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크리스티안 볼프 Christian Wolff | |
출생 | 1679년 1월 24일 |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왕국 브라티슬라프 | |
사망 | 1754년 4월 9일 (향년 75세) |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 마그데부르크 할레안데어잘레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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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계몽 철학자로 라이프니츠와 칸트 사이의 시기에 독일의 합리주의 철학과 계몽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철학 외에도 법학, 수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독일어를 학문언어로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중국의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는 동서양 철학에 가교를 놓은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2. 생애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헤미아 왕관령 슬레스코의 중심지 브라티슬라프[1]에서 개신교 신자인 피혁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1687년에 라틴어 학교로 명성이 높았던 마리아-막달레나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1699년에는 예나 대학교에서 신학 및 수학과 물리학, 철학 등을 공부했다. 1702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인「수학적 방법에 의해 구성된 보편적 실천철학」을 완성했으며, 이듬해 강사 자격을 취득해 1706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704년부터 라이프니츠와 편지 교환을 시작하여 지적 대화를 주고 받는 교우 관계가 되었으며, 그의 추천으로 1706년에 할레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강의에서 볼프는 당시 대학에서 주로 사용하던 라틴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로 강의를 하여 학생들을 열광케 했다고 한다.
공자(孔子)의 말과 행동은 유럽인들이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덕철학과 국가철학의 보물창고입니다. 공자는 도덕과 학식이 출중했고 헛된 명예욕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국민의 참된 행복을 높이는데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바친 사람입니다. 중국에서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영광'의 표현이며, 공자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받는 것과 똑같은 경배를 중국인들에게서 받고 있습니다. 중국의 옛 황제들은 정치가인 동시에 철학자였습니다. 요순과 같은 고대의 성군(聖君)은 바로 플라톤이 말한 철인(哲人)정치가들입니다.
할레 대학교는 왕립 학교로서, 루터교회의 세속적 신학을 거부하여 독일에서 주창한 '금욕적 경건주의' 교파를 신봉하는 신앙적 중심지였으며, 인간의 이성이 신의 계시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경건한 신앙으로 신의 아들이 되는 것만이 진정한 종교철학이라고 설파해온 이들이 교수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곳이었다.
이 할레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1721년 7월 12일 퇴임 기념 강연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에서 볼프는 중국의 공자와 유교의 가르침을 들어[2] "중국의 경전을 오랫동안 연구해 본 결과 (볼프 자신이 보편적 실천 철학에서 강조했던) 도덕적 행위의 일반 규칙을 중국인들이 이미 앞서서 행해왔더라"고 평가하며, 중국인들이 이성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깨닫고 자연의 법칙과 조화할 수 있도록 행위해 왔다고, 중국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데도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루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중국이 이 원리에 근거해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쉽게 말해 "신에 대한 개념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윤리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니까요?"라는 내용이었다.[3]
이로 인해 할레 대학 학장이었던 프랑케 등 소위 '경건주의' 신학자들에게 "볼프의 연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섭리를 부인하는 ‘무신론’ 혐의가 있다"고 고발당하고[4] 1723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명으로 '48시간 안에 프로이센에서 나가라'는 사실상의 추방 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 마르부르크 대학교[5] 교수로 초빙되어 계속해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볼프는 자신의 연설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을 상세한 주석을 달아 1726년에 정식 출간했으며, ‘정신적 자유의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유럽이 주목하는 철학자가 됐다. 1732년에는 공자의 유명한 말인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從心所慾不踰矩)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6]
추방까지 부른 볼프의 연설문은 프로이센 안에서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해적판으로 인쇄되어 토론장마다 불티나게 팔렸다. 프로이센 안에서 200여 건의 관련 저술이 나올 정도였다고. 심지어 이 저작을 읽은 사람 중에는 프로이센의 태자까지 있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36년 볼프 재조사위원회의 설치를 허락했고, 위원회는 볼프철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국왕도 볼프의 저작을 직접 읽어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저작을 읽은 태자 프리드리히가 1740년에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 뒤, 볼프에게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원과 할레 대학 교수로 다시 초빙하는 제안을 하고 볼프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복권이 이뤄졌다. #
1745년 크리스티안 볼프는 바이에른 선제후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1753년 할레 대학의 총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할레 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754년 4월 9일 할레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독일어 형이상학』(Deutsche Metaphysik, 1719)[7], 『제일철학 또는 존재론』(Philosophia prima, sive Ontologia, 1729), 『철인왕과 통치하는 철학자』(De rege philosophate et philosopho regnante, 1730),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 1734) 등이 있다.
[1]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이다. 독일어로는 브레슬라우(Breslau).[2] 이 무렵 중국에 있던 예수회 신부가 번역한 <대학>, <중용>, <논어> 등이 <중화제국 6대 경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유럽에 소개되어 있었다.[3] 아예 공자를 모세, 예수, 무함마드에 비견하는 인물로 추켜 세웠다.[4] 연설을 듣던 교수와 신부 가운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5]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1527년에 마르부르크에 세운, 독일 최초의 개신교 대학이다.[6] 이 책에서 볼프는 공자의 이 말을 플라톤의 이데아를 몸소 구현한 경지라고 찬사를 보낸다.[7] 칸트의 순수이성-실천이성 비판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