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2201a><colcolor=gold> 세속명 | 후안 데 예페스 이 알바레스 (Juan de Yepes y Álvarez) | ||
출생 | 1542년 6월 24일 | ||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빌라 폰티베로스 | |||
사망 | 1591년 12월 14일 (향년 49세) | ||
카스티야 연합 왕국 하엔 우베다 | |||
학력 | 살라망카 대학교 (신학, 철학 / Ph.D.)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 맨발의 가르멜회 | ||
직업 | 성직자(사제), 수도자, 신비가, 시인 | ||
서원 및 수품 | 1564년 가르멜회 첫 서원 1567년 사제 수품 | ||
재임 기간 | 몬테 칼바리오 성모 수녀원장 | ||
1578년~1579년 | |||
가르멜회 바에사 대학 총장 | |||
1579년~1582년 | |||
로스 산토스 마르티레스 수녀원장 | |||
1582년~1585년 | |||
가르멜회 안달루시아관구장 | |||
1585년~1587년 | |||
성인 정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2201a><colcolor=gold> 성인명 | 십자가의 요한 | |
칭호 | 교회학자(신비로운 박사)[1] | ||
시복 | 1675년 1월 25일 | ||
교황령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클레멘스 10세 주례 | |||
시성 | 1726년 12월 27일 | ||
교황령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베네딕토 13세 주례 | |||
축일 | 12월 14일 | ||
수호 | 에스파냐 시인, 신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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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젊은 목동 홀로 고통스러워하네, 기쁨도 만족도 없이, 그의 양치기 소녀[3]에게 생각을 두고, 사랑의 상처로 마음 아프네. 2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해도, 사랑의 상처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그러한 슬픔은 고통스럽지 않으니. 잊혔다 생각되어 우는 것이다. 3 어여쁜 양치기 소녀에게 잊혔단 생각 하나만도 커다란 고통, 낯선 땅에 구박당하고 사랑하는 가슴 너무 아프네. 4 목동이 하는 말, 아, 불쌍하여라, 내 사랑 멀리하고 내 앞에서 즐기려 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랑하는 내 가슴 너무 아프네. 5 오랜 시간 지난 후, 한 나무에 올라 아름다운 두 팔 벌리고 거기 매달로 죽으셨구나. 사랑하는 가슴이 너무 아프네. |
예수의 테레사 수녀와 함께 가르멜회를 개혁함에 따라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했으며, 이후 여러 관구들을 직접 설치함으로써 수도회의 규모를 확장해 그 기반을 공고히 다져 놓았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예수의 테레사와 함께 근대 초 가톨릭 영성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거장으로 꼽히며,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을 지녔던 시들로 여러 신비주의적인 시들을 지었다.
요한의 작품들은 세련되고 풍부한 신학적 학식이 시적 감수성과 결함한 걸작들로, 스콜라학의 학문적 엄정함이 신비신학과 그 어떤 모순도 없이 융합되어있다. 가톨릭 신학 바깥에서도 에스파냐어권 작가들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문학인들은 물론 예술가들, 철학자들, 그리고 평화주의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루터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2월 14일.
2. 신비 체험
최민순 신부 번역[4] | 방효익 신부 번역[5] |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는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 모든 것에서 만족하려면 아무것도[6] 만족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려면 기쁨이 없는 곳으로 가라. 알지 못한 것을 알려면 아는 것이 없는 곳으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면 가진 것이 없는 곳으로 가라. 네가 아닌 것이 되려면 네가 없는 곳으로 가라. |
십자가의 요한,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I,13,11 |
십자가의 성 요한 (Heilige Johannes van het Kruis) 미헬 부넬 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십자가의 요한이 그린 십자고상 소묘와 그 성유물 |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Cristo de San Juan de la Cruz) 살바도르 달리 作, 켈빈그로브 미술관 |
3. 사후 공경
“Hoy estaré en el cielo diciendo maitines.”
“오늘 저는 천국에서 아침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 십자가의 요한의 유언
“오늘 저는 천국에서 아침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 십자가의 요한의 유언
1614년경부터 요한의 시복 심사가 착수되어 1675년 1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정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로부터 41년 뒤인 1726년 12월 27일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면서 축일이 11월 24일로 지정되었으나,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그의 기일인 12월 14일로 옮겼다. 현재 가톨릭뿐만 아니라 성공회에서도 축일이 동일하다.
1926년 요한은 당시 도미니코회의 수도자이자 교황청립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의 교수였던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주의 자문에 따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4. 대표작
- 영가(Cántico espiritual) 방효익
- 어둔 밤(La noche oscura del alma) 최민순 방효익
-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최민순 방효익
- 사랑의 산 불꽃(O llama de amor viva) 방효익
에스파냐어 원전 번역으로는 각각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민순 사도 요한 신부의 번역과 천주교 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의 번역이 있다. 최민순 신부의 번역은 한국 가톨릭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번역으로, 번역자 최민순 신부 본인부터가 시인이었던 만큼 십자가의 요한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나 오래된 번역이라 21세기 한국어 문어체와 거리가 있다는 단점이 있다. 방효익 신부의 번역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번역이지만, 비문(非文)이 상당히 많은 게 단점이다.
그 외에, 중역[7]이란 단점은 있지만 소품집까지 모두 합친 전집 번역이 가톨릭 평신도인 서한규 씨에 의해 출판되었다.
5. 관련 문서
[1] Doctor Mysticus[2] 번역: 『십자가의 성 요한 전집』, 서한규, 게쎄마니, 2016, pp.134-135[3] (발췌자 주석) 구약 아가의 여인. 곧, 구약에선 이스라엘이라 불리고 신약에선 교회라 불리는 '하느님의 백성'.[4] 십자가의 요한,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최민순 번역, 바오로딸, 1971(21993), p.91[5] 십자가의 요한,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방효익 번역, 기쁜소식, 2008(22012), pp.95-96[6] (번역자 주석) '모두-아무것도 아님' (Todo-nada)'이라는 두 짝 단어는 저자가 자신의 신비체험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설명하려고 끌어들인 용어이지 단순한 상징은 아니다. 저자가 "가르멜의 산길", 서론,8과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자신의 가르침을 설명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들이 난무했기 때문에 부정신학적인 방법으로 무엇이 아닌 것을 말하면서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저자의 고유하고 중요한 언어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하느님께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바로 이 용어(Todo-nada)의 핵심적 의미이다. 결정적인 모든 것(Todo)은 물론 하느님을 뜻하며, 이는 예수의 데레사가 표현하는 "하느님만으로 족하다"(sólo Dios basta)는 말과 같은 뜻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흔히 저자를 비관적인 무주의자(nihilista)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만일 표현할 수 있다면 오히려 모두주의자(Todoista)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nada)라는 표현은 어떤 가치를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형이상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복음적 근본주의를 말하기 위해 인간이 하느님과 비교하는 가운데 상대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신학적-영성적-신비신학적 용어이다.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분(Absoluto) 앞에서 유한한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가르멜의 산길", I,4,3-4) 상대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용어이며, 인간을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좁은 길로 이끌어주고 자신을 비우게 하는 향주삼덕의 역할과 그 결과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하느님이신 너(Tú)로 나를 채우려면, 즉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려면"(2베드 1,4) 우선 나를 비워야 하고, 부정해야 한다는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nada)라는 말은 항상 모두(Todo)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르멜의 산길", II,22,4)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지향하고 있는 용어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절정의 순간에서 신부가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일 것이다.[7] 정확히 말하면 일단 영어에서 번역하고, 에스파냐어를 통해 교정했다. 즉 원문 번역과 중역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