 이재유 그룹 1기 조직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트로이카는 운동 방침으로서, 1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재유 운동의 전체에 적용됐다.[4]

트로이카는 정식 조직을 만들기 전 노동자농민의 의식을 고양하고 공동투쟁을 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적 계기적 조직으로 설정된 것이었다.[5]

이후 제3기에서 중심인물인 이관술이 당재건조직(이것이 정식 조직)에 속하고 운동자로서 아직 한계가 있던 서구원이 경성트로이카(정식 조직을 만들기 전 일종의 예비 조직)에 소속되어 이재유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트로이카가 지닌 위와 같은 성격 때문이다.[6]

다시 쉽게 설명하면, 이재유는 전국 조직 먼저 만든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 봤기 때문에 정식 조직을 만들지 않으려 했지만 공동투쟁을 위해서는 아예 아무 연결선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정식 조직을 만들기 전 예비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예비 조직 이름을 트로이카라고 지은 것은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자는 의미이다.

트로이카 조직에서도 지도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고 이재유의 주장에 따르면 지도하는 동시에 지도를 받는다. 지도자는 개별적으로 각 성원들과 접촉하여 각각의 부문운동에 관하여 개별적으로 협의한다.[7]

트로이카 조직은 운동자들 사이에 종적 연결만 보장되고 횡적 연결이 불가능한 철저한 점조직 방식이다. 생명을 내건 비합법운동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8]

지도자는 하부 운동자를 일일이 접촉했다. 지도자와 조직을 쉽게 노출시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각 개인은 두 사람씩만 만나는 방식을 택했다. 1기 최고 트로이카가 되는 이재유-안병춘-변홍대-이현상-최소복으로 예를 들면 이재유는 안병춘과 이현상과만 만나 협의하고 안병춘은 변홍대에, 이현상은 최소복에게 각기 전달하여 의견을 들은 다음 결정했다. 2기와 3기 운동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더욱 강화되어 만나는 사람의 이름이나 신원도 밝히지 않고 만남이 이루어졌다.[9]

최고 조직 아래에 각각의 하부 조직을 설정하고 다시 그 각각의 하부 조직 아래에 각기 조직들을 설정하는데 이들 각각의 조직을 트로이카라고 일컫는다.[10]

다시 쉽게 설명하면, 트로이카는 엄밀하게는 전체 조직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몇 명씩으로 구성된 각각의 단위를 일컫는 것이다. 최상부 트로이카 밑에 트로이카들이 있고 그 아래 트로이카들 밑에 또다른 트로이카들이 있다. 보안을 위해 위-아래 트로이카끼리만 연락할 수 있고 횡적 연결은 금지.

최상부 트로이카 밑에 트로이카들이 있고 그 트로이카들 밑에 다른 트로이카들이 있고... 이런 방식이고, 비밀결사답게 트로이카 간 횡적 연결은 없고 종적 연결만 있다고 한다.

2.2. 일정 지역 기초·산별 노조

이재유는 전국적이라기보다는 일정 지역(이재유의 경우에는 경성)을 기초로, 파업이나 맹휴 등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 조직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운동방침을 세웠다.

1. 모든 대중투쟁은 반전•반파쇼•반제 투쟁으로 전화하자!
2. 섹트와 파벌 청산은 대중의 실천투쟁의 가운데에서!
3. 당의 저수지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산업별 원칙으로!
4. 당재건은 대경영 세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재건에서!
5. 선전선동 조직 지도자인 전국적 정치신문을 창간하자!
이재유가 세운 5대 슬로건


노동운동은 산별로 조직한다는 것이 방침이었기 때문에 안병춘은 금속 부문을 이현상은 섬유 부문을 변홍대가 화학 부문을 분담하기로 했다.

2.3. 국제주의와 국내주의의 조화

이재유 그룹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이재유 그룹은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적절히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다.

3. 목표

경성트로이카의 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이재유가 당시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11] 복지 이론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이 시기 자본주의 병폐(대공황, 노동착취 등)를 비판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또 해외 독립운동은 식민지 조선 대중과는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독립운동 갈래 중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운동하는 거의 유일한 갈래였다. 활동가들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내세웠다.

① 일본 제국주의 타도
② 대토지 소유의 해소
③ 7시간 노동제의 확립
④ 모든 은행을 단일 국민은행으로 생산은 노동자 농민 통제로
경성트로이카의 슬로건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12].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13].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이관술과 이재유가 만든 《적기》의 슬로건[14]

4. 성과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학교의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경성에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일경은 파업 주동자와 동맹휴학 주모자를 체포했는데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이 중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으로 분류된 인원은 170명인데 실제로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이순금여직공.jpg
1935년 8월 24일 <조선일보> ‘동덕여교 졸업 후 여직공으로 잠신’
위 사진이 이순금으로 파업에서 굉장히 활약했다.
<rowcolor=#FFF>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파업
<rowcolor=#fff> 공장 일시 참여자 배후 활동가 결과
편창제사 1933.6.1 364명의 여공 이재유, 김형선 운동선의 양하석 패배
중앙상공회사(일명 별표고무) 1933.8.17 150명의 여공, 유종희, 권오상 이순금, 이현상, 이재유 승리(청부제도 부활)
소화제사 1933.8.22 249명의 여공, 유순희 이순금,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일부 승리(교부장 퇴직/이재유 그룹 소속이었던 유해길 해고)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회사 1933.8. 40명의 여공,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승리(임금인하 취소)
조선견직주식회사 1933.9.7 20명의 여공, 김복금, 이정숙, 이순금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승리(불명)
서울고무회사 1933.9.19 120명의 여공,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유순희, 이종희, 권오상 이순금,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패배(연속적 파업으로 감시가 강화된 탓에 수모자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등 6명과 권오상 검거)
종연방적회사 경성제사공장 1933.9.21 500명의 여공, 이병희, 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이현상, 변홍대, 남만희, 안승락(기금 모집) 패배(이종희, 이병희, 이효정, 변홍대, 허마리아, 권오상 등이 검거되어 이재유는 빈민촌 아지트에서 탈출해야 했으며 이듬해 1934.1 이재유가 검거되는 계기가 됨.)
용상공작소 영등포 공장 1933.9.21 100명의 직공, 안병춘, 안삼원, 이순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전 직공을 망라하는 대회를 개최하는 이례적인 성과가 있었다.(보통은 주모자가 검거되면 불가능.) 안병춘, 안심원 검거되어 영등포 운동 불가능해짐.
<rowcolor=#fff> 평가 1933년 부산의 고무 제네스트 등 수개월에 걸쳐 전국에서 연속적 파업이 일어났는데, 서로에게 영향받은 파업들이었다. 식민지 시기 전체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투쟁 사례.
<rowcolor=#FFF>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동맹휴업
<rowcolor=#fff> 학교 일시 재학 성원 배후 성원 결과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3.5. 김재선, 김영선 등 이경선, 최소복, 이재유, 변홍대, 이현상 승리(요구조건 승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교 1933.6. 최소복, 이현상, 변홍대 승리(요구조건 승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933.8.22 신진순, 김주원 등 이경선 실패
중앙고등보통학교 1933.11. 한동정 최소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실패(한동정 퇴학)
배제고등보통학교 1933.12. 변우식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실패(변우식 등 검거)
경성여자상업학교 1933.12 심계월, 이분성, 차소영, 박온 정태식, 최소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진정됨
파일:이관술동덕여고.jpg
왼쪽부터 이관술,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이다.

이후 탈출한 이재유는 이순금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을 만났다.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중략)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드러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는 이관술, 박영출과 2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경성재건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재건그룹에서는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은 노동운동 분야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인행, 이석면, 공성회 등 1기 경성트로이카에 관련된 인물과 접촉하는 책임은 이관술이 주로 맡았는데 그 결과 상당한 정도로 조직이 재건되었다. 이관술이 접촉해서 조직에 가입시키는 등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은 전체 조직원의 30%가 넘는 높은 비율이었다.[15]
파일:경성재건그룹지도부.png
일제 경찰이 그린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박영출과 박진홍을 포함한 주요 조직원이 체포되자 이재유와 이관술은 피신하여 위장 형제로 같이 살며 3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어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지속했다.
파일:이관술이재유아지트.png
이관술과 이재유가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5. 기관지 《적기》관련

5.1. 보안 수칙

《적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받으면 이전에 읽은 사람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모든 면을 쓸어 자기 지문만 찍어놓을 것, 읽은 후에는 반드시 소각하고 적기를 들고 타인을 방문하거나 배회, 산책하지 않도록 할 것.

5.2. 제작 방법

등사판은 석유상자의 옆판과 판유리를 재료로 만들었으며 소나무 가지를 둥글게 잘라 사포로 간 다음 그 위에 자전거 튜브를 말고 양동이의 손잡이를 양쪽에 붙여 롤러로 사용하였다. 또 축음기의 침을 아카시아 가지에 끼운 다음 판금으로 싸서 철필의 대용으로 하였다.[16]

6. 1937년 이관술 그룹 형성

파일:이재유체포.jpg
이재유 체포를 보도한 기사: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파일:이관술출현설.png
이관술 출현을 보도한 기사:
"이재유 사건의 거두 이관술 출현설"
"이재유 이상의 역할을 한 이관술이가 시내에 잠복한 것을 알게 되어 경찰부와 부내각서에서는 이 문제의 인물 이관술을 체포하고자 혈안 수사를 하는 중이다."

1936년 12월 25일에 이재유가 검거되고 이어서 김희성이 주도한 조직도 검거되어 경성의 양대 조직이 모두 와해되었다. 그 후 1937년에 이관술, 박진홍, 공성회, 김순진, 이순금, 안병춘, 김재선, 이성학, 남남덕, 조병목이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 그룹은 2년 후인 1939년에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는 단초를 제공한 조직이다.[17]

(이관술 혼자만 지하운동하는 수배자이고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합법 생활을 하면서 이면에서 운동을 모색하는 중이며, 비밀결사 특성상 같은 조직이라도 한데 모인 일은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봐야 아래가 이해된다. 그래서 박진홍 등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는 합법 생활 중이니까 자주 접촉에 성공하는 것이고, 이관술은 따로 행동하는 것이다.)
파일:박진홍.jpg
박진홍

1935년 1월 검거되어 1937년 5월 석방된 박진홍은 경찰 감시로 자유롭지 못한 와중에도 운동을 다시 하기 위해 공원회와 그의 동생 공성회, 김순진, 안병춘(안병춘은 경성트로이카 1기 최상부 트로이카. 이때는 딱히 수배자가 아니었고 합법 생활 중) 등과 만났다. 그런데 공원회는 이재유를 파벌이라고 진단하였으며, 안병춘은 이재유가 파벌일 뿐만 아니라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맞서 박진홍은 이재유를 옹호했다. 김경일 교수에 따르면 "그녀는 이 문제에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세 파악과 운동 방침의 수립을 위하여 그녀가 이관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18]

한편 일제가 혈안이 되어 쫓는 수배자로 지하운동 중인 이관술은 1937년 6월 영등포에서 공장노동자 조직에 착수하였다. 1937년 7월 1일 박진홍은 이관술의 연락을 가지고 왔다는 한 운동자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음날 그의 안내로 상도동 부근에서 시장에 가는 상인풍으로 변장한 이관술을 만났다. 두 사람은 번대방동, 신길동을 거쳐 시흥군의 신림리와 봉천리 사이를 원형으로 돌면서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박진홍은 이관술의 지도를 받으면서 "이재유의 의발을 이어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확대강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19]

1937년 7월 7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은 안병춘에게 이재유가 쓴 <자기비판문>과 운동자금을 주었다.[20] 그 뒤 이관술은 이순금과 여의도 경성비행장 부근에서 접촉했는데 이 만남이 경찰에 발각되었다.

경찰은 이관술을 놓친 보복으로 뚜렷한 '범죄행위'도 없는 이순금을 9개월동안이나 가두었다. 이 때문에 박진홍 또한 다시 경찰에 취조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관술과 공원회의 만남이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서 공원회가 안병춘과 연결되며 1937년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공원회와 안병춘은 이재유 그룹의 운동을 파벌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국제선과 연결된 정통 운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21]

체포되었던 박진홍은 9월 6일 기소중지로 석방되었다. 박진홍은 직후 9월 7일에 공원회를 방문했다. 박진홍은 공원회를 지도자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공원회는 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역량이 부족했다. 박진홍은 비합법 생활로 잠복할 것을 건의했지만 공원회가 만류했다. 그 후 박진홍은 인정식, 남남덕, 조병목 등 사람들과 제휴하며 운동을 모색하거나 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순금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37년 10월 13일 박진홍과 공원회는 삼청공원에서 만났다가, 일제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양성호와 마주쳤다. 둘은 위협을 느끼고 지하로 잠적하기로 했는데, 직후 박진홍과 이순금이 경찰에 연행되어서, 이 운동이 중단되었다.[22]

한편 이관술은 1937년 7월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반전반제적인 소그룹운동을 지도했다. 이관술은 1938년 이순금이 출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에서 접촉한 후 다시 대구로 갔다가, 1939년 1월 충주로 가서 김삼룡과 접촉한 뒤 경성으로 왔는데, 이때부터 유명한 경성콤그룹을 만든다.[23]

7. 경성콤그룹에 미친 영향

이관술과 이순금이 주도해서 경성트로이카 출신 활동가들을 모아 경성콤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등 경성트로이카 출신 활동가가 기반이었다. 이관술이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다. 경성콤그룹은 경성트로이카의 전통을 따라 즉각적인 당 재건보다 대중운동을 중시했다. 이관술김삼룡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있어 조선공산당 재건을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노동자를 중심에 둔 조직 확장에 무게를 두는 것에 동의했다. 그 결과 실제로 주력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었다.[24]

경성 콤그룹의 사다리식 조직체계는 이재유 그룹의 트로이카 방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출처: 최규진

8. 오해와 진실

8.1. 이재유-김삼룡-이현상이 최상부 트로이카다?(X)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에서 소설 부분도 아니고 머릿말에 "이재유와 함께 삼두마차를 이끌었던 이현상과 김삼룡이"라고 너무 당당하게 소설적 창작을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써놓아서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이 최상부 트로이카였다는 소설적 창작이 거의 정사처럼 받아들여진다. 안재성의 소설적 창작과 실제 역사적 사실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심지어 서대문형무소까지 안재성의 소설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보인다.

그러나 1기 경성트로이카 시기 실제 최상부 트로이카는 이재유-이현상-안병춘-변홍대-최소복이다. 경성재건그룹 시기 최상부 트로이카는 이재유-이관술-박영출, 경성준비그룹 시기 지도부는 이재유-이관술이다.

논문과 학술서를 살펴보자. 우선 박한용의 박사학위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136쪽을 보면 경성트로이카 시절은 이재유, 최소복, 남만희가 주요인물이고 경성재건그룹 시절은 이재유, 이관술, 박영출, 경성준비그룹 시절은 이재유, 이관술로 나온다. 여기서는 최상부 트로이카라기보단 반제동맹만을 볼 때 가장 활약했다는 뜻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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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의 박사학위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반제동맹연구> 136쪽에 나오는 반제동맹 관점에서 볼 때의 경성트로이카 주요인물.경성트로이카 시기에는 이재유, 최소복, 남만희, 경성재건그룹 시기에는 이재유, 이관술, 박영출, 경성준비그룹 시기에는 이재유, 이관술이 주요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경성트로이카 최고 권위자이자 안재성 소설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김경일의 학술서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을 보면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다섯 사람을 1기 최상부 트로이카로 수차례 쓴다. 반면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이 최상부 트로이카였다는 소리는 책을 탈탈 털어도 정말 한 문장도 나오지 않는다. 책 뒤 찾아보기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김삼룡은 61, 97, 98, 198, 209, 284, 286, 288, 300쪽에 나온다.

이리하여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의 다섯 사람에 의해 상부 트로이카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앞의 경찰 조사에서 경성트로이카가 1933년 7월에 결성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71쪽


경성트로이카의 최고 성원으로서 이재유와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의 다섯 사람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들 중 최소복을 제외한 네 사람이 노동운동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76쪽


김삼룡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은데, 이재유가 직접 김삼룡을 지도하지 않고 안병춘이 김삼룡을 지도했다.

이재유는 인천 지방에서 김삼룡 등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초기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나 자신이 직접 이를 지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 지역의 운동은 영등포 하위 트로이카를 담당하고 있었던 안병춘이 지도하였으며, 이재유는 안병춘을 통하여 때때로 그 진행상황을 보고받는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97쪽


김경일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에 나오는 조직도를 보면 상부 트로이카는 여러 차례 이름이 나오는데 김삼룡은 인천적노에만 나온다. 김삼룡은 인천적노 담당 중간 조직책이었다. 김삼룡이 유명해진 것은 이후 경성콤그룹과 조선공산당 활동, 결정적으로 남로당 총책으로 김삼룡 이주하 사건에서 잡혔기 때문이지 경성트로이카 때는 신인이었다.

안재성 본인도 <월간 좌파>에서 김삼룡이 실제로는 중간 조직책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다른 사회주의운동사 권위자인 최규진의 논문도 같다. 최규진도 김삼룡 이현상을 자세히 봐야 한다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경성트로이카 당시 지도부라서가 아니라 위에 언급했듯 경성콤그룹과 재건 조선공산당, 남로당 등 이후 사회주의운동에서 활약해서이다.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등이 처음으로 트로이카 운동 상부조직을 만들었다. 부문별로 보면 안병춘, 이현상, 변홍대가 노동운동을, 최소복은 학생운동을 맡고 이재유가 전체를 총괄했다.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144쪽


독립기념관에서 편찬한 논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 기반한 박시백의 만화 35년(만화)의 설명도 같다. 이 만화는 다른 대중서보다 훨씬 정확하다. 즉 안재성의 소설을 벗어나 논문 몇 편만 보면 이재유-김삼룡-이현상이 최상부 트로이카라는 소리는 안 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논문 한 편 안 보고 안재성의 소설만 그대로 받아쓰는 대중서들이 훨씬 더 많아 역사가 바뀔 지경인 것.

실제 1기 최상부 트로이카인 안병춘은 권영태 그룹과 교류 후 이재유를 파벌이자 영웅주의자로 공격한다. 안병춘은 일제 치하에서 두 차례 감옥살이를 하고 몸이 폐인이 되어 어머니의 헌신적인 간호로 살아나 결혼 후 일제 말기에는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전향서를 쓰고 일제가 알선한 공장에 다닌다. 저 시대에는 전향서는 정절을 지키기보다 감옥에서 나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별 거리낌없이 쓰는 것으로, 독립유공자 지정된 사람들도 많이 썼다. 일제가 공장을 알선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일제 말기 끝까지 투쟁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로 당대인들에게 유휴분자라는 비판은 받을 수 있어도 친일은 아니다. 안병춘은 해방 후 정판사 사건에 반발하는 시위를 해서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을 받는다. 석방 후 남로당 활동을 했다. 안병춘은 전쟁 발발 후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가족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늘 들고 다니던 소지품(가방)도 놔두고 떠난 것을 보면 월북이 아니고 전쟁 피해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가족들은 말한다. 안재성은 이렇게 쓴다.

한번도 기록에 남을 만한 지위나 직책을 맡지 못한 채 20여년을 혁명운동에 바쳐온, 전형적인 노동자 출신 운동가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26]


안병춘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김삼룡에게 빼앗기다니 불쌍하다. 김삼룡은 이후 남로당의 총책까지 오르지만 안병춘은 이게 끝인데.

김삼룡이관술과의 관계에서도 빼앗는 면이 있다. 이관술의 지도적 지위는 학계에서도 2004년쯤에야 밝혀졌다. 이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김삼룡이 이관술보다 높은 지위인 줄 알았고 논문도 그렇게 썼다. 빼앗은 것이 김삼룡 본의는 아니지만 이관술은 요직을 많이 양보했는데 이처럼 이관술처럼 양보하는 성격이면 실제 독립운동할 때는 지도적 지위였어도 역사에 남기가 불리하고 김삼룡처럼 남로당 총책 같은 요직을 잘 차지하면 이전 독립운동 업적까지 잘 평가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관술은 다른 최상부 지도부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트로이카'가 아니라 '당재건조직'에 속한 것이다. 이재유가 만든 조직론에서 '트로이카'는 정식 당 재건 조직을 만들기 전의 일종의 예비 조직이다. 반면 당재건조직은 정식 조직이다. 즉 이관술은 '최상부 트로이카'에 속했던 다수 지도자보다 핵심적 지도자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관술은 이재유에 못지않은 재건운동의 거두 취급받았는데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셋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틀린 소리가 퍼져서 이관술이 언급이 되지 않고 이관술보다 한 번도 높은 지위였던 적이 없는 김삼룡, 이현상만 언급된다. 이재유 체포 뒤 이관술이 박진홍, 이순금과 함께 이재유 그룹을 재결합하여 경성콤그룹의 전신이 되는 1937년 그룹을 만들었고 경성콤그룹 시기로 가면 이관술이 직책이 높아서 고문도 김삼룡, 이현상보다 훨씬 심하게 당하는데 가장 투쟁경력이 화려하면서 묻히는 이관술이 불쌍하다. 경성콤그룹 사건 피의자신문조서 이름은 아예 <이관술 외 15인 조서>인데 심지어 많은 인물 백과사전의 경성콤그룹 부분에서도 이관술 언급을 안 하니 이관술이 누명을 쓰고 얼마나 심하게 역사에서 지워졌는지 알 수 있다. 백과사전은 딱 경성콤그룹 문서와 이관술 본인 문서 정도에만 경성콤그룹 부분에 이관술 이름이 나온다. 나머지는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을 쓰는데, 경성콤그룹 사건 사료 이름이 <이관술 외 15인 조서>이고 이걸 봤으면 일제는 이관술을 가장 주목했고 이관술이 제일 심하게 고문당하고 고초를 겪은 걸 알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의문. 피고인명단 첫번째 이름도 이관술. 경성콤그룹 사건 이름은 '이관술 외 41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8.2. 경성트로이카는 세 명씩 짝을 짓는다?(X)

이름을 트로이카라고 지은 것은 세 마리 말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의미이지 셋씩 짝을 짓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당대에 공장에 노조나 비밀결사를 만들 때 한 세포를 3인조로 만드는 관습이 있었던 건 맞다. 일례로 1929년 국제선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의 김단야권오직에게 트로이카를 제안했는데 이건 진짜 3인조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건 이재유 그룹의 트로이카와는 달리 어떤 사상이 담긴 게 아니라 인원수가 3인조.

또한 다른 파벌인 서울상해파의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준비회'도 한 세포를 3인조로 만들었다. 파벌과 상관없이 당대 공산주의 비밀결사에서 한 세포를 3인조로 만드는 관습이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성트로이카에서 트로이카라는 이름은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의미이고 세포 만드는 방식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름과는 달리 숫자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에 분명 한 세포를 3인조로 만드는 관습이 있었고, 비밀결사 운영 특성상 한 세포 적정 인원이 3~5명 정도이다. 3명인 트로이카 자체는 많았다.

9. 관련 자료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으면 아래 논문 참고. 무료로 편하게 볼 수 있다.

학술서
대중서

10. 대중매체



[1] 김경일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을 보면 3기에는 최상부 트로이카라는 말을 쓰지 않고, p67에서 "의식수준이 높고 이론적 통일이 이루어졌던 이관술이 당재건조직에 속했던 것과는 달리 운동자로서 아직 한계가 있었던 서구원이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에 소속되어 이재유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즉 3기에는 당재건조직과 경성트로이카가 있는데 당재건조직은 이재유 이관술,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 서구원. 이외에도 변우식, 최호극 등이 핵심 활동가. 그런데 3기 경성트로이카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이재유와 변우식을 빼면 서구원을 포함해서 다들 전향한 뒤 운동을 이탈한다. 체포되지 않은 이관술이 이제 이재유가 없는 경성트로이카를 이끌게 된다.[2] 시위, 파업, 동맹휴학 등[3]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4]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5]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6]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7]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8]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9]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0] 출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1] 김경일의 이재유 연구와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에 나오는 문장 원문은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12]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13]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하다.[14]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15]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9쪽. 판결문에 따른 것으로, 관련자 30명 중 10여명이 이관술이 맡은 사람이었다.[16]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235[17]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8]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19]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20]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21] 1937년 그룹에서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이후 1939년 경성콤그룹도 국제선의 후신을 자처하게 된다.[22]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23]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24] 출처: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5] 참고로 이관술이 경성트로이카 참여 이전에 활동한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는 별개의 반제동맹이다. 그러니까 이관술은 경성반제동맹 와해 후 경성트로이카 소속으로 또다른 반제동맹을 만든 것.[26] 《이관술 1902-1950》240쪽에 나오는 안병춘 관련 기록으로 가족 증언을 취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얻었는지 참고 자료에 안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