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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초대 국왕 압둘라 빈 알 후세인 عبد الله الأول بن الحسين | Abdullah bin Al-Hussein | |
<colbgcolor=#ce1126><colcolor=#fff> 이름 | 압둘라 빈 알 후세인 (عبد الله الأول بن الحسين) |
출생 | 1882년 2월 2일 |
오스만 제국 메카 | |
사망 | 1951년 7월 20일 (향년 69세) |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 |
재위 기간 | 1921년 4월 1일 ~ 1951년 7월 20일 |
대관식 | 1921년 4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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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스요르단의 초대 에미르 겸 요르단의 초대 국왕. 요르단 국내에선 "건국왕"으로도 알려져 있다.아랍 대봉기를 지휘한 샤리프 후세인의 차남으로, 동생 파이살 1세와 같이 오스만 제국에 항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하심 가문의 수장 샤리프 후세인의 차남으로, 아버지 샤리프를 도와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랍 반란에 가담했다.그 대가로 1921년 영국군은 샤리프 후세인과 협상하여 그의 아들들에게 헤자즈 왕국과 이라크 왕국을 나누어주면서 요르단강 동쪽 지역에 차남 압둘라 1세를 군주[1]로 하는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성립되었다. 트란스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국방권과 외교권은 여전히 영국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1922년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승인하고, 이에 따라 요르단강의 서쪽 지역은 영국의 직할구로서 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 되었다. 반면에 요르단강의 동쪽 지역은 하심 가문이 이끄는 토후국(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 되었다. 1928년 2월에는 토후국에서 트란스요르단 왕국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트란스요르단은 1946년 5월 2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요르단이 되었고, 트란스요르단의 군주였던 압둘라 1세가 요르단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범위는 공식적으로 요르단강의 서쪽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영국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고 동시에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요르단강을 경계로 팔레스타인과 접한 요르단 역시 아랍 연합군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전했는데 당시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1세는 전쟁에 참전한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속셈이 달랐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독립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국의 일부로 합병하려는 계획을 꾸민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요르단은 재빠르게 팔레스타인에서 제일 중요한 성지인 동예루살렘과 아랍 국가에 배정될 예정이었던 라말라, 헤브론, 나블루스, 베들레헴과 예리코 등을 확보했고, 승전국이 된 이스라엘 역시 요르단과 휴전을 맺으면서 요르단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을 묵인했다. 비록 원하던 팔레스타인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요르단은 숨겨진 승리자가 되었고 이후 요르단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일명 요르단강 서안 지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차지한 요르단은 이 지역을 자국의 일부로 합병하는 절차를 시작했는데, 아직 전시이던 1948년 12월에 압둘라 1세는 예리코에서 팔레스타인인 명사들을 접견하였고, 그들로부터 팔레스타인 통제권을 인정받았다. 그 이후엔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자국 행정구역을 설치함과 동시에 주지사들을 파견했고, 1949년엔 요르단강 양안의 통일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그때까지 트란스요르단이었던 국명을 요르단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50년 요르단은 정식으로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요르단에 살던 팔레스타인인 모두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주었다. 요르단을 다스리는 하심 가문은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자 메카와 메디나를 비롯해 헤자즈 지역을 대대로 다스려 왔으나 네지드의 사우드 왕조에게 패해 헤자즈를 빼앗기고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망쳐 왔다. 비록 이슬람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차지한 '두 성지의 수호자' 자리는 사우드 가문에게 빼앗겼으나 그에 버금가는 성지인 '예루살렘의 지배자' 칭호 정도면 압둘라 1세에게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보상이었다. 요르단의 일방적인 서안지구 합병은 국제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인정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 정도밖에 없었다. 아랍 국가들은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요르단이 임시로 지배하는 조건으로 이를 묵인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바로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민권을 주다 보니 요르단에서 요르단인이 소수민족이 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요르단은 요르단계 국민이 요르단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핍박을 피해 요르단강 동안으로 피난 온 팔레스타인인이 인구의 삼할, 거기에 새로이 합병한 서안 지구에 살던 팔레스타인인이 또 삼할을 차지하게 되다 보니 발생한 기현상이었다. 이에 압둘라 1세는 팔레스타인계에 의회 의석의 절반을 배정해 주는 등 임시방편을 마련했고, 민족 문제는 한동안 잠잠한 상태로 남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계가 요르단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 이 기형적인 인구구조는 곧 팔레스타인계가 요르단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결국 양 민족 간의 긴장은 1951년 7월 20일, 동년 7월 17일에 시리아 사회민족당 소속 과격파에게 암살당한 리아드 베이 알 솔(رياض الصلح) 레바논 전 총리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고자 예루살렘에 방문해 금요예배에 참석하던 도중 알아크사 성전 계단에서 21세의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 무스타파 아슈가 쏜 총 3발에 머리와 가슴에 피격당하면서 극대화되었다.
암살범은 현장에서 국왕의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지만, 치명상을 입은 압둘라 1세는 그 자리에서 승하하였다.
현장에는 손자인 후세인 1세도 같이 있었으나, 천만다행히도 할아버지가 선물로 매달아준 훈장 덕분에 기적적으로 생존하였다.
[1] أمير, 아미르, 토후국의 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