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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재클린 리 케네디 오나시스 Jacqueline Lee Kennedy Onassis[1] |
출생 | 1929년 7월 28일 |
미국 뉴욕 주 사우샘프턴 | |
사망 | 1994년 5월 19일 (향년 64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 |
배우자 | 존 F. 케네디 (1953년 결혼 / 1963년 사별) |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1968년 결혼 / 1975년 사별) | |
자녀 | 아라벨라, 캐롤라인, 존 주니어, 패트릭 |
아버지 | 존 버누 부비에 3세 |
어머니 | 자넷 리 부비에 |
학력 | 채핀 스쿨 미스 포터스 스쿨 바사 칼리지 그르노블 대학교 파리 대학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
신체 | 170cm, O형 |
서명 |
백악관 공식 초상화[2] |
[clearfix]
1. 개요
미국 제35대 대통령 배우자.우아한 기품과 풍부한 지식, 재치 있는 태도, 뛰어난 패션 스타일로[3] 당대 미국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인물. 존 F. 케네디는 당시 한창 호황이던 미국 사회에 어울리는 "젊은 대통령" 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재클린은 그러한 이미지에 결정적인 아이콘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재키'라고 부르며 엄청난 지지를 보냈는데 남편의 높은 지지율에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영상은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재클린을 다룬 짤막한 다큐이며 제목은 〈Jackie Kennedy: Queen of Camelot〉이다. 카멜롯은 아서 왕의 궁성인데 케네디 당시의 미국을 비유하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유래는 케네디의 암살 후 재클린이 <Life>와 한 인터뷰다.[4] 그녀가 "젊음"의 아이콘으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으면 한 번쯤 볼 만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배우자 중에선 나이가 2번째로 어린데 취임 당시 31세였다. 최연소는 22대/24대 미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아내인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취임 당시 21세)다. 참고로 재클린이 영부인으로 있는 동안 2명의 민주당 소속 대통령의 영부인이 사망했는데 1번째는 우드로 윌슨의 부인 엘렌 윌슨이고 2번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아내인 엘리너 루스벨트였다.
2. 생애
2.1. 어릴 적
1929년 7월 28일 뉴욕 사우샘프턴[5] 에서 잭 부비에와 자넷 노턴 리의 사이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아버지 잭은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던 증권브로커로 프랑스계 미국인이었고 어머니 자넷은 영국과 아일랜드 혈통이었다.
어릴 적 책읽기를 매우 좋아했고 미국의 부유한 집안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승마를 배웠는데 11살의 나이로 여러 번 전국 승마 대회에서 우승했을 만큼 수준급의 승마 실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녀의 명성은 자자해서 1940년 뉴욕 타임즈에 그녀에 관한 짤막한 글이 기고될 정도였다.
유치원을 졸업한 후 뉴욕의 사립학교 미스 채핀 스쿨에 입학했는데 그녀는 똑똑한 소녀였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으나 종종 장난을 많이 쳐서 교장실에 자주 불려가고는 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발레를 배우고 프랑스어 레슨을 받으며[6] 그녀는 교양 있는 소녀로 자라났다.
1940년 자넷 로턴 리는 잭 부비에와 이혼하고 2년이 지난 후 휴 오친클로스라는 부유한 증권 브로커이자 변호사와 재혼했는데 휴 오친클로스도 이혼한 상태였으며[7] 그에게는 이미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 의붓 남매인데도 후에 재클린은 그들 중 유샤 오친클로스와 매우 가까워졌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재클린 자매는 오친클로스네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넷 노턴 리와 휴 오친클로스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가 태어났다.
1947년에 코네티컷에 있는 미스 포터 스쿨이라는 명문 사립 기숙여학교에 들어갔다.
2.2. 결혼 이전
미스 포터 스쿨을 졸업한 그녀는 뉴욕 포킵시의 여대 바사 칼리지(Vassar College)[8]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2학년 때는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 유학했다.4학년 때 바사 칼리지에서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편입학한 그녀는 그곳에서 프랑스문학 학위를 받고 워싱턴 타임즈의 기자로 취직했다. 그녀의 직함은 정확히 말하자면 "inquiring photographer"이었는데 길거리에서 가던 사람들에게 재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사진을 찍어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신문에 기사로 싣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고 한다.
기자로 일하던 동안 그녀는 뉴욕에 사는 증권 브로커 존 G. W. 허스테드라는 사람과 만났는데 그녀의 친부와 의부 모두 증권 브로커였던지라 허스테드 가문과 그녀의 두 아버지는 모두 가까웠고 허스테드의 자매들도 모두 재클린과 함께 미스 포터 스쿨에 다녔다고 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1951년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1952년 파혼했다.
증권 브로커로 일하던 허스테드는 1년에 $17,000 정도 돈을 벌고 있었으나 재클린의 어머니 자넷은 허스테드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생각에 둘의 관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둘 사이가 깨진 결정적인 이유는 둘의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재클린은 그녀의 친구들에게 "허스테드는 너무 지루한 남자"라고 계속해서 불평했다고 한다.
허스테드와 사귀던 중 재클린은 1951년 여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간 저녁 연회에서 존 F. 케네디와 만났다. 케네디 쪽이 12살 연상으로, 당시 케네디는 한창 촉망받는 하원의원이었다. 그들은 이후에도 종종 같은 사교 클럽에서 만났으며 재클린이 허스테드와 파혼한 몇 달 뒤인 1953년 1월에 둘은 데이트를 시작하고 6월 케네디는 재클린에게 청혼했다. 이미 당시 케네디는 상원의원이 되어 있었다.
9월에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세인트 메리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피로연은 의부인 오친클로스의 별장 해머스미스 팜에서 열렸다. 현직 상원의원의 결혼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교황의 축전이 왔으며 6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웨딩 드레스는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디자인했으며 신혼 여행지는 지금도 휴양지로 유명한 멕시코의 아카풀코 데 후아레스다.
2.3. 케네디와의 결혼, 대통령 배우자 시절
그러나 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참전 용사였던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에서 고통받던 중 척추 수술을 받았고 재클린은 결혼 후에도 이어진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린 데다 유산을 한 번 겪고 1년 후에는 사산[9]까지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1년 뒤 그녀는 장녀 캐롤라인 케네디를 낳았다.[10] 남편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지 2주 후에는 장남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출산한다.재임 시절 대통령의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이 백악관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은 미국 국민들의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케네디는 이러한 남매의 인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데 반해 재클린은 아이들의 안전과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급적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남편의 재임 마지막 해이자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4달 전 차남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를 출산하지만 이틀만에 사망했다.
역사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재클린은 백악관 입성 후 복원 작업에 착수했는데 초기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백악관 복원 위원회를 설립, 성공시켰다.[11] 그녀는 각지에 흩어진 백악관 초기 유물과 가구들을 다시 찾아오는 한편 현재 백악관 앞뜰을 장식하고 있는 로즈 가든(Rose Garden)을 절친한 친구이자 원예가인 버니 멜론[12]에게 맡겨 단장했다.
재클린은 남편인 케네디 대통령의 순방길에 동행할 때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각국의 지도자들을 지적인 면모와 매력으로 매료시켰다.
남편이 당대의 섹시 여배우인 마릴린 먼로와 불륜을 저지르는 걸 알고 사이가 크게 악화되었다가 먼로가 사망하자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다.[13][14]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남편 존 F. 케네디가 텍사스 선거 유세 도중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5]
2.4.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의 재혼과 그 이후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후 재클린은 백악관을 나왔다.재클린은 케네디 사망 이전부터 자신의 친여동생인 리 라지윌(Lee Radziwill)의 내연남이자 동시에 마리아 칼라스의 동거남으로도 유명했던 당대의 갑부이자 선박왕이었던 그리스의 사업가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친분이 있었는데, 존 F. 케네디가 사망한 직후 내연 관계로 발전했다. 오나시스는 칼라스와 동거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직 미국 대통령의 처제였던 리 라지윌에게 접근해 사귀고 있었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죽자 오나시스는 내연녀 리지드윌의 친언니였던 재클린에게 접근했다.
마리아 칼라스 전기에 따르면 오나시스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마리아 칼라스가 갑자기 오나시스의 집에서 퇴거하여 별거하게 된 시기가 바로 케네디가 암살된지 불과 몇주 후였다.
물론 재클린과 오나시스의 관계는 1968년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관계하면서도 여전히 리지드윌, 마리아 칼라스와의 관계도 유지했다. 리지드윌, 마리아 칼라스 모두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재혼하기 직전까지도 결국 오나시스와 자기와 결혼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물론 재클린이 오나시스와 바로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때 재클린과 외도 관계였던 것으로 가장 유력시되는 것은 로버트 F. 케네디였는데 아서 슐레진저나 피에르 샐린저, 프랭클린 루스벨트 주니어, 고어 비달과 같은 RFK의 주변인들은 재키와 로버트 F. 케네디와 내연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둘은 5년간 연애했으며 진지한 관계까지 갔다고 한다.[16] 하지만 로버트가 사망하면서 이 관계도 끝났고 RFK가 사망한 지 4개월만에 오나시스와 결혼식을 올렸다.[17]
결국 1968년 재클린과 오나시스는 오나시스가 소유한 개인 섬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라지윌은 친언니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의절했다.
결혼 후 재클린과 자녀들은 오나시스 소유의 개인섬 스콜피오스와 뉴욕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오나시스의 저택 6개 중 3개가 뉴욕과 뉴욕 교외에 있었는데 재클린과 재클린의 자녀들을 위한 목적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오나시스는 뉴욕 외에 파리, 개인섬, 요트 3개의 자택을 추가로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혼한 지 몇 년 안 되어 오나시스와 재클린은 불화에 빠졌다. 오나시스는 재클린의 지나친 사치 때문에 화가 났다. 1971년경 둘은 심각한 불화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마리아 칼라스가 갑자기 뉴욕에 있는 세계적인 음악 학교인 줄리어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게 된다. 오나시스는 재클린보다 자신에게 충실했던 마리아 칼라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오나시스의 바람기로 재클린은 더 크게 화가 났고 둘의 갈등은 더 심각해졌다.
1972년경 오나시스는 마침내 재클린과 별거하고 파리에 있는 또다른 자택으로 거쳐를 옮겼다. 파리는 마리아 칼라스가 살던 곳이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이 별거하게 된 시기는 마리아 칼라스가 1972년 갑자기 줄리어드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중단으로 파리로 귀국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은 갈등으로 인해 이혼하려고 하였으나 그 와중인 1975년 오나시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나시스는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유산을 남겼지만 이혼을 준비 중이던 재클린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고 전 재산을 딸에게 상속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재클린을 소송을 걸었고 1억 2500만 달러를 받아냈다.[18]
오나시스 사후 재클린은 뉴욕으로 완전히 돌아와 사회에 진출해 출판 편집자로 일하면서[19] 뉴욕에서 저술 활동과 자선 사업을 했다.
이후 벨기에 출신의 유대인 보석상인 모리스 템펠스만(Maurice Tempelsman,1929 ~ )과 사귀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대신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함께 동거했다.
1986년 딸 캐럴라인이 결혼해 외손녀 둘과 외손자 하나를 봤다.
2.5. 사망
사망 1년 전인 1993년, 보스턴에 남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개관할 당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맨 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는 재클린(왼쪽에서 세번째).
1990년대 들어 암의 일종인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쓰러져 투병했고 1994년 5월 19일 템펠스만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 뉴욕의 세인트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TV로 생중계되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첫번째 남편 케네디와 일찍 잃은 자녀들인 아라벨라, 패트릭 곁에 안장되었다.
닉슨이 사망한 지 불과 한 달만에 사망했는데 닉슨은 4월에 죽었고 재클린은 5월에 죽었다.
3. 창작물
- 11/22/63: 스티븐 킹의 소설로 잠시 등장한다. 과거로 타임슬립해 케네디 암살을 막아내지만 개차반같은 대우만 받는 주인공에게 그나마 진심어린 감사 인사를 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 이가 변을 당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라며 울먹거렸다는 묘사가 있는데, 케네디가 변을 당해 죽은 실제 역사에선 얼마 안가 결국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혼해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트린 걸 생각하면 좀 묘해지는 대사다.
- 더 크라운: 시즌 2 8화에 등장한다. 남편과 함께 해외 순방으로 방문한 영국에서 산후우울증과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주사를 맞는데 이 주사에 취한 재클린이 엘리자베스 2세는 뒷방 늙은이 같다는 뒷담화를 까 여왕을 분노케 만든다. 배신감과 자극을 받은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과 관계가 꼬여있는 가나로 날아가 외교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공로를 세우고 후에 재클린은 다시 여왕을 알현하여 사과를 한다. 얼마 후 케네디가 암살당했다는 뉴스가 뜨고 엘리자베스 2세가 재클린에게 직접 애도의 편지를 쓰는 것으로 끝난다.
- 심슨 가족: 스프링필드의 시장 조 큄비의 아내 마사 큄비의 모델이기도 하다.
- 앤디 워홀 작품: 앤디 워홀이 전성기에 집중했던 세 여성 실존인물 중 하나다.[20]
- 재키: 2017년에 나탈리 포트먼이 주연을 맡은 영화가 개봉되었다. 백악관 소개 영상을 찍을 때를 시작으로 케네디가 총을 맞아 암살당했을 때, 장례를 치르고 그 때의 기억을 기자와 신부에게 회고하는 형식으로 된 시대극 영화로, 케네디의 죽음 및 장례 당시 그녀의 심정이 공적인 면(기자와의 인터뷰) 및 사적인 면(신부에게의 고백) 양측에서 잘 드러나 있다.
4. 여담
- 미간이 넓은 편인데 반대로 남편은 미간이 좁은 편이라 유전자 중화하려고 만난 거냐는 드립이 있다.
- 사립학교 미스 채핀 스쿨에 다닐 때 미드 아틀란틱(중부 대서양 영어 발음) 발음법을 익혀 평생 동안 구사했다.
5. 관련 문서
[1] 출생명 재클린 리 부비에(Jacqueline Lee Bouvier). 결혼 전 성이 부비에이며 리는 친어머니 이름인 자넷 노턴 리, 케네디는 첫 번째 남편 이름인 존 F. 케네디, 오나시스는 두 번째 남편 이름인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에서 비롯되었다.[2] 미국의 화가 아론 쉬클러(Aaron Abraham Shikler, 1922년 3월 18일 - 2015년 11월 12일)가 그렸다. 남편이자 미국 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초상화도 그의 작품이다.[3] 가장 유명한 시그니처 스타일로 남편인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입었던 핑크 수트인 일명 'Pink Chanel Suit' 가 대표적인 패션 아이템이다. 구글에서도 검색하면 가장 먼저 재클린 케네디의 이미지가 먼저 뜬다.#[4] "Don't let it be forgot, that once there was a spot, for one brief shining moment, that was known as Camelot" were Kennedy's favorite in the score, adding that "there'll be great Presidents again, but there'll never be another Camelot again… It will never be that way again."[5] 뉴욕 주 롱아일랜드 지역의 서포크(Suffolk)군 최동단에 위치한 지역. 상류층 밀집 거주지로 유명하다.[6] 재클린의 어머니는 딸들의 프랑스어 교육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재클린과 그녀의 여동생은 프랑스어밖에 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7] 오친클로스의 전처 중 한 명이 작가 고어 비달의 모친 니나 고어였다. 따라서 재클린과 고어 비달은 같은 의부를 둔 사이로,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8] 1969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다.[9] 딸이었고 아라벨라라는 이름을 붙여주려고 했다.[10] 21세기에 존 케네디와 재클린의 아이들 중 살아 있는 유일한 아이인 만큼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꽤나 막강하다.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의 선거 유세에 참여하여 매우 주목받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곧 케네디 가문의 정치적 움직임이었으니. 캐럴라인은 매우 사랑받았고 그녀가 조랑말을 타고 있는 사진이 실린 기사를 본 유명한 가수 닐 다이아몬드가 "스윗 캐럴라인"이라는 노래를 작곡한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캐롤라인은 2013년~2017년 동안 주일미국대사를 역임해 대표적인 미국의 대표적인 지일, 친일 인사로 꼽히고 있다.[11] 재클린 본인이 직접 출연해 복원된 백악관을 가이드하는 모습을 담은 '케네디 여사와 함께하는 백악관 투어' 라는 특별 방송영상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백악관 안내책자를 발간해 방문객들에게 판매한 수익으로 경비를 충당하여 국민의 세금 부담을 절약하는 수완도 보였다.[12] 뉴욕 멜론 은행, 카네기 멜런 대학교의 창설에 관여한 금융재벌 멜론 가의 며느리이자 리스테린 제조사의 상속녀.[13] 이 때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의 이혼 때문에 약물과 음주를 하여 정신이 악화되어 있었고 케네디에게 작별 인사를 듣게 된 이후에는 백악관에 직접 전화를 걸어 로버트 F. 케네디에게 주의를 들었고, 재클린에게는 전화로 '존과 나는 연인사이다', '백악관 영부인은 내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케네디에 대한 집착이 심했었다.[14] 참고로 마릴린 먼로의 사망에는 케네디나 재클린이 연루되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15]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본인의 눈앞에서 헤드샷을 당해 암살당했다.[16] 상무부 직원인 케네스 맥나이트(Kenneth McKnight)는 1966년 7월 RFK와 늦은 저녁 회의를 위해 도착했을때 재클린이 로버트 케네디의 무릎위에 앉아 팔을 그의 목에 감고 있었다고 말했다.#[17] 그러나 확인된 것은 아니며 일부는 둘의 관계가 형수와 서방님보다는 더 가까웠지만 그 이상까지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8] 파리 현지에서 언젠가 오나시스와 결혼할 것이라는 희망을 놓치 않으며 오나시스의 병수발을 했던 마리아 칼라스 역시 당연히 한푼도 물려받지 못했다.[19] 이 때 마이클 잭슨의 자서전 '문워크'의 편집을 맡았다.[20] 나머지 둘은 마릴린 먼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