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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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이후 |
1. 개요
1921년 1월 27일 서울에서 조직된 청년 정치단체. 1929년 해체됨.3.1 운동 이후 전국에 생겨난 수많은 정치단체 중 가장 큰 규모의 단체로 좌익 성향을 가졌다. 1920년대 일명 서울파라고 불리운 정파이다.
2. 정파의 배경
창립 초기는 민족주의적 경향을 가진 청년 단체였다. 그러나 1920년대 사회주의가 고조되면서 장덕수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계와 김사국·김한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계로 대립하였다. 그런데 1922년 가을부터 서울청년회는 이영(李英)·김사국·한신교(韓愼敎) 등에 의해 더욱 좌경화되었고, 강령을 ‘역사적 진화의 필연적인 신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돌진한다. 또 계급적 자각과 단결로써 무산대중 해방운동의 전위임을 기한다’라고 개정하였다.1923년 3월서울에서 94개 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최했으며, 또 전조선노농대회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사실상 가장 먼저 공산당을 만드는 시도를 한 단체이지만 코뮌테른과 연계가 약해 인정받지 못한다.
서울청년회는 1929년 8월 31일,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청년동맹에 합류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하였으나 실제로는 정파 갈등이 극심했고, 많은 멤버들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다. 대부분의 1920-30년대 청년 정치단체들이 그렇듯 오래 존속하는 것이 어려웠다.
3. 정파 갈등
1920년대 조선 청년들 사이에 공산주의 사상이 크게 주목받았으며, 관련된 단체들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각자 추구하는 사상적 차이, 투쟁에 대한 노선 차이에 따라 여러 파벌로 나뉘었는데 대표적으로 화요회(화요파), 북풍파, 서울파, ML파 등이 있었다.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 등이 세워졌고, 일본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북성회'가 만들어졌다.[1] 이런 단체들은 국내외 공산주의 운동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국외에 있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와도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서울파는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강조했기에 국외 파벌은 물론이고 국내 파벌들까지도 껄끄럽게 봤고, 국외파들이 국내정세에 어둡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1925년 화요회와 북풍파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협력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서울청년회(서울파)가 배제된 것에 불만을 표시한다.
4. 주요 인물
이득년, 김한, 김사국, 장덕수 등이 창립멤버이지만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이 더 중심적인 활동을 했다. 변절한 사람도 있다.- 김계향
- 박제영
- 남윤구
- 정관진
- 신백우
- 윤자영
- 장덕수 - 모스크바로부터 40만 루블의 자금을 지원받았을 때 장덕수가 횡령했다는 설이 있으며, 이후 친일파가 됨.
- 신표성
- 정백
- 김무정
- 한해(독립운동가)
- 권원하
- 도정호
- 박공근
- 박원희(독립운동가)
- 최팔용
- 장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