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wcolor=#ffffff> 신의 존재에 대한 견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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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理神論 / Deism자연 종교(自然宗敎, natural religion) 또는 자연신교(自然神敎)라고도 불린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후에도 초자연적인 섭리와 기적을 통해 세계의 운행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고 믿는 유신론과는 달리, 현대에 주로 언급되는 이신론은 신이 세계를 창조한 후에는 세계의 운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1]
1705년 사무엘 클라크는 당시대의 이신론을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는데,[2] 이렇게 이신론이 무신론, 유신론, 범신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차례대로 증명함으로써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심지어 무신론이나 유신론으로 보일 만큼 그 개념의 스펙트럼이 넓다. 하지만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이신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기적과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기적과 계시는 인간의 자연적 인식 능력인 '이성(reason)'에 반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은 동일한 사건 아래에서는 동일한 현상을 일으키도록 하는 통일된 질서를 견지하고 있다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러한 '자연의 질서'에 반대가 되는 기적과 초자연적 섭리를 믿는 계시 종교를 배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신론의 논리이다.
2. 상세
16세기 후반에 일어난 과학 혁명과 종교 개혁은 유럽에서 '종교'를 로마 가톨릭 형성 전으로 돌려놓았다. 종교 개혁 전만 하더라도 가톨릭이 유럽의 종교를 평정했기에 '종교'라는 용어는 로마 가톨릭 자체였고, 초월적인 것을 향한 인간의 경건한 삶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 후로는 기독교 등장 전과 기독교 시대 초기처럼 '어떤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종교와 종파 간의 교리적 논쟁이 다시 활발해졌고, 시간이 갈수록 이 논쟁이 가열됨에 따라 종교는 초월자를 향한 경외심에서 비롯하는 경건함에서 교리의 체계를 의미하는 조직 신학(교의학) 중심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기존 종교가 따랐던 신앙과 실천의 관점이 아니라 이성과 인식의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3]이런 상황에서 근대 자연 과학의 발달로 인해, 계시의 도움 없이 인간의 자연적 인식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이성과 경험'만으로도 자연의 진리를 밝힐 수 있음을 알게 된 근대 지식인들은, 예언과 기적을 통해 자연의 운행과 인간사에 수시로 개입하는 '설명할 수 없는 신' 대신, 흡사 시계처럼 이 우주를 질서 속에서 운행하도록 제작한 시계공과 같은 신을 점차 찾게 되었다.
또한 부패한 교회의 정화를 위해 마틴 루터가 불을 붙인 종교 개혁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부패 문제보다 더 심각한 종교 간 분쟁을 야기했다. 17세기 초에 발생한 30년 전쟁은 유럽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교리적 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보편적 종교를 찾게 만들었고, 그때 지식인들의 눈에 띈 것이 바로 근대 자연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이신론이었다.
이신론은 계시와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에서 자연 종교라 불린다. 이 자연 종교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질서의 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덕적 실천 외에는 어떠한 신조나 교리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적 분쟁을 종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종교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기성 종교를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던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계시에 기초한 기성 종교를 이러한 자연 종교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영국에서 18세기 초는 바로 이런 시도가 그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한동안 영국에서 번성했던 이신론은, 헨리 도드웰의 《논증에 기초하지 않은 기독교》가 출간된 1743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도드웰은 이 책에서 종교의 기원과 토대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믿음)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종교는 이성적 담론의 대상이 아니라는 도드웰의 주장은 계시 종교에 대한 공격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와 이성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이성으로 기적과 예언의 유무를 논하는 이신론에 관한 담론들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이성적 논의는 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원의 문제나 인간의 인격 형성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으며, 종교는 그 본성상 이성이나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모든 이성적 논의는 무의미하게 된다.[4]
이후 여기에 영향을 받은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순수 이성(자연을 파악하는 합리적 이성)과 실천 이성(도덕, 종교)으로 구분하여 전개했다. 또한 '종교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신앙)에 있다.'라는 도드웰의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대대적인 영적 대각성 운동(종교 부흥 운동)의 발단을 제공했다.
3. 특징
이신론자들은 보통 세상을 창조한 신의 존재는 믿지만, 그 신이 사람과 같이 독자적인 인격을 가진 신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진노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요구하며, 처벌하는 신(마치 사람과 같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신이 예언을 들어주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인간이 관찰해 온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 내지 없는 것으로 본다.하지만 정해진 규범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신론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차이가 많은 편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비인격적인 거대 힘인 자연 질서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인격신이 있는데 그 신은 세상을 창조한 이후에 더 이상 세상에 개입하지 않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기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뉜다. 기적을 빌지만 않는다면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자 필요 행위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의견도 있고, 신은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기도는 소용이 없다는 의견도 있으며, 명상과 자기 정화를 목적으로 기도를 하는 이신론자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 무엇을 원해서 기도를 하기보다는 신에게 감사를 나타내는 쪽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5]
신을 믿으면서도 보편적인 종교적 태도와 거리가 먼 이신론의 특성 덕분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편이다. 단적인 예로, 알려진 이신론자들 중에는 무신론에서 '개종'한 사람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20년간 천주교 신부였던 사람도 있다.
위에도 얘기했듯이 구체화된 교리가 없기에 수많은 종류로 나뉘는데, 유일이신론(신은 한 명만 있다는 주장), 다이신론(여러 명의 신들이 있다는 주장), 범이신론(세계가 곧 신이라는 주장), 범재이신론(세계는 신의 일부라는 주장) 등이 그 예이다.
로마 시대에 시작된 초대 교회 때부터 차츰 기독교에 헬레니즘 문화가 들어오고 또 철학이 들어오면서[6] 선지자나 성경[7]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는 자연 계시의 생각이 존재했다.[8] 중세에 아퀴나스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행했고 이러한 영항 때문인지 자연 관찰에서 신을 찾으려는 시도나 경향이 존재했는데 제1원인론 따위가 그렇다. 이신론은 어느 정도는 이런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신론에 기반하여 생겨난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프리메이슨이다. 이신론은 이 세상에 간섭하는 인격적 주재자인 신을 부정하기에[9] 이런 신의 존재를 전제하는 계시 종교인 가톨릭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프리메이슨의 활동이 실제 반가톨릭 사조로 나타나자 가톨릭 교회는 프리메이슨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의 프리메이슨 가입을 자동 파문 사유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10] 이후 합리주의, 이성주의에 입각해 종교나 경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에 의지하지 않고 신을 파악하고자 애쓴 이신론은 현대의 무신론 사조에 영향을 줬다.
대표적인 이신론자는 미국 건국의 주역들 중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있는데, 미국 제3대 대통령인 그는 그리스도의 기적 전승을 '천박한 속임수'라고 비난했다.
4. 다른 매체에서의 등장
5. 유명한 이신론자 목록
5.1. 근대
5.1.1. 영국
- 에드워드 허버트
- 앤서니 콜린스
- 존 톨런드
- 매튜 틴들
- 애덤 스미스 (개신교)
5.1.2. 프랑스
5.1.3. 독일
5.1.4. 미국
5.2. 현대
5.2.1. 미국
6. 같이 보기
7. 여담
- 한편 동아시아의 유교도 이신론에 해당한다고 보는 의견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신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대 중국에서 '하늘(天)' 개념은 인격신을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神)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원칙을 지킨 공자 이후로 유학 전통에서는 신이나 귀신 개념이 인문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에서 신이나 귀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러한 신 개념은 이신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계처럼 움직이는 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은 유교와 다소 관련성이 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예수회를 통해 중국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어 오면서 공자, 맹자 철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생겨나고 있었고, 서구 입장에서 중국 철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히 흥미롭게 인식되고 있었다. 볼테르는 유교를 칭찬하는 서술을 하였으며[13] 청나라의 강희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보았다. 독일의 계몽주의자들 중에도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경우 중국적 사유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였다.
- 개신교의 은사중지론과는 다른데 이신론에서는 과거나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기적과 계시는 없다는 입장이고 은사중지론은 구약 및 신약 초기에는 성령의 역사(은사)가 있었으나 현대에는 없다는 입장이다. 즉 은사중지론은 역사시대의 기적과 계시의 존재는 인정한다.
- 빅뱅의 원인을 찾다가 이신론자가 된 케이스가 있는데, 신의 창조는 유일한 제1원인론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신을 만든 더 복잡한 신, 그리고 그보다 더 복잡한 신이 있다는 식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간단하게 우주가 그냥 만들어졌다고 하는 게 더 간명한 설명이다.
[1] 이와 비슷하지만, 창조 후에도 계속해서 '자연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운행에 관여한다고 믿는 역사적 이신론(Historical Deism)도 있다.[2] 1번: 신은 세계의 운행에 관여하고, 인간의 도덕적 태도에 관심을 가지며, 내세에서 인간의 영혼에게 심판을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계시는 인정하지 않는 유형 / 2번: 1번에서 더 나아가서 신이 내세에서 인간의 영혼에게 심판을 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유형 / 3번: 2번에서 더 나아가서 신이 인간의 도덕적 태도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유형 / 4번: 3번에서 더 나아가서 신이 세계의 운행에 관여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유형[3]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한국 개신교도 90년대까지는 조직 신학 위주의 교단 신학이 활발했지만 교단 간의 분쟁이 너무 심해지자 옥한흠 목사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운동으로 정통 교단들이 서로를 존중해 주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신론을 너무 배격한 나머지, 무분별한 음모론 확산을 방조하고 신학의 학문성을 부정할 정도로 반이성적인 움직임도 발생했다는 것은 비판받고 있다.[4] 이태하 『근대 영국철학에서 종교의 문제』 북코리아, 2018. 참조.[5] 다만 이 기복 신앙의 배제는 기독교를 포함해 다수의 종교에서 권장하는 기도의 방향이기도 하다.[6]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요한 복음 서문에 예수를 자연 법칙 또는 신의 힘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비인격적인 로고스(logos)를 빌려 와서 설명한 것이다.[7] 이때는 신약을 포함한 성경이 정경화 작업이 안 됐으니 구약에 한정된다.[8] 로마서 1:19~20 참고.[9] 이 논리는 이 세상에 간섭하는 신을 전제로 한 기독교의 중요 교리인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위험이 크다.[10] 개신교도 인격신을 믿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반가톨릭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개신교 목회자들까지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11] 다만 이쪽에서 말하는 신은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12] 명분은 이신론이지만 실상은 항목 참조.[13] Voltaire and China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