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1원인(causa prima라틴어, the first cause영어) 이론은 인과관계에서 모든 인자에 선행한다고 생각되는 최초 원인을 가리킨다.유의어로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ὃ οὐ κινούμενον κινεῖ가 있다.[1] 물론 제1원인은 부동(不動)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동의 원동자'보다는 더 넓은 개념이다.
2. 주장 역사
서양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제안한 논변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말로는 우주론적 논변이라고도 불린다.감각 대상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영원하고 움직이지(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점은 앞서 얘기된 것들로부터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73a, 김진성 번역, 이제이북스, 2007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73a, 김진성 번역, 이제이북스, 2007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은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지며 이러한 원인-결과의 계열을 끝까지 추구하면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원인을 고찰하게 된다. 이것은 순수한 형상이며 자기 이외에 사유의 대상을 갖지 않는 사유의 사유이며 종교적으로는 신은 만물의 창조자, 지배자로써 제1원인이었다.
제1원인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 제1원인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을 가진다.
- 그러나 제1원인만은 예외여서, 제1원인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 같은 건 없다.
- 따라서 제1원인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2]
제1원인론은 그 '제1원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는 제1원인론은 귀류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그 가정으로부터 모순이 나오므로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거짓이며, 따라서 "제1원인은 존재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제2문제
신론 -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앞에서 명백하게 말한 바와 같이 이 거룩한 가르침의 주된 의도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전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다만 하느님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사물들의 특히 이성적 피조물의 근원이며 종극인 것으로서의 인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해설이 의도하는 바도 다음과 같은 것을 다루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하느님에 대해 논하고, 둘째로는 이성적 피조물의 하느님께로의 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셋째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인 그리스도-그가 사람인 한-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고찰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겠다. 즉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들을 고찰할 것이고, 둘째로 페르소나의 구별에 속하는 것들을, 셋째로는 피조물들의 하느님에게서의 발출에 속하는 것들을 고찰할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첫째로 하느님이 존재하는지를 고찰할 것이고, 둘째로는 하느님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오히려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셋째로는 하느님의 작용에 대하여, 즉 하느님의 지식과 의지와 능력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첫째 것에 관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물어진다.
1.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인가.
2. 그것은 논증 가능한 것인가.
3.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중략)[3]
제3절: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신론 -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앞에서 명백하게 말한 바와 같이 이 거룩한 가르침의 주된 의도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전하는 것이며, 또 그것은 다만 하느님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사물들의 특히 이성적 피조물의 근원이며 종극인 것으로서의 인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해설이 의도하는 바도 다음과 같은 것을 다루게 될 것이다. 첫째로는 하느님에 대해 논하고, 둘째로는 이성적 피조물의 하느님께로의 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셋째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인 그리스도-그가 사람인 한-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고찰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겠다. 즉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들을 고찰할 것이고, 둘째로 페르소나의 구별에 속하는 것들을, 셋째로는 피조물들의 하느님에게서의 발출에 속하는 것들을 고찰할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첫째로 하느님이 존재하는지를 고찰할 것이고, 둘째로는 하느님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오히려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지를, 그리고 셋째로는 하느님의 작용에 대하여, 즉 하느님의 지식과 의지와 능력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에 대한 첫째 것에 관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물어진다.
1.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인가.
2. 그것은 논증 가능한 것인가.
3.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중략)[3]
제3절: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
병행문헌: 명제론집 제1권 제3구분 첫 부분. 이교논박대전 제1권 제13장, 제15장, 제16장, 제44장 ; 제2권 제15장; 제3권 제44장. 진리론 제5문제 제2절. 능력론 제3문제 제5절. 신학개요 제3장. 자연학 제7권, 제2강; 제8권, 제9강 이하. 형이상학 제12권, 제5강 이하 참조.]
1. 서로 모순되게 대립하는 것 중 하나가 무한한 것이라면 그 반대편의 다른 것은 전적으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이란 명칭에서는 어떤 무한한 선(善)이 이해된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떠한 악(惡)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악이 세상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그 밖에도 적은 수의 (몇몇) 근원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많은 근원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이외의 다른 근원들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이라는 근원에서 환원되고, 의도로 말미암아 있는 것은 인간 이성과 의지라는 근원에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는 절대로 없다.||탈출기 제3장 제14절에서 하느님 자신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했다.||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길로 논증될 수 있다. 첫째이며 더 명백한 길은 운동변화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진다. 사실 어떤 것도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에 대해 가능태에 있지 않은 한 움직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움직여 주는 것은 그것이 현실태에 있는 한 움직여 준다. 즉 움직여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 가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지는 것은 현실태에 있는 어떤 유(有, ens)에 의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예컨데 더워질 가능성 안에 있는 나무를 현실적으로 더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이라는 현실적으로 더운 것이다. 불은 이런 현실적 더움을 통해 나무를 움직이며 변화시킨다. 그러나 같은 것이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현실태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더운 것은 동시에 가능적으로 더운 것일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은 동시에 가능적으로 찬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관점에서 같은 양태로 어떤 것이 움직여 주는 것이며 움직여주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또한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렇게 움직여 주는 것 또한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무한한 소급이 인정되는 경우) 어떤 첫 움직여 주는 자, 즉 제1동자(弟一動者)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다른 움직여 주는 자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2동자들은 제1동자한테서 움직여지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다른 것을 움직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지팡이는 손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다른 것을 움직여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서도 움직여지지 않는 어떤 제1동자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둘째 길은 능동인의 이유에서다. 사실 우리는 이 감각계에 능동인들의 질서(계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능동인으로 발견되지 않으며 또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런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능동인들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질서지어진 능동인의 계열에 있어서 첫째 것은 중간 것의 원인이고 중간 것은 최종적인 것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 때 중간 것이 많건 혹은 하나만 있건 그것은 관계없다. 그런데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도 제거된다. 그러므로 만일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첫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최종의 것도, 중간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되어간다면 제1능동인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최후의 결과도, 중간능동인들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허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제1능동인을 인정해야 하며 이런 존재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셋째 길은 가능과[4] 필연에서 취해진 것이다. 즉 우리는 사물세계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그런 것들은 생성, 소멸하며, 따라서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존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때에는 사물계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眞)이라면 지금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이유는 없는 것은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을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떠한 유(有, ens)도 없었다면 어떤 것도 존재하기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허위다. 그러므로 모든 유가 가능한 것뿐일 수는 없고 사물계에 어떤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필연적인 것은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거나 혹은 갖지 않을 것이다. 그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는 필연적인 것들의 계열에 있어서 소급이 무한히 진행되어 갈 수는 없다. 이것은 벌써 능동인의 경우에서 증명된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필연성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존재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라 부른다.
(중략)||
2.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5] 자연본성은 어떤 더 상위의 작용자의 지휘에 의해 일정한 목적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에서 이루어진 것들을 제1원인으로서의 하느님께로 환원시킬 필요가 있다. 이와 비슷한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어떤 더 높은 원인으로 환원될 필요가 있다. 이런 원인은 물론 인간적 이성이나 의지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변할 수 있는 것들이고 불완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일 수 있는 것과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동적이고 그 자체로 필연적인 제1원리(根源)에까지 소급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제시한 바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1부 2문, 정의채 번역
토마스는 유사한 과정에서의 다섯 가지 논증을 펼친다. ㄱ) 운동[6]에서의 논증 ㄴ) 능동인causa efficiens에서의 논증 ㄷ) 우연적 존재자(ens, ὄν, 有[7])와 필연적 존재자의 논증 ㄹ) 완전성의 논증 ㅁ) 질서의 논증이다.
이 논증의 핵심은 운동이나 원인이 무한히 소급해가거나, 혹은 필연적인 존재자ens에 존재esse를 주는 또 다른 필연적 존재자ens를 무한히 소급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무한한 소급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만 무한소급으론 자연에서 관찰되는 후험적 결과를 부정하게 된다는 쪽에 가깝다.[8]
또한 거듭 강조되어야겠지만, 제1원인 개념은 세계를 설명하는 '전제'라거나 그리스도교의 독점적 '교리'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에게 주워져있는 '관찰 가능한 세계'로부터의 논리적 추적[9]이라 표현함이 옳다. 다시 말해서 관찰되는 후험적 세계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원인이 순환한다면?', '철학적 인과가 없다면?' 등의 순수하게 오직 가정적인 조건을 붙여 반박하는 것은 Ad hoc가 될 뿐이다. 관찰 가능한 후험적 세계로부터 첫 원인을 말하는 것은 최소한 고전적 의미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서구 철학 전통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이 제1원인이 이오니아 학파에겐 '신적인 원자'였고 피타고라스에게는 '신적인 불'과 동일시되는 '신적인 하나'였으며 훗날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존재esse였지만, 모두에게 이 원인은 신Theos/Deus이라 불렸고, 이러한 신론은 대부분의 고대 희랍 철학자들에게 널리 통용된 견해였고[10] 일부는 단일신론Henotheism[11]으로 발전한다.[12] 즉 제1원인론은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아닌 고중세 철학의 전통이라는 맥락에서 봐야한다.
2.1. 역사적 반론 제기
철학적으로 제1원인론이 주장되어 온 역사는 엄청나게 오래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들도 몇 가지 제시되어 왔다.[13]- 데이비드 흄: 흄에 따르면, 우리는 인과의 작용을 관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가 본 것이라고는 하나의 사건 후에 일어난 다른 사건뿐이다. 이른바 인과를 구성하는 두 사건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 즉 인과를 작용시키는 힘'은 절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제1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다. 즉, 인과론를 비판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칸트는 흄의 영향을 받아 "제1원인이 존재한다"는 명제와 "원인-결과 계열은 무한하다"는 명제는 둘 다 인간 이성이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명제라고 본다. 즉, 제1원인인 "신"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맞다거나 틀렸다거나를 말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이다. 하지만 동시에 칸트는 불가지론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적인 영역에 대해 탐구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제1원인론이 형이상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과학으로 판가름할 수 없는 문제라면 초월적 관념론으로 그 의미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 버트런드 러셀: 원인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원인에 대한 무한한 소급은 비합리적이다'라는 주장은 임의적인 판단이며 마찬가지로 '신은 원인이 없다'는 주장도 임의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이건 다르게 얘기하자면 "자연수는 1,2,3,...으로 무한히 커진다"라는 명제에 억지로 신을 끼워넣기 위해 "자연수가 무한히 커진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신만은 무한하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라는 것과 유사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순환적 입장: 예를 들어 A가 B를 이끌어내고, B가 C를 이끌어내고, C가 A를 이끌어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즉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 끝없이 순환하므로, '제1원인'을 가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불교의 12연기론이 가장 대표적이고, 힌두교의 윤회론도 일정 부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신 혹은 현실에 대한 논증으로 가장 자주 쓰이는 제1원인론의 반박인 이상, '그렇다면 순환하는 A, B, C 등의 존재들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경우 12연기가 4성제에 의거해 순환한다는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만물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여기에서 빠져나간다.
제1원인론은 더 이상 현대 철학의 주류 담론에서 논의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폐기되었거나 반박된 명제는 아니다.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났을 뿐,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에 따라 제1원인론은 중요한 철학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특히 제1원인론과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점은 '운동'과 '원인'이라는 개념을 근대 물리학적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에 해당하는 라틴어 motus(혹은 그리스어 kinēsis)는 물리학적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 제14장에서 사각형이 닮은꼴로 확대되는 기하학적 변화까지도 포함시켰듯이, '변화'나 '바뀜'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물질'을 뜻하는 영어 material의 어원인 라틴어 materia 역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질료', 즉 가능태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동일하게 '원인' 개념 또한 물리학적 인과 관계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 '원인'은 모든 유한유ens 혹은 우연유ens의 존재 근거를 탐구하는 개념으로, 개별 사건의 인과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원인을 필요로 한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지칭한다. 따라서 물리학 이론이 고전 역학에서 양자 역학으로 대체되더라도, 모든 존재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철학적 전제는 흔들리지 않는다.[14]
위에서도 말했듯이 원인의 무한한 소급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이런 소급은 어째서 사물들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가능태의 본질이 현실태actus[15]로 실현actus 되었는지, '존재한다'esse는 작위actus가 왜 사물들에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비록 제1원인을 통해서 현실태actus라는 작위actus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설명이 오늘날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한다'는 작위에 관심이 있다면 제1원인론은 여전히 유효한 설명이다.
2.2. 그리스도교 신론과의 관계
제1원인론에서 주의할 것은, 이것 자체는 그리스도교 신론 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인론은 당연히 이에 해당하지 않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도 위의 본문(신학대전 제1부 제2문제)에선 말 그대로 '제1원인이 존재한다'를 논증할 뿐이다. 여기에 토마스는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고 덧붙이지만, 이 덧붙임은 "이로써 삼위일체론이 입증되었다"는 부류의 언급이 아니라 단지 철학에선 이런 존재를 신으로 부른다는 의미일 뿐이다.[16] "신이라고 불리니까 이런이런 성격이 따라붙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니며, 일단은 신이라고 불리는 이 제1원인의 성격은 다른 본문에서 철학적으로 논의된다. 따라서 제1원인론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이를 그리스도교 신론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며, 토마스의 언급은 고전기 희랍 철학부터 이어져온 제1원인론을 자신의 색깔로 집대성한 것이다.신학대전은 여기에 뒤이어 신은[17] 가능태가 없는 순수현실태이며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 없고(1부 3문 2절) 우유accidens도 없다는 것(1부 3문 6절), 신에겐 본질essentia과 존재esse가 동일하다는 것(1부 3문 4절), 신이 전적으로 단순하다는 것(1부 3문 7절), 선bonum은 존재자ens와 개념상으로만 구별될 뿐 실재적으로 동일하다는 것(1부 5문 1절), 신이 선하고(1부 6문 1절) 최고선이라는 것(1부 6문 2절) 등을 논의하며 점점 그리스도교 신론으로 나아간다.
삼위일체론의 경우 신 안에 어떤 실재적 관계들[18]이 존재한다는 것(1부 28문 1절), 피조물 안에서 우유적 존재를 갖는 것은 신에게 전이될 땐 실체적 존재를 가진다는 것(1부 28문 2절), 따라서 실재적 관계들은 신의 본질과 같지만(1부 28문 2절) 관계는 구별을 내포하며 "같은 곳에서 능동이 운동과 같고 수동도 운동과 같다고 해서 능동과 수동이 같은 것이라는 귀결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신 안의 실재적 관계들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것(1부 28문 3절) 등을 논의하며 점점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제1원인론을 철학적으로 그리스도교 신론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자 서구 철학이 고전기부터 종교간 장벽을 넘어 가져온 사유로 생각해야 한다.
[1] 단,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내지는 unmoved mover라는 관습적 번역에는 주의점이 필요하다. 한자 動(움직일 동) 및 영어 move로 번역된 희랍어 kinēsis는 영어 kinetic의 어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이 생각하는 '운동'을 넘어 '변화'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가령 kinēsis에는 생명의 '탄생'도 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부동의 원동자'의 원래 뉘앙스는 '남을 변화하게 하는 불변의 원인'이다.[2] 제1원인론을 주장하는 어떤 철학자들은 제1원인은 자기원인이다, 즉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산출했다고 보았다. 반면, 제1원인 자신조차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제1원인의 원인은 대체 뭐냐?"라고 묻는 것은 아예 무의미하다고 본 철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3] 제1절에서 토마스는 초월자의 존재가 모든 사람에게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인간의 이성이 본래부터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제2절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논증이 가능하다고 밝힌다.[4] 여기서 말하는 가능(possible)은 우연한 것, 우연적인 것(contingens)과 같은 것이다. 즉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것을 말한며, 필연과 반대 의미이다.[5] 앞에서 소개된 두 번째 견해에 대한 반박.[6] 여기서 '운동'은 현대 물리학적 의미의 '운동'을 넘어 변화 일반을 일컫는다. 가령 생물의 탄생은 여기서 운동에 포함된다.[7] ens는 관습적으로 '존재자'로 번역되지만, 이는 근대 철학 맥락에서의 번역어인 '존재자'가 중세 철학으로 역류한 것이며 오히려 이해에 방해된다는 비판이 있어서 有를 대안 번역어로 쓰기도 한다.(예: 정의채) 유사한 이유로 고전 철학에선 '있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예: 김진성)[8] "자신들의 필연성을 단지 수용하기만 하는 것등의 무한한 연결고리 혹은 필연적이지 못한 것들의 자기 존재를 위한 연결고리는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난점을 스스로 해명하진 못한다.", 월터 패렐Walter Farrell, O.P.,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설서 I』A Companion to the Summa. Vol I., 조규홍 번역,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p.92.[9]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그 자체에 관한한 자명 한 명제다. 왜냐하면 이때 술어는 주어와 같기 때문이다. 후에 명백히 하겠지만 사실 하느 님은 자기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명제는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명제는 우리에게 더 명백하게 알려지고 그 본성 을 따라서는 덜 명백하게 알려진 것을 통해 논증될 필요가 있다. 즉 결과를 통해 논증될 필 요가 있다."
"토마스는 안셀무스의 '하나의 논증'을 반대했으니, 그 역시 거기서 사유와 존재가 허용될 수 없는 방식으로 동일시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명제들을 '본래 그 자체로' 명백한 명제들(propositio per se nota quoad se)과 '본래 그리고 우리를 위해' 명백한 명제들(propositio per se nota et quoad nos)로 엄격히 구별하고, 안셀무스의 논증을 첫째 범주에 부속시켰다: 비록 존재론적 논증이 그 자체로 논리정연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 본질에 대한 즉각적 직관의 결여 때문에, 그 본질에 대한 신앙이나 불신앙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토마스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질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54[11] 종교학에서 유일신론Monotheism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일신(one god) 외 기타 신들을 일신의 한 단면만도 못한 비독립적 영으로 본다. 기타 신들의 이론적 비존재를 논하지는 않으나 실천적 비유효성을 주장하며,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사이에 위치한다.[12] "오르페우스의 교설들은 7세기에 '제우스'라는 이름이 일정한 양과 질의 신적인 힘을 감싸 안고 있으면서 또한 디오니소스나 자그레우스라 불리는 또 다른 유사한 상징으로 마음대로 변환될 수 있는 단순한 상징으로써 다루어질 수 있음을 상세하게 예시해 보여준다.
[
신학대전 1부 2문 1절 주문, 정의채 번역]
"토마스는 안셀무스의 '하나의 논증'을 반대했으니, 그 역시 거기서 사유와 존재가 허용될 수 없는 방식으로 동일시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명제들을 '본래 그 자체로' 명백한 명제들(propositio per se nota quoad se)과 '본래 그리고 우리를 위해' 명백한 명제들(propositio per se nota et quoad nos)로 엄격히 구별하고, 안셀무스의 논증을 첫째 범주에 부속시켰다: 비록 존재론적 논증이 그 자체로 논리정연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 본질에 대한 즉각적 직관의 결여 때문에, 그 본질에 대한 신앙이나 불신앙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토마스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질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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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베르비크Jürgen Werbick, 도로테아 자틀러Dorothea Sattler, 테오도어 슈나이더Theodor Schneider, 『교의학 I/1: 서론, 신론』Handbuch der Dogmatik BD. 1: Prologomena / Gotteslehre (22000),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24, p.163 ]
[10] "신들과 우주만물에 관하여 그 당시 [
발췌자 주- 헤시오도스 시대]
통용되고 있던 관념들의 세 가지 특징은 특별히 강조될 만하다. 그 당시 그리고 그 후 피타고라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하나의 자연적 실재가 뒤이어 나타나는 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신적인 기원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
탈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포함하여 우주 내의 모든 것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어떤 실체가 그 자신으로부터 우주만물을 발생시키는 살아있는 실체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가장 잘 주장할 수 있는가? - 같은 책 67쪽]
둘째, 이 신적인 기원의 이름과 본성에 관한 점증하는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은 헤시오도스가 호메로스의 선택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사실과, 이 시기 동안에 다른 많은 신발생론들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몇몇은 신적인 기원을 선택함에 있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그 둘과 달랐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된다. 셋째, 신이나 인간의 본성과 힘이 그가 유래한 실체에 의해 설명될 수 있고 또 그 결과라는 관념이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 어떤 다른 행위자의 개입 없이 자기 자신과 닮은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있는 능동적 실체라는 이 관념은 물론 그리스 사유에 대해 너무도 심원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54[11] 종교학에서 유일신론Monotheism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일신(one god) 외 기타 신들을 일신의 한 단면만도 못한 비독립적 영으로 본다. 기타 신들의 이론적 비존재를 논하지는 않으나 실천적 비유효성을 주장하며,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사이에 위치한다.[12] "오르페우스의 교설들은 7세기에 '제우스'라는 이름이 일정한 양과 질의 신적인 힘을 감싸 안고 있으면서 또한 디오니소스나 자그레우스라 불리는 또 다른 유사한 상징으로 마음대로 변환될 수 있는 단순한 상징으로써 다루어질 수 있음을 상세하게 예시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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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몽소Paul Monceaux(『오르페우스교의 말들』s. v. orphici, Daremberg et Saglio)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른바 오르페우스교의 신들은 다만 하나의 유일한 신의 서로 다른 이름이거나 다양한 형식들 또는 연속적인 화신들일 뿐이다..]
오르페우스교들 역시 하나의 신적인 힘이 우주만물의 근원이라는 그리스의 지배적인 믿음에 동의한다."(Hack, 같은 책 p.59)[13] 다음의 반론들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고 싶으면 이 링크를 참조.[14]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1부 1문제-12문제), 정의채(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 철학박사) 번역, 바오로딸, 32014, p.171 역자 주석[15] 희랍어로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고 한다. 이 라틴어와 희랍어에서 각각 영어 act와 energy가 파생되었다. 영단어들에서 볼 수 있듯, '현실태' 개념은 어떤 형용사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작위'를 의미하며, 그래서 종종 '실현태'로도 번역된다.[16] 물론 '제1원인은 존재한다'라는 논증 후 토마스는 제1원인의 속성에 대한 논증으로 나아가지만, 이러한 논증'들'은 다음 논증'들'을 근거짓는 것이지 논증'들'끼리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원인을 신이라 부르는 언어적 전제가 망설여지는 현대인이라면, 제1원인의 속성들을 논하면서 그리스도교 신론으로 나아가는 논항들을 (즉 제1원인의 존재가 아니라 제1원인의 속성을 논하는 논항들을) '그리스도교적 신 증명'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며, 토마스의 논증에서도 현대인의 이러한 언어적 전제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이는 동일한 사고를 표현하는 두 가지의 표현 양태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물음과 무엇이 하느님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방법론적으로만 구별된다. 하느님의 현존(Dasein)에 대한 물음은 하느님의 '그러한 존재'(Sosein)에 대한 전(前)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하느님의 그러한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위르겐 베르비크Jürgen Werbick, 도로테아 자틀러Dorothea Sattler, 테오도어 슈나이더Theodor Schneider, 『교의학 I/1: 서론, 신론』Handbuch der Dogmatik BD. 1: Prologomena / Gotteslehre (22000),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24, p.188 ]
[17] 계속 강조되지만, 이는 명칭상 제1원인을 이렇게 부른다는 것이지 신의 성격이 이 명칭로부터 증명된단 소리가 아니다. 제1원인이 존재하고 이 존재가 신이라고 불리는데, 이 존재의 성격을 이제 논해보자는 소리다.[18]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존재자의 10가지 범주 중 하나로서 언급되는 '관계'를 말한다. 10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 실체substantia, 양quantitas, 질qualitas, 관계relatio, 장소ubi, 시간quando, 자세situs, 소유habitus, 능동actio, 수동pass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