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기병대장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트 Heinrich Kummer von Falkenfeld | |
이름 | Heinrich Freiherr Kummer von Falkenfeld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트 남작 |
출생 | 1852년 4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 프레스부르크 |
사망 | 1929년 12월 8일 (향년 77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잘츠부르크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2년 ~ 1916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기병대장 (General der Kavallerie) |
주요 지휘 | 쿠머 집단군 제10군단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갈리치아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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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기병대장.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동부전선에서 쿠머 집단군을 지휘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군 예비역 육군 대장 계급도 받았다.2. 생애
1852년 4월 22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령이었던 프레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하인부르크의 사관생도학교에서 첫 군사교육을 받았고, 1868년부터 1872년까지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872년 소위로 임관하여 고향 프레스부르크에 주둔하던 제8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76년부터 1878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추가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기간 중인 1878년에 중위로 진급했으며, 졸업 후 참모장교단에 편입되었다. 이후 프레스부르크와 빈에서 근무했으며 1880년에는 대위 계급을 달았다.1883년부터 1887년까지는 참모본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다. 1887년 부다페스트로 전출되었고, 다음해인 1888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보스니아의 모스타르에 주둔하던 제18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892년 중령 진급 후에는 당시 체코의 파르두비체에 주둔하고 있던 제8용기병연대로 복귀했다. 1894년 대령 계급으로 갈리치아의 프셰미실에 주둔하던 제10군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00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미슈콜츠의 제30보병여단 지휘관이 되었다. 3년 후인 1903년에는 보스니아의 투즐라에 있던 제39보병여단으로 전출되었으며, 같은 해에 귀족 작위를 받았다. 1905년 중장 계급을 달고 플젠의 제19보병사단장이 되어 1910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1908년에는 폰 팔켄펠트 작위를 받았다. 1910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진급했으며, 프셰미실의 제10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지역에서 제국방위군 사령관도 겸임했다. 같은 해에 제국추밀원(k.k. Geheimer Rat)이 되어 "각하(Exzellenz)" 호칭을 받을 자격을 얻었고, 빈에 본부를 둔 제24보병연대의 명예 소유자가 되었다. 1914년 5월에는 제국방위군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되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동부전선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쿠머 집단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부대는 제95국토방위사단(리하르트-로스토칠 소장 지휘), 제106국토방위사단(차프 소장 지휘), 제7기병사단(폰 코르다 중장 지휘)으로 구성되었으며, 단클 장군이 이끄는 제1군의 좌익에 배치되었다. 8월 16일 쿠머의 국토방위군 부대들은 노베 브제스코-미에쿠프(Nowe Brzesko-Miechów) 선까지 진출했고, 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Piotrków Trybunalski)로 진격하던 보이르슈 장군의 슐레지엔 국토방위군단과 연결에 성공했다. 크라시니크 전투 당시에는 비스와강 서안에서 단클의 루블린 방면 진격을 엄호했다. 그러나 갈리치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하고 렘베르크가 함락되자 1914년 9월 12일 쿠머 집단군은 해체되었다.이후 빈으로 돌아가 전쟁 종료 시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자문관으로 근무했다. 1915년에는 前 전쟁성 장관 모리츠 폰 아우펜베르크의 기밀 누설 재판을 주재했는데, 아우펜베르크는 모든 혐의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16년 7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친서로 남작(Freiherr)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같은 해 8월 1일자로 퇴역했다.
군 복무 중 전쟁 기념장(1882), 군공훈장 3등급(1884), 철관 훈장 3등급(1898), 레오폴트 훈장 기사십자장(1907), 철관 훈장 1등급(1913), 전시 훈장과 함께 레오폴트 훈장 1등급(1914)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외국 훈장으로는 1901년 루마니아 별 훈장, 1914년 프로이센 철십자 2등급, 1915년 프로이센 철십자 1등급을 받았다.
퇴역 후에는 잘츠부르크에서 거주했다. 쿠머는 독일계였지만 브라티슬라바 출신이라는 이유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군에서 예비역 3급 장군 계급을 받았고, 1927년에는 연금 수급 자격이 있는 예비역 육군 대장 계급을 받았다. 아우구스타 좀머(Augusta Sommer)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에밀리(Emilie, 1893-1959) 딸 하나를 두었다. 에밀리는 하인리히 폰 잘리스-자마덴(Heinrich von Salis-Samaden, 1875-1955) 대령과 결혼했다. 1929년 12월 8일 쿠머는 잘츠부르크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