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후고 마르티니 폰 마와스투프 Hugo Martiny von Małastów | |
이름 | Hugo Martiny 후고 마르티니 ↓ Hugo Martiny von Małastów 후고 마르티니 폰 마와스투프[1] |
출생 | 1860년 2월 13일 오스트리아 제국 카르니올라 공국 크라니 |
사망 | 1940년 11월 30일(향년 80세) 나치 독일 슈타이어마르크 그라츠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9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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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7개 국어[2]에 능통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주요 전투들을 지휘했다.2. 생애
1860년 2월 13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령이었던 카르니올라 공국 크라니(Kranj)의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0년부터 1874년까지 크라니에서 김나지움 4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1874년부터 1875년까지 장크트푈텐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메리시-바이스키르헨 고등군사학교를 거쳐 1876년부터 1879년까지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879년 소위로 임관하여 제53보병연대에 배속되어 보스니아의 야이체(Jajce), 하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위치한 툴른(Tulln), 괴르츠, 아그람 등지에서 근무했다. 1884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부터 1886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다. 1887년부터 제53보병여단 참모장교로 일했으며, 1891년에는 제3·5측량대에서 지도제작자로 일했다. 이 시기 토르다와 콜로주바르 등지에서 근무했다. 1902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03년 제48보병연대로 전속되어 1904년 연대장이 되었다. 1908년 부다페스트의 제62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09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2년 중장 진급과 함께프레스부르크의 제14보병사단장이 되었다.2.1.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1915년 4월 제10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의 제3군 예하에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가했다. 5월 2일 마와스투프 고지 전투에서 파울 폰 크노이슬(Paul von Kneussl) 장군이 이끄는 독일 제국군과 협동작전을 펼쳐 러시아군 진지를 성공적으로 돌파했다. 이 기세로 즈미그루드 방면으로의 돌파구를 열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6월 4일에는 독일군 제11바이에른사단과 함께 프셰미실 요새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크노이슬 장군과 함께 전시 훈장이 부착된 철관왕관 훈장 1등급을 수여받았다.
7월 초 제10군단은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끄는 제4군 좌익으로 재배치되어 부크 강을 넘어 루츠크 서쪽 지역으로 진격했다. 9월 로브노 공세 당시에는 클레반 북쪽에서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아 후퇴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과를 인정받아 1915년 11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브루실로프가 이끄는 러시아 제8군이 올리카에서 오스트리아군 전선을 돌파했다. 마르티니의 제10군단은 스티르 강으로 후퇴해야 했고, 루츠크를 상실한 책임을 지고 해임되어 6월 7일 프리드리히 차나디 폰 베케시(Friedrich Csanády von Békés, 1861-1937) 중장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그라츠 군사령관으로 좌천, 그렇게 동부전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잠시 군사교육기관 총감독관을 지내다가 1917년 8월 제14군단장으로 복귀했을 때는 알로이스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었다. 카포레토 전투에 참전했으며, 1918년 1월에는 요제프 크라우트발트 폰 안나우(Josef Krautwald von Annau, 1858-1925) 보병대장의 후임으로 제3군단장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의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인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전쟁 막바지였던 1918년 6월 피아베강 전투, 10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 참전했으나 전부 패했고, 결국 11월 3일 군단 전체가 이탈리아 왕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18년 12월 1일자로 예편했으며, 그라츠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940년 11월 30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평가
마르티니는 7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이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 지휘관으로서 큰 장점이었다.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에서 특히 마와스투프 고지 전투에서의 성과는 높이 평가받았으며, 이는 1917년 그가 받은 "폰 마와스투프" 귀족 작위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루츠크를 상실한 것은 그의 군 경력에서 큰 오점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