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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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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일반적으로 시아파와는 별개의 종파로 분류되는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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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파란색 넥타이를 맨 남자는 2000년~2024년 시리아 대통령을 역임한 바샤르 알아사드이다.

1. 개요2. 역사3. 시리아에서의 위치4. 교리5. 참고자료 및 주의 사항
5.1. 참고 문헌 목록

1. 개요

아랍어: علوية (Alawīyah) / نصيرية (Nuṣayrīyah)[1]
영어: Alawites / Alawis / Nusayris

시리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이슬람 분파 중 하나. 시아파 12이맘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의 사후 그의 측근이던 아부슈아이브 무함마드 이븐누사이르 안누마이리(أبو شعيب محمد بن نصير النميري, Abū Shuʿayb Muḥammad ibn Nuṣayr al-Numayri), 일명 이븐누사이르(ابن نصير, Ibn Nuṣayr)가 후계자를 자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혈통 계승만을 인정하던 12이맘파는 그를 파문하였고 따라서 이븐누사이르는 사실상 알라위파의 창시자다. 수니파 근본주의자 등 알라위파를 경멸하는 다른 무슬림들에게서 '누사이르파'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을 무슬림으로 보지 않고 창시자인 이븐누사이르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 있다. 시리아 해안 외에도 그와 인접한 튀르키예하타이[2] 지방(약 15-20만)과 레바논 북부(약 4만), 골란 고원의 가자르(약 4천) 등지에 분포한다.

2. 역사

알라위는 주류 시아파에서 분파하여 이븐누사이르에게서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천년 넘게 동부 지중해의 소수종파였고 기독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이슬람 사변철학, 시아파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복잡다단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차별과 탄압, 빈곤에 수백년 넘게 시달리는 와중에 교리 상당수가 실전되었는데 이미 13세기에 주류 이슬람에서 불신자나 다름없는 이단 취급받는 신세였다.

심지어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였으나 나중에는 이들이 수니파 무슬림들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들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포섭하여 투르코폴로 써먹었다고 한다. 이후 몽골 제국이 레반트 일대를 침략하자 알라위파들은 몽골군을 환영하고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안누사이리야’로, 카르마트파나 바티니야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더한 불신자들이다. 아니, 이들은 대다수의 무슈리킨(mushrikīn, 성서의 백성들이 아닌 다신론자들)보다도 더한 불신자들이며, 이들이 무함마드(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그분에게 깃들기를)의 공동체에 끼친 해악은 무슬림과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이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크다. (중략) 이들은 무지한 무슬림들의 앞에서 자신들이 아흘룰 바이트(Ahl al Bayt, 예언자의 가문 사람들, 즉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의 자손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언자도 믿지 않으며, 성서도, 하나님의 명령도, 금기도, 보상도, 벌도, 천국도, 지옥불도 믿지 않는다. (중략) 대신 이들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남긴 말을 무슬림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바 그대로 가져다 듣는다. 또한 그 말들을 마음대로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그들의 해석이 ‘숨겨진 지식(ilm al-bātin)’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이들의 거짓됨에는 끝이 없다. (중략) 이들의 목적은 이슬람 신앙과 법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부인하는 것이며, 그 문제들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자 한다.
이븐 타이미야

당대 순니파 유명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Ibn Taymīya, ابن تيمية)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알라위 공동체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지하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흡족해 할 것"이라는 파트와(فتوى: 교령)를 발표할 정도였는데 왜냐하면 알라위의 초기 교리는 인간이 사후에 영혼도 같이 죽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리가 실전, 변형되면서 오늘날의 알라위들은 인간이 죽고 나면 영혼이 죽지 않고 환생한다고 믿는다.

당시 이븐 타이미야는 레바논 산악 지대의 알라위파 토벌 작전에서는 맘루크 정권과 의견을 같이 하여 두어차례 직접 참전하였으며 그 결과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박해를 피해 순니파 대신 비교적 교리가 비슷한 쉬아 12이맘파로 개종했다. 이러한 연유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분석한 서적 중 시리아 친알라위파 입장에서 쓰인 책들은 이븐 타이미야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편이다.

맘루크 왕조는 알라위파 무슬림들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몽골군 편을 든 일을 징벌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박해했다. 맘루크들은 무자비한 군인들이었고 수니파로 개종을 거부하는 알라위파들은 몰살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알라위파들은 체포되어 투옥당하거나 공개 광장에서 채찍형이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후의 오스만 제국은 비록 직접적 탄압은 없었지만 소수에 불과한 데다 이단 취급받고 힘도 없었던 알라위파를 대놓고 무시했다. 비슷하게 이단 취급받던 드루즈는 적어도 레바논 일대에서 대대로 제후를 배출해서 지배계층이었던 것을 비교해 볼 때 처지가 열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까지도 알라위파 신자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10만 명 정도로 소수인 데다 대부분 경제력이 없는 농노들이었고 수니파 지주들에게 대놓고 착취와 탄압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생활도 낙후되고 열악해져서 다마스쿠스에는 1907년에 전기가 보급되었는데도 시골의 알라위파 거주지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군에 강제징집되어 군복무를 하는 알라위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진급차별을 받았다. 나아가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알라위파들을 사실상 총알받이로 쓰려는 목적으로 무장도 빈약하게 시키고 죽어가게끔 최전방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교육수준도 열악해서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자기 고향에서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정도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식이후 멸망한 오스만 제국 대신 프랑스가 시리아에 들어왔다.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이교도 취급하던 수니파 주류 이슬람과 달리 알라위파 역시 종파만 다른 무슬림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알라위파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프랑스 위임통치령(1941년까지)으로 보호받는 알라위파 자치령을 할당해 주었다.

이를 이용해 수니파의 오랜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난 알라위파는 이어 프랑스의 도움으로 얻은 일자리로 경제력을 획득해 서서히 수니파들의 농노신세에서 해방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프랑스군에 출세를 위하여 대규모로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주류 수니파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붙어먹는다며 이를 박박 갈았으나 위의 역사를 쭉 읽어내려왔다면 알겠지만 알라위파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보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수니파가 훨씬 더 미운 존재였다.[3]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알라위파도 서구화되기 시작했는데 서구적인 사상들과 군인 출신 알라위파들에게서 온 군사적 전통이 알라위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했고 군대를 통해서 프랑스 통치 이후에도 도태되지 않고 시리아 내 '군부의 실세'라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에 필수적인 존재로 급부상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60년대에는 시리아의 장교단 대부분이 알라위파였을 정도였다.

프랑스 통치 시기 고등판무관이었던 앙리 드 주베넬(Henri de Jouvenel, 1925-1927 재직)은 당시의 한 알라위 정치 지도자가 “알라위파는 과거 3-400년 동안보다 3-4년 안에 훨씬 더 많이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대로 우리를 그대로 놔둬달라”는 말을 했다고 남길 정도였다.

한편 1953년까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의회에 지정 의석이 있었으나 이후 종파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슬람교도-기독교도로만 인구조사 카테고리를 나누면서 사라졌다.

아울러 1970년에 군부 출신이자 알라위파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잡은 이래 알라위파는 드디어 시리아의 기득권층이 되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꿈도 못꾸던 대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알라위파 정권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로 2024년까지 권좌가 이어졌다.

동시에 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알라위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며 수니파 원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세력의 테러, 반란 시도에 시달렸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 내 지역감정[4]과 알라위라는 이교도 정권에 침탈된 시리아를 다시 수니파에게 되돌리자는 모토로 계속 반란과 요인 알라위파, 친 알라위 수니파에 대한 암살, 테러를 시도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는 이런 테러와 봉기 시도에 하마 학살 같은 강경책으로 대처했으며 동시에 1974년부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로부터 알라위파가 시아파의 일원이라는 해석을 받아내었고 반시오니즘 이데올로기로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국민들을 단결시켰다. 한편으로는 수니파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수니파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급적 자제하고 정부요인 할당에 친정부 성향의 수니파를 대거 기용하며 수니파와 통혼하고 수니파식 예배를 하는 등의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기독교드루즈 등 다른 시리아 내 소수종파에게도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힘을 합치자며 손을 내밀어 이들을 존중해주고 공존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집트에서는 콥트교 신도를 일부러 병역에서 배제시켜 따돌림을 조장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속주의와 결합한 우민화 정책으로 안정적인 독재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리아의 다종교 공존을 꾀했다.

현재의 시리아 내전의 양상이 매우 복잡하고 알라위파와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 정권과 정부군의 편에 서서 죽기살기로 반군과 맞서 싸우는 상황도 이러한 특수한 알라위파의 환경에서 기인한다.

지금은 수백 년 알라위 역사에서 처음이자 내전에서 패배한다면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은 리즈 시절이고 권좌에서 축출되면 수니파의 매우 잔인한 보복으로 인해 아사드 정권만이 아니라 수백만 알라위파들의 역사 자체가 끝장을 맞게 된다. # 2011년에 시위할 때만 해도 시리아에 이런 지옥문이 열릴 줄 몰랐겠지 시리아 내전이 그토록 처절하고 잔혹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015년 4월에 이미 징집 연령인 알라위파 청년 25만명 중 ⅓이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알라위파를 모두 죽이려고 드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나 점령지에서 알라위파를 학살한 혐의가 있는 알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들, 이 극단주의자들의 만행들을 제대로 통제조차 못 하는 무능한 자유 시리아군은 알라위파 입장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알라위파의 기준으로는 내전과 아사드 정권의 위기는 그들 시각에서 보면 사실상 인류를 노예화하려는 외계인의 침공 급으로 절박한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알라위파가 옹호하는 아사드 정권의 독재와 알라위파들이 적대세력에 행한 전쟁범죄는 비판해야 하지만.

3. 시리아에서의 위치

전 세계적으로 신도가 고작 460만 명밖에 없다. 시리아에는 그나마 과반이 넘는 3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특히 해안지대인 타르투스, 라타키아 지방에 옛날부터 많이 살고 있으며 튀르키예와 인접한 시리아 서북단 해안지역에도 알라위파가 살았다. 오늘날에는 시리아 내전에 의한 피난의 여파로 튀르키예에도 100만 명 가까이 거주하며 레바논에는 적어도 10만 명 남짓 알라위파가 거주한다.

시리아 인구 2300만에서 겨우 12% 남짓이라 사실상 소수민족이고 시리아 인구의 대다수인 수니파(시리아 인구의 3/4)가 나라 뒤집어 버릴 게 뻔한지라 무조건적으로 알라위파만 우대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시리아도 당장 리비아 꼴이 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독재자하페즈 알 아사드-바샤르 알 아사드와 그의 친가, 그리고 타이거 대령이 이 종파 신도다.

역사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시리아에서는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강하며 시리아 군부의 상층부들은 모두 이 알라위파를 믿고 있다. 물론 식민지군 고위 장교들은 친프랑스 수니파 명문가문 출신들이었지만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군을 수월하게 장악해나갔고 결정적으로 잦은 쿠데타로 수니파 고위 장교들이 서로 팀킬하면서 최종적으로 1970년 알라위파 소속의 하페즈 알아사드의 군사 쿠데타로 결국 알라위파가 군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시리아에서는 알라위파를 믿지 않으면 군부에서 승진하기 어렵고 심지어 알라위파를 믿는 하급장교가 믿지 않는 고급장교를 지도할 정도라고 한다.

이 때문에# 내전 종결 후 시리아가 분할될 가능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사드의 기민함과 국제역학적으로 시리아 정부군이 승기를 굳혔지만 내전 종결 후에 온전히 시리아 정부의 전력만으로 시리아 전역을 통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시리아 정부 측의 주축인 알라위파는 안 그래도 소수이고 역사상 처음으로 기득권을 누렸는데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내전 이전보다 시리아 통제가 어려워짐은 기정사실이라 전후 또 다른 내전으로 번질 위험도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 모두 내전 발발과 그로 인한 대규모 난민 사태를 원치 않으므로 알라위파 및 소수 종파는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시리아 해안 및 서부로, 수니파는 시리아 동부로 분할하여 이주시킨다는 시나리오도 있었는데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아사드 정권은 항의할지도 모르지만 알라위파는 이미 수가 크게 줄었고 또 내전이 일어나면 알라위파가 소멸할 수도 있었다.

수니파뿐만 아니라 시리아 북부 쿠르드 로자바 연방도 지금은 시리아 정부 말을 따르고 있지만 수틀리면 알라위파의 영향력이 줄어든 만큼 언제든지 독립하겠다고 설칠 수도 있었기에 알라위파 및 소수종파, 쿠르드가 주류 수니파와의 내전 수습을 위해서는 수니파와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계획이 있었다. 이는 아사드 정부의 패색이 짙었던 2014~15년에 미국에서 심각하게 고려했던 방안이지만 2016년 이후 시리아 정부가 러시아의 대규모 지원을 업고 소모전 양상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알라위파의 영향력이 오히려 더 커진 만큼 사실상 폐기된 아이디어다.

2018~19년에는 시리아 정부가 사실상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들이 점거한 이들리브와 아프린, 알 바브, 자라블루스, 다비크, 탈 아비야드 등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지역과 쿠르드족 주도의 로자바 세력들이 점거한 유프라테스 강 이동 북동부 지역들을 제외한 시리아 전토들을 모두 수복하는 데 성공하면서 알라위파가 전멸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사실상 기우가 되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시리아 정부는 이란이나 중국보다 더 믿을 만한 대상이라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반면 미국을 위시한 서방에서는 알라위파 친러 정권이 망해 봤자 제대로 된 친서방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기는커녕 정국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회의주의가 만연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같은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은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어 난민이 많이 발생할수록 이슬람 선교에 도움이 된다며(...)[5] 입으로만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비난할 뿐 예멘 내전에 개입해서 난민사태를 심화시키는 것 외에는 별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시리아인들이 난민 신세가 되어 탈출하는 와중에도 오히려 알라위파는 인구 수가 늘어 아사드 정권의 수혜를 톡톡히 보는 것 같다. 덩달아 수니파 무슬림들이 시리아에서 대거 탈출하는 바람에 전체 인구 비율에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탄압받던 과거를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일이다.

2024년 시리아 반군 공세로 12월 8일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가 무너졌다. 2대 54년 간 시리아를 통치한 알아사드 정권이 붕괴되면서, 그간 알라위파가 가지고 있던 정치권력이 상실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4. 교리

설명글

알라위 교리의 내용은 대부분 실전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고대 기독교 영지주의 신도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기독교처럼 신의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한다. 신이 나뉠 수 없다고 믿는 무슬림들에게는 그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인 셈이다. 이러한 배경이나 교리 때문에 시리아 정교회와 꽤 친한 편이라고 한다. 이슬람 수니파는 지금도 알라위파를 이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시아파도 원래는 인정하지 않았다가 1974년에야 정치적인 이유로 이슬람의 일부로 인정했다. 오늘날 시아파 12이맘파 신학의 대부로 불리는 아부 자파르[6]도 이들을 무슬림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단도 아닌 이교도라는 파트와를 발표한 바 있었다.

오늘날의 이스마일파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5주(五柱: 신앙 고백, 예배, 희사, 단식, 성지순례)가 꽤 완화되어 있는 종파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마찰이 많지 않은 편으로, 시리아의 경우 알라위파 정권의 아랍 민족주의 정책 기조로 기독교인(안티오크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신도들)과 무슬림들이 별다른 마찰 없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문서로 쓰여있는 경전이 전부 소실되어 현재는 없으며 모든 교리는 늙은 장로가 후계자로 정한 사람에게 말로 전해준다고 한다. 사실상 알라위 신도들조차도 알라위 교리를 명쾌하게 모르고 헷갈려한다고 한다.

알라위파의 초창기 교리는 자흐미야파[7] 사변 철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중세 초 알라위파의 원래 교리를 알기 위해서는 알레포 남쪽 교외 지역에서 태어난 아랍 시인 아불 알라 알 마알리의 시를 분석하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8][9]

알 마알리는 확고한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이 사후 부활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우리는 슬피 울어야 하며 통곡해야 한다.
유리처럼 산산조각 난 자가 나중에
어찌 부활할 수 있단 말이냐!

알 마알리는 인간의 생식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전 인류의 멸망을 인류를 위한 최상의 희망이라는 견해도 가졌는데 현생을 혐오하며 “존재의 무”로 돌아가는 길만이 최상의 행복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과오는 나의 아버지에 의해 나에게 행해진 것이며
내가 다른 이에게 저지른 것이 아니다

알 마알리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으나 이신론자였고 기독교와 유대교,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도 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거짓으로 온 세상이 더럽혀져
종파들은 입씨름하며 상대방의 교리를 비난한다
만일 증오심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면
교회와 모스크는 서로 나란히 세워졌을 것이다.

2013년 알누스라 전선의 지하디스트들은 알 마알리가 오늘날 알라위파들과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동상을 참수하였다.

현재 알라위파들은 크리스마스, 공현절,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을 기념하고 기독교식 이름(first name)을 가지는 등 기독교의 영향이 강하다. 원래 그들은 자신들이 별이거나 신성한 빛이었지만 불복종으로 인해 천국[10]으로 돌아갈 때까지 반복된 환생을 겪어야 한다는 윤회설을 믿는데 지상에서의 행위가 어땠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서 지상에서의 환생 결과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이들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드리지도 않고, 라마단 기간에 단식하지도 않으며, 순례를 행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카트(구빈희사세)를 내지도 않고, 그것이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술 및 다른 금기사항들을 허용한다. 이들은 알가 신이라고 믿으며 "초월적이고 은밀하신 하이다라(حيدر)[11] 이외의 신은 없으며, 정의롭고 신실한 무함마드 이외에 장막은 없다 / 또한 그분께 닿을 수 있는 길은 권위자 살만 외에 없다."고 간증한다.
- 알 파트와 알 쿠브라(Al Fatwa al kubra)/이븐 타이미야

알라위파들은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며 오늘날에는 과거와 다르게 여성에게 히잡을 강요하지 않고 중동의 기독교 세력과 정치적 연대관계이며 이슬람 교리적으로는 같은 시아파로 인정받게 된 이란, 헤즈볼라 등의 시아파 세력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고 우호적인 경향이 있다. 이들은 엄연히 종교적 소수자에 속하기 때문에 이란 신정정부처럼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요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헤즈볼라처럼 세속주의 성향이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수니파 입장에서는 악마 중의 악마지만 레바논과 시리아의 시아파들은 그를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 불신자(...)들로부터 시아파를 보호하는 자비로운 구원자”로 평가하고 있다. 시리아의 시아파들은 아사드 대통령 사진을 놓고 대놓고 엎드려 절할 정도이며 시아파 교세가 강한 레바논 남부 지역에는 대놓고 알라위파 신도인 아사드 대통령의 사진을 길가나 도로에 걸어 놓은 게 보일 정도라고 한다.

5. 참고자료 및 주의 사항

본 문서의 '역사' 문단에 서술된 내용 중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내용 상당 부분은 시리아의 관영 저널리스트인 사미 무바예드[12]가 저술한 <IS의 전쟁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에서 참조 또는 인용하였다.

다만 해당 학자는 무슬림 형제단쿠르드족에 대해 적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쿠르드족에 대해 대단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논란이 되며 저서에도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내용이 많은 편이다. 이를테면 14세기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가 21세기 테러리즘 극단주의의 뿌리라는 식의 주장은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계열에서 진화론을 만약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약이 심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일 뿐이다.[13]

마찬가지로 무슬림 형제단 입장의 매체에서는 알라위파를 악마화하는 데 집중하지 발생 배경이나 알라위파 역사/문화 등등에 피상적인 수준의 설명으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양쪽 입장을 모두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5.1. 참고 문헌 목록

아랍 문학사 / R.A. 니콜슨 저(절판)
아랍인의 역사 / 앨버트 후라니 저(절판)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The Crusades: Islamic Perspectives / Carole Hillenbrand
Islam: A new historical Introduction / Carole Hillenbrand


[1] 멸칭의 뉘앙스가 강한 단어다. 실제로 알라위파 사람에게 누사이리야라고 한다면 정말 화내거나 알라위야라고 정정해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이스켄데룬을 중심으로 거주하지만 종교성이 약하고 튀르크화 정책으로 아랍 특성을 다소 상실했다.[3] 예외적인 사례로 아민 알후세이니는 아랍 민족주의의 대의 차원에서 알라위파들을 무슬림으로 인정하는 파트와를 발표하기도 하였다.[4] 원리주의 성향의 알레포-이들리브VS세속적인 다마스쿠스, 알라위파 중심의 라타키아 등[5] 쿠웨이트와 요르단, 바레인, 모로코도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정부군과 러시아군이 승리하는 양상으로 돌아가자 아사드 정권을 시리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6] 시아파에서는 셰이크 투시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시아파의 가장 유력한 마드하브인 자파리파 법학파의 시조다.[7] 마니교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학파 혹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마니교 식자들이 만든 학파로 추정됨[8] 알 마알리를 무신론자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에는 이런 관점이 논박되고 있다. 아랍어로 무신론자를 지칭하는 잔다까라는 단어가 원래 마니교 신도를 지칭하는 멸칭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슬람 황금기에 마니교 신자들이나 기타 시아파 계열 소수종파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관을 바탕으로 이슬람 순니파나 기독교, 유대교를 공격하는 일이 많았는데 마니교가 몰락하면서 후대에는 이들이 자신들의 소수 종파를 옹호한 내용이 실전되고 대신 "봐봐. 이 사람은 불경한 무신론자라니까."라고 비판할 목적으로 이슬람 순니파 교리를 비판한 어록만 기록에 남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9] 다만 그가 알라위파나 자흐미야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은 게 알 마알리가 엄격한 채식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알 마알리는 고기나 생선 외에도 심지어 달걀이나 우유, 까지도 동물성 식품이라고 먹지 않았는데, 이는 마니교 사제들의 식생활과 정확히 일치한다.[10] 주류 이슬람에서는 천국은 절대적인 영역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과 비슷한 곳인 정원으로 들어간다고 믿는다.[11]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별명으로 사자라는 뜻이다.[12] 출생은 영국에서 대학은 미국에서 졸업했으나 현재는 시리아 아사드 정부 관영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13] 그의 책이 미국에서 출판됐다 하더라도 엄연히 독재 국가 어용 학자인 그의 저술이 곡학아세 편향성 논란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는 나라로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의 노골적인 종북 성향의 인사들도 자유롭게 활동 및 의사 표현이 가능한 나라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페인 현대사 공부하겠다고 친프랑코파 어용 막장 성직자의 책만 한 권 읽은 후 프랑코를 스페인 최고의 성군인냥 생각하고 떠드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