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373a3c><colbgcolor=#f5f5f5>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송언필 宋彦弼 | |
1935년 8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출생 | 1902년 4월 10일 |
황해도 해주시 | |
사망 | 1950년 7월 3일 (향년 48세) |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현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세이소쿠영어학교 중학강습과 (졸업) 와세다대학 (중퇴) |
직업 | 독립운동가, 언론인 |
경력 | 해주노총회 임시의장 해주청년회 간부 일월회 편집부 위원 《사상운동》발행인 권독사 대표 《대중신문》발기인 해주청년회 검사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기관지《현계단》책임편집위원 조선인민공화국[1]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 조선정판사 서무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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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방이 되자 한 분 밖에 없는 늙은 모친에게 이제는 징역 살 일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왜놈에게 해방된 지 1년도 못된 오늘날 또다시 허구 사실로 이곳에 서서 심리를 받는 이러한 신세가 된 것은 그 분함을 말할 바 없다.
송언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고문조작 사건 피해자이자 학살 피해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언론 활동과 합법적 청년운동을 하면서 이면에서는 비합법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했다.
2. 생애
2.1. 항일운동가로서
1902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 중학강습과를 졸업했다. 니혼대학 문과에서 2년간 수학하고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2년간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했다.출처1924년 2월 해주노총회 임시총회에서 의장이 되었다. 6월 해주청년회 간부가 되었다.출처
1925년 1월 도쿄에서 박낙종과 함께 일월회의 편집부 위원이 되어 기관지 <사상운동> 발행에 참여했다. <소부르주아사상과 무산계급사상>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11월에는 일월회 선전부 위원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 4월 박낙종과 함께 <대중신문> 발기인으로 참여했다.출처
박종린의 논문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일월회>에 따르면 서적, 팸플릿, 잡지를 취급하는 일월회 산하의 조직 '권독사'의 대표이자 편집인 및 발행인이 송언필이었다. 1926년 4월 출간된 권독사 팸플릿 7집의 편집인이 송언필이다. 다른 팸플릿은 모두 번역서였는데 송언필의 팸플릿만 예외였다.
1926년 중반 귀국하여 9월 해주청년회 주최 <국제청년대회 기념강연회> 연사로 선정되었다. 11월에는 해주청년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제3차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다. ML파에 속했다. 1927년 8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1월 고려공산청년회 노동 제2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출처
조선청년총동맹 등 공개적 청년운동을 하면서 이면에서는 조선공산당의 고려공산청년회라는 비합법운동을 한 것이다.
1928년 3월 고려공청 만주총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 발행되던 고려공청 일본총국 기관지 <현계단>의 책임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일본으로 갔다.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29년 1월 도쿄에서 체포되어 약 6개월간 도쿄 시내 10여개 경찰서를 전전하며 수사받은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치료받아야 했으며 예심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193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9개월을 선고받고 3월에 병보석을 중단하고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출처
광복 후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광수, 박낙종과 함께 근택빌딩을 구매한 후 조선정판사 서무과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입당 3개월 후 정판사 사건이 터졌다. 검사가 주장하던 위폐 인쇄 시기에는 송언필은 공산당원도 아니었다.
2.2. 정판사 사건에서
정판사(精版社) 서무과장으로 근무하다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출처정판사 사건 재판기록에서 보여지는 그는 굉장히 특이한 성격이다.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흰 수염을 기른 노인 모습이었다. 말투는 과격한 할아버지 말투이다. 그는 뼈 때리는 말도 많이 했지만.... 재판기록에서의 송언필을 보고 있자면 '뭐 저리 특이한 사람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관술은 온순하고 유순하게 말했고, 박낙종은 리더십있게 말하는데 송언필은 과격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송언필은 모르고 이관술만 알아서 송언필이 한 특이한 행동을 이관술의 행동이라고 한다.
이관술의 행동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 대부분이 실제로는 송언필의 행동이라고 보면 된다. 임성욱 박사 블로그에 재판기록이 있으니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문 흔적이 남았다고 주장하여 의사 검진을 받은 것은 실제로는 송언필이다. 이관술은 아예 검진을 받지도 않았다. 고문은 원래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문 기술인데, 정판사 사건에서 자행된 건 물고문이고 몇 개월 경과했는데 흔적이 남았을까, 더구나 저 때는 아직 인권 개념도 미약하고 고문 후유증과 PTSD에 대해 의사들도 잘 모르던 때인데 미군정의 압력이 있든 없든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말할 상황이었다. 이관술이 그랬다고 하는 출처가 출판서적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래 사진도 송언필 사진인데 출판서적에서도 이관술이라고 잘못 말하듯이.
2.3.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서
그는 원래 황해도 사람이고 유족이 대한민국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유족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관술과 같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이관술의 죽음을 진실규명할 때 같이 알려졌다. 의연하지는 못했다고. 하긴 독립운동하다 명예롭게 죽었다면 송언필도 의연하게 죽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추악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누명을 벗지도 못한 채로 죽는데 의연할 수가 있을까. 저 상황에서 의연했던 이관술의 정신력이 초월적인 것이고 송언필의 반응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제일 먼저 트럭에 실린 이들은 4사(倽)에 구금되어 있던 주요 정치범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서울에서 이감된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이관술 나와." 처형장으로 가는 길이라 짐작한 이관술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명령에 응했다. 조선정판사 서무과장이었던 송언필은 이때부터 정신줄을 놓았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실은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대덕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산내면 골령골로 향했다.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박만순, 골령골의 기억전쟁#
3. 관련 자료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박종린,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일월회
- 고지훈, 정판사사건 재심청구를 위한 석명서, 2008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 임성욱,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재검토 = 제1심 판결의 모순점을 중심으로
[1]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다른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