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포병대장 요한 울리히 폰 잘리스제비스 Johann Ulrich von Salis-Seewis | |
이름 | 요한 폰 잘리스제비스 Johann von Salis-Seewis 요한 울리히 폰 잘리스제비스 Johann Ulrich Graf von Salis-Seewis |
출생 | 1862년 12월 8일 오스트리아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 카를로바츠 |
사망 | 1940년 10월 24일 (향년 77세) 유고슬라비아 왕국 자그레브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83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포병대장 (Feldzeugmeister) |
주요 지휘 | 제42랜트베어보병사단 제92랜트베어보병사단 점령 세르비아 군정청 총독 점령 루마니아 총사령관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발칸전선 - 동부전선 |
훈장 | 레오폴트 훈장 프란츠 요제프 훈장 철관 훈장 기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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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포병대장.2. 생애
요한 울리히 폰 잘리스제비스는 1862년 12월 8일 오스트리아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카를로바츠에서 태어났다. 오래된 스위스 귀족 가문 출신인 아버지 가우덴츠 구베르트 잘리스제비스(Gaudenz Gubert Comte Salis-Seewis, 1824–1873) 백작과 크로아티아 귀족 가문 출신인 어머니 빌헬미나 도브리노비치(Wilhelmina Dobrinović, 1839–1898)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상당한 명문 귀족이었는데, 할아버지 대부터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14세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었고, 증조할아버지 요한 가우덴츠 폰 잘리스제비스는 스위스의 저명 시인이었다. 다만 요한 울리히가 11살이었던 187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에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고, 요한은 어머니를 도와 어린 남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다.크렘스뮌스터 수도원 부속 김나지움을 졸업한 잘리스제비스는 이어 빈의 공병사관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1883년 8월 18일 포병 소위로 임관했고, 1888년부터 1890년 동안에는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수료했다. 1893년부터 1896년까지 프레스부르크의 사관후보생학교 교관으로 근무했고 1893년 11월 1일 대위로 진급했다. 1896년 10월부터 1898년 5월까지는 발칸반도 국가들의 군사력을 조사하는 '정보부'에서 일했다. 1898년 5월 절러에게르세기(Zalaegerszeg)의 제82향토방위보병연대에서 중대장과 대대장 보직을 역임한 후, 1899년 11월 1일 소령으로 진급하고 다시 참모부로 복귀했다. 이후 라이바흐의 제28보병사단에서 참모장을 지냈고 1901년 9월에는 베스프렘에서 열린 군사훈련에 참가했다. 1903년 11월 1일 중령으로 진급한 후 보스니아 헌병대에 배속되었다. 1904년 11월 마케도니아와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터키의 우스퀴브, 테살로니키 등지로 외교 사절단을 이끌고 갔다. 1906년 11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는데, 오스만 정부는 그에게 장군의 대우를 해주었다. 190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황립 및 왕립 전쟁성은 그를 3년간의 발칸 주재 임무에서 소환했다. 이후 잘리스제비스는 부다페스트 제86보병연대 임시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잠시 에스테르곰의 제76보병연대 대대장으로 전속되었다가 1908년 4월 피우메의 제79 "옐라치치 백작" 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12년까지 이 연대를 지휘한 후 소장으로 진급, 제71보병여단을 맡았다.
2.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8월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잘리스제비스가 지휘하는 제71여단은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 휘하의 제5군에 편제되어 세르비아 전선으로 떠났다. 그의 부대는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 드리나강 건너편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 되돌아와야 했다. 이후 잘리스제비스는 마치바(Mačva), 바노바 폴례(Banova Polje), 브르보차프(Vrbocav), 라덴코비치(Radenkovic) 등지에서 싸웠고 샤바츠(Šabac) 전투에 7일 동안 참전했다. 1914년 11월 11일에는 크로아티아인으로만 구성된 제42란트베어보병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세르비아를 향한 제2차 공격에서도 지휘했으나 실패하고 콜루바라강 전투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15년 초에는 세르비아 전선에서 빠져나와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의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다. 2월 15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철관 2등 훈장을 수여받았다. 2월 말 스타니슬라우로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상관이었던 카를 폰 플란처발틴 기병장군은 전투 지휘 능력 부족을 문제삼아 6월 22일 그를 해임했다.잠시 후방에 머물던 잘리스제비스는 1915년 11월 점령된 세르비아의 군정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1월 7일 오토 겔리네크(Otto Gelinek) 중령을 참모장으로 하는 군정청을 꾸려 베오그라드에서 총독 업무를 시작했으나, 세르비아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는 이유로 티서 이슈트반 헝가리 수상의 반대에 부딪혀 같은 해 7월 아돌프 폰 레멘 장군에게 총독직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잘리스제비스는 빈으로 돌아와 1916년 9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군사재판소의 부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참모직보다는 전선 복귀를 원했고, 마침내 1917년 10월 자신의 요청에 따라 루마니아 전선의 제92란트베어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사단은 독일군의 지원 아래 루마니아군과 싸웠다. 1918년에는 루마니아 주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1월 3일 크라이오바에 있던 사령부를 부쿠레슈티로 옮기고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독일군 사령관과 함께 루마니아 철수 작전을 협의했다. 제국의 패망이 임박한 1918년 11월 10일 철수가 개시되었고, 제국이 붕괴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해체된 11월 11일 포병대장로 진급했다. 이로써 그는 마지막으로 이 직위에 오른 장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