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일반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체코 출신 군의관 이그나츠 코르다(Ignác Korda, 1808-1872)의 아들로 요제포프(Josefov)에서 태어났다. 코르다의 가문은 본래 보헤미아의 체코계 가문이었으나, 1869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독일어권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후 코르다는 현지 김나지움을 마친 후 장크트푈텐의 기병생도학교와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고, 1877년 잘츠부르크의 제4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81년부터 1883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다녔고, 1882년 중위 진급과 함께 참모장교가 되었다. 동갈리치아의 벨리키 모스티(Velyki Mosty)에서 제11용기병연대에서 근무했고 1889년 대위가 되었다. 흐라니체(Hranice)의 기병학교에서 전술과 지형학을 가르쳤다.
1895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빈에서 알로이스 파어(Alois Paar) 기병총감 밑에서 일했고, 1898년 중령이 되었다. 1901년 대령 진급 후 쇼프론의 제9후사르연대장을 지냈다. 1907년부터 아그람의 제8기병여단장이 되었고 1908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1년 크라쿠프의 제7기병사단장이 되었고 1912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코르다는 제7기병사단을 이끌고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트 장군의 집단군에 배속되어 폴란드 진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제1군과 제2군에 차례로 배속되어 카르파티아 산맥 전투에 참전했다. 1915년 3월 슈테판 류비치치(Stephan Ljubičić)의 후임으로 제11군단장이 되어 제7군 예하에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가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1915년 9월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
다만 코라드나는 1916년 6월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지 못해 7월 후고 폰 하버만(Hugo von Habermann)에게 군단장직을 넘겨주고 해임되었다. 12월부터는 프셰미실 요새사령관이 되어 1917년 12월까지 재직했다. 이후에는 더 이상 지휘직을 맡지 못했고, 전쟁 직후인 1918년 12월 11일 빈에서 사망했다. 이후 빈 중앙묘지(Wiener Zentralfriedhof)에 안장되었다.
1905년 브륀 고등법원장 요제프 라미네트(Josef Laminet, 1807-1876)의 손녀이자 아돌프 쿠체라(Adolf Kutschera, 1869-1896) 남작의 미망인인 즈덴카 스타니슬라바 라미네트 폰 아르츠하임(Zdenka Stanislava Laminet von Arztheim, 1874-1946)과 결혼했고, 아들 안톤 이그나츠(Anton Ignaz, 1907년생)와 딸 마리에 안토니에(Marie Antonie, 1911년생)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