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남작 Freiherr Svetozar Borojević[1] von Bojna | |
이름 | Svetozar Borojević von Bojna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2] ↓ Svetozar Boroević 스베토자르 보로에비치[3] |
출생 | 1856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 우메티치 |
사망 | 1920년 5월 23일 (향년 63세) 오스트리아 공화국 클라겐푸르트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2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8년) |
주요 참전 | 보스니아 합병 프셰미실 공방전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전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
서훈 |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Kommandeurkreuz des Militär-Maria Theresien-Ord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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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원수[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들 중 유일한 남슬라브인[5] 원수였으며, 별명은 '이손초의 사자'였다. 용맹한 별명과는 별개로 인품이 매우 좋아서 병사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우리의 스베토'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2. 생애
보로예비치는 1856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우메티치(Umetić)에서 그라니차르 장교 가문 출신인 아버지 아담 보로예비치(Adam Borojević)와 코바르바시치(Kovarbašić) 가문 출신인 어머니 스타나 보로예비치(Stana Borojević)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에 생도학교에 입학했고, 카데트 학교를 졸업한 뒤 스렘스카 카메니카로 이주했다가 그라츠로 이주하였다. 1872년 16세의 나이로 52연대 병장으로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보로예비치는 1878년 보스니아 점령 전투에 여러 번 참전하였는데, 특히 사라예보 점령전에서 공을 세운 공으로 10월 20일 공훈십자장을 받았다.1887년부터 1891년까지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술, 군사조직, 군사사를 가르쳤고 1892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1898년부터 프라하 주재 제8군단 참모장을 역임했고 1904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4보병여단을 지휘했다. 1905년에는 군 공로를 인정받아 "폰 보이나(von Bojna)"라는 작위를 받았고, 1907년, 크로아티아 왕립 근위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08년 5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2년에는 보병대장이 되어 제6군단을 지휘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9월 1일부터, 기존 제3군 사령관을 역임하던 루돌프 폰 브루더만이 경질되고 그의 후임으로 보로예비치가 동부전선에서 제3군을 지휘하였다. 그는 카르파티아 전투와 프셰미실 공방전을 지휘하였고 패배하였지만 러시아군에게 300,000명의 사상자를 강요하였다. 아무튼 보로예비치는 프셰미실에 있는 요새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군은 프셰미실에 있는 요새를 다시 점령하였으며, 이후 보로예비치와 독일군 지원군은 프셰미실 요새를 결국 탈환하였다.
이후 1915년 5월 보로예비치는 이탈리아 전선의 제5군 사령관으로 배치되어 루이지 카도르나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수많은 공세들을 막아냈다. 1916년 5월 1일 제국원수로 진급하였고, 1917년 8월 23일에는 남서부 전선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독일군과 함께 카포레토 전투를 지휘하여 이탈리아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쟁 막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던 피아베강 전투에서 패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10월 말 이탈리아 왕국군의 마지막 일격인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휴전을 요청하면서 이탈리아의 최종 승리로 끝이 났다.[6] 한마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성기와 몰락을 이끌었다. 1918년 11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해산된 이후 1918년 12월 1일, 퇴역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뒤, 보로예비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시민이 되기로 결정했지만 환영받지 못해 결국 오스트리아의 케른텐에 머물렀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귀족 접두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그의 이름은 다시 '폰 보이나'가 빠져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가 되었다.
나중에 보로예비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남슬라브의 유일한 야전원수였던 나를 왜 남슬라브인들이 홀대했는지 모르겠다'고 저술했으며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대해 섭섭함을 표시했는데, 훗날 제2차 세계 대전때 벌어진 훨씬 더 큰 규모의 끔찍한 학살극과 20세기 끝에 이게 되풀이된 사건 때문에 묻혔고 무엇보다 오헝 제국 당사자가 망해서 세르비아인들 본인들도 기억하지 않는 사건이지만 1차대전 당시 황태자 암살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오헝제국의 세르비아 점령 정책은 상당히 가혹했다. 20년뒤 훨씬 더 악랄한 스케일의 인종청소를 예지라도 하는 양 수십만의 세르비아 전쟁 포로, 위험요소로 지목된 민간인들이 오헝 제국 본토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혹사당하다 수만명이 죽었으며, 오헝 제국 점령지에선 키릴 문자 탄압부터 시작하여 아예 세르비아 국가 정체성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강압적인 점령 정책을 펼쳤다. 보로예비치 본인이 발칸 전선엔 한번도 배치된 적이 없어[7] 그 참상을 직접 못 본 것도 있지만 전후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들이었던 세르비아인들에겐 무시무시한 원한이 서릴 만도 한데 이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일한 남슬라브계 원수였는데 이리 무시하냐"란 생각을 한 걸로 보아 개인적으론 당대 민족주의적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19세기적 인물로 보인다. 또한 보로예비치 자신은 발칸전선에 배치된 적이 없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부의 의도적 인사정책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후 1920년 클라겐푸르트의 병원에서 사망했으며, 빈에 안장되었다.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 입국이 금지되어 있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대신 그의 묘를 후원하였다. 참고로 9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중에서 첫번째로 사망한 인물이었다.
3. 기타
유럽전쟁 6: 1914에서 장군으로 등장한다. 보병 지휘관 중에서 탑티어로 꼽힌다.[1] 독일식인 Boroević라고 쓰기도 한다.[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보이나'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3]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법령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개명한 이름. 1905년 작위를 받기 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식으로는 보로예비치, 독일식으로는 보로에비치다.[4]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5] 세르비아계였다는 설도 있으나 일단 보로예비치 본인은 자신을 크로아티아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메티치는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 마을이었고, 보로예비치 역시 정교회의 세례를 받았으며, 그는 1차 대전 중 단 한번도 세르비아군과 싸운 적이 없다는 점은 흥미롭다.[6] 전쟁 기간 동안 보로예비치는 전략적 식견은 뛰어났으나 전술적 지휘 능력은 젬병이었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가 싸지른(...) 각종 똥을 치우며 전공을 쌓았다. 이 때문에 보로예비치는 회첸도르프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7]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오헝 제국 군부의 인사정책일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