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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6:06:56

박낙종

<colcolor=#373a3c><colbgcolor=#f5f5f5>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낙종
朴洛鍾
파일:박낙종.png
1930년 9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출생 1899년 3월 3일
경상남도 곤양군 곤명면 금성동
(現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404번지)
사망 1950년 (향년 51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경성부 중동학교(현 중동고등학교)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 학사)
직업 독립운동가, 언론인
경력 일월회 기관지 《사상운동》 발행인 겸 편집인
인쇄소 동성사 설립자
《대중신문》발기인 및 대표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
조선정판사 사장
조선인민공화국[1] 중앙인민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1. 개요2. 생애3.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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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언론인. 고문조작 사건의 피해자, 학살 피해자.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일본에서 한국어 인쇄물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을 했다. 대중신문사 대표 자격으로 일경에 항의하고 3.1절 기념일에 뿌릴 격문을 인쇄하는 등. 대표직은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이다. 광복 후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투옥되어 목포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

2. 생애

1899년 3월 3일 경상남도 곤양군 곤명면 금성동(現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404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남 유림의 거두인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면우 곽종석은 칸트 서적을 섭렵하는 등 서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어린 제자들에게 신학문을 배울것과 신산업을 육성할것을 적극 권장하였다.[2] 같은 문하생으로 독립운동가 최익한, 독립운동가 강병창, 독립운동가 정희영 등이 있다. 금성리는 항일 독립운동가 17명을 배출했는데, 독립운동가 이우적(본명:이응규)도 같은 마을 출신이었다. 대부분 유림출신의 부유한 집안으로 학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 상경해 경성부 중동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뒤 1922년 일본으로 유학해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24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직후 구월회를 조직하고 북성회에 참여했다. 그해 11월에는 김세연, 신현성, 하필원 등과 함께 인쇄소를 차려 한국어로 잡지와 서적을 발행했다.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여 일월회의 기관지 <사상운동>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다. 당시 박낙종은 송언필, 안광천, 이여성 등과 함께 편집부 소속이었으며 김광수, 하필원 등은 서무부 소속이었다. 한국어 인쇄를 위해 도쿄에서 한국어 인쇄가 가능한 인쇄소 동성사(同聲社)를 설립했다.출처

1926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4월 일월회 기관지 <대중신문>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동성사를 통해 <대중신문>, <현계단> 등 정기간행물과 700여 종의 사회주의 출판물을 꾸준히 간행했다.출처

12월 안광천, 하필원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 재일조선인 대표로 출석했다. 3차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다. ML파에 속했다. 1927년 4월 조선공산당 일본부를 재조직하고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출처

11월에는 일본을 방문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 쿠라헤이를 대중신문사 대표의 자격으로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대표 김한경,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 조헌영, 동경자유법조단 후세 다쓰지와 함께 찾아가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에 대한 경찰의 고문에 항의했다.출처

1928년 2월 조선공산당에 대한 제3차 대검거가 시작될 즈음 3.1 운동 기념일에 뿌릴 격문 20만 장을 인쇄하여 조선에 우송하다 발각되어 3월에 최익한과 함께 검거되었다. 당시 거주지는 도쿄도 고이시카와구(小石川區) 조시가야(雑司が谷) 92번지. 193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그해 8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3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1934년 1월 만기 출옥했다.출처 고문 후유증으로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광복 후 김광수, 송언필과 함께 근택빌딩을 인수했다.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임되었다.
<colbgcolor=#000,#ddd><colcolor=#ddd,#000>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조선정판사(精版社) 사장이 되어 <해방일보> 등 각종 출판물을 간행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박헌영에 반대하는 ML파에 속했다.

5월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재판기록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성격도 좋아 보이고 특히 검사 김홍섭이 박낙종을 예수에 비유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인품이 훌륭했다. 인쇄를 통해 활약한 것도 특이하고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면 꽤 높은 직책인데 독립운동가로서는 알려지지 못하고 너무 추악한 누명만을 쓰고 있다.

목포형무소에 투옥 중 학살당한다. 그의 죽음은 대다수 자료에서 총살로 쓰나 그가 있던 목포형무소 학살 방식이 수장학살이었음을 고려하면 수장학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관술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후손은 한국에 없는 것인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신청하는 등의 진실규명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다음은 박갑동이 쓴 박낙종에 대한 글이다.

박낙종은 내 고향인 경남 산청군 출신의 대선배였다. 대학도 같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승과는 진주고보때 부터의 친구다. 우승은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의 전신)에 다니면서 경성제대 그룹의 지하조직에 참가하여 해방직전에 경찰에 체포된 일도 있다. 그의 결혼식은 동성상업학교 강당에서 그 학교 교장 장면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그의 장인 조윤제(국문학자ㆍ뒤에 서울대 교수)는 그때 동성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때 장면, 조윤제와 알게되었다. 해방 후 박우승은 전평(전국 노동조합 평의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낙종은 해방일보가 들어있는 정판사 사장이기 때문에 매일 만났다. 그는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박우승이 자기 아버지 박낙종에게서 온 편지를 나에게 보여준 일이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나의 심금을 울려 지금도 그 일부를 외고 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고? 여기가 해방된 나의 조국 조선인지? 지옥인지? 분간 못할때가 많다. 밤이되면 괴롭다. 바다 물새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니 과거 생각이 구름같이 솟아 오르고 앞날 생각을 하면 캄캄한 어둠 뿐이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 명이 10년 남았는지 20년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 나의 생명이 끊어져 나간단 말이냐? 우리 조선에는 하느님이 정말 없을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내가 요사이는 간혹 하느님 생각을 하게된다.

우승아! 우리집 우리나라 운명이 왜 이리되고 마느냐? 나의 희망은 이제 너 하나 밖에 없다(우승은 독자). 문례(며느리의 이름ㆍ조윤제의 딸)와 행복한 가정을 가꾸기 바란다. 내걱정은 하지 말아라!……』

밤에 바다 물새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박낙종도 10년 20년 뒤가 아니라 불과 4년 후에 교도소 내에서 죽고만다.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3. 관련 자료



[1]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다른 국가이다.[2] 면우 곽종석의 적통을 계승한 유학자가 임시정부 자금모집 사건인 유림단사건으로 투옥된 진주 수곡면 사곡리 독립운동가 회봉 하겸진이다. 회봉 하겸진의 사위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이다. 회봉 하겸진의 문인이자 같은 마을 일족인 하영진은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의 손위 처남이고, 지수면 승내리 GS그룹 창업자 허만정과 잦은 교류를 하였다. 하영진은 면우 곽종석이 주도한 파리장서 운동에 거금을 지원했고, 허만정과 함께 진주여고를 설립한 인물이다. 허만정은 백산상회를 키워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하영진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신지식인 하영근의 실제모델이라고 한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는 중앙고보시절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고, 신산업 육성을 위해 헌신했다. 하영진과 하동 옥종출신 독립운동가 하필원, 박낙종은 서로 절친한 같은지역 선후배들이었다.[3] 관련 자료의 출처: 박낙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