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크로아티아계 헝가리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모는 요제프 루카치치(József Lukachich)와 라우라 슬렉시(Laura Szlexy)이다. 루카치치는 테메슈바르의 사관생도학교를 졸업하고 1883년 제62보병연대에 입대했다. 이후 참모부와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근무했으며, 왕립 헝가리 향위대(Magyar királyi honvédség) 본부와 부다페스트 제1군관구 참모장을 역임했다. 1911년 7월 20일 대령으로 진급하여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국왕의 이름을 딴 제38보병연대장이 되었다.
루카치치는 제1산악여단장으로서 귀도 노바크 폰 아리엔티(Guido Novak von Arienti) 장군의 후임이 되어 세르비아 전선의 야고드냐(Jagodnja)와 브라이코비치(Brajkovici)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를 수여받았고, 1915년 3월 10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탈리아 왕국의 참전 후에는 이손초 전투에 참가했으며, 1916년 중반에는 그로스바르다인에 본부를 둔 헝가리 왕립향위대 제20사단장이 되어 파울 에들러 폰 너지(Paul Edler von Nagy) 장군의 후임으로 동부전선에서 9개월간 전투를 지휘했다. 1917년 8월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하여 산 가브리엘레산(Monte San Gabriele)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보여 금공로훈장을 받았다. 이후 코바리드 전투에도 참가했으나 1918년 2월 빅토어 폰 무이야르(Viktor von Mouillard) 장군에게 사단장직을 인계하고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지역의 후방 경비대 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 3월 9일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남작 작위와 함께 '폰 쇼모랴' 귀족 칭호를 받았다. 10월에는 부다페스트 군관구사령관이 되었으나 공산주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부대원들의 동요로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가 이끄는 국화혁명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 혁명 과정에서 루카치치는 체포되었다가 1919년 석방된 후 은퇴했다.
루카치치는 할모시 에르제베트 기젤라(Halmos Erzsébet Gizella)와 결혼하여 엘레오노라 빅토리아(Eleonóra Viktória, 1902년생)와 에르제베트(Erzsébet, 1903년생) 두 딸을 두었다. 은퇴 후에는 퇴역장교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을 맡았고 주택소유자협회 회장도 지냈다. 1943년 12월 25일 새벽 4시 부다페스트 3구에서 사망했으며, 유즈 묘지(Új köztemető)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