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알로이스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 Alois Schönburg-Hartensteinn | |
이름 | Eduard Alois Maria Alexander Konrad Fürst von Schönburg-Hartensteinn 에두아르트 알로이스 마리아 알렉산터 콘라트 폰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 ↓ Alois Schönburg-Hartensteinn 알로이스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1] |
출생 | 1858년 11월 21일 |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 | |
사망 | 1944년 9월 20일 (향년 85세) |
나치 독일 하르텐슈타인 (Hartenstein)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
1877년 ~ 1918년 |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최후의 제국상급대장.[2] 오스트리아 적십자사 회장, 제국 상원 부의장, 오스트리아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리히텐슈타인과 콜로레도-만스펠트(Colloredo-Mannsfeld) 가문과의 혼맥으로 당대 중부유럽 고위 귀족사회의 중심인물이었다.2. 생애
알로이스는 1858년 11월 21일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이었던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Alexander von Schönburg-Hartenstein, 1826-1896) 공작이며, 모친은 알로이스 2세 폰 리히텐슈타인의 딸인 카롤리네 공주(Karoline von Liechtenstein, 1836-1885)였다. 외할아버지인 알로이스 2세는 요한 1세 요제프의 아들로, 요한 1세 요제프가 그의 외증조부가 된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그의 주군과 이름이 같은 외고조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있다. 이후 알로이스는 빈 근교 칼크스부르크의 예수회 김나지움과 스코틀랜드 김나지움에서 수학했으며, 드레스덴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알로이스는 1878년에 제14용기병연대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882년에 빈 황립 및 왕립 기병교육기관(k.u.k. Equitationsinstitut)에서 1년간 수학했으며,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빈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수학한 후, 졸업했다. 1886년부터는 참모장교로 복무했으며, 1891년부터 1893년까지 정보국에서 근무했다. 이후 2년간 제2용기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는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관의 무관으로 복무하며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부관을 겸했다.
1896년 부친 사망 후 귀족 작위를 계승하며 일시적으로 현역에서 물러나 예비역으로 전환했다. 편입되었다. 가문의 하르텐슈타인 영지 관리를 위해서였다. 1898년에는 오스트리아 상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899년부터 1913년까지 오스트리아 적십자사 회장을 지냈으며, 1903년부터 1918년까지는 제국 상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1909년에는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예비역 소장이었던 그는 전쟁 발발과 함께 즉시 현역 복귀를 자원했다. 1914년 8월 루돌프 폰 브루더만 휘하의 제3군 소속 제11여단장으로 참전하여 동부전선 갈리시아 전투에 참가했다. 데시데리우스 콜로스바리 드 콜로스바르 장군의 제11군단 내에서 혼성사단을 지휘하여, 8월 27일부터 30일까지 즐로초프 전투에서 에밀 콜레루스 폰 겔던 보병장군의 제3군단 북쪽 익단을 지원했다. 모길라 고지 점령 시도에 실패하여 렘베르크로 후퇴해야 했다. 1914년 8-9월에는 제88 방위여단을 지휘했으며, 10월 26일 중장으로 진급했다.제14군단 소속으로 1914년 12월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의 여단은 크라쿠프 남부에서 러시아 제3군의 실레지아 진격을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14년 성탄절에 첫 부상을 입었음에도 전선을 이탈하지 않았고, 12월 26일 칼 겔프 폰 지게스슈테른 중장의 후임으로 제6보병사단장이 되어 제3군 예하에서 카르파티아 산맥 동부 전선과 나드보르나(Nadworna)의 드네스트르강 전선에서 플란처발틴 군단으로 편성된 제7군에서 복무했다.
1915년 4월 말 슈테판 폰 류비치치의 군단을 일시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쇤부르크 군단으로 개칭되었다.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1915년 6월 그의 사단은 부코비나의 도로우베츠로 이동했으며, 여기서 베니그니 군단의 핵심을 이루며 러시아 제9군의 공세에 맞섰다. 1915년 11월 러시아 전선을 떠나 제6보병사단과 함께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1916년 3월의 제5차 이손초 전투에서 산 마르티노와 도베르도 고원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남티롤 공세 실패 후인 1916년 7월에는 카를 대공의 후임으로 제20군단장이 되었다.
1917년 1월부터 8월까지는 제14군단을 지휘하며 남티롤 방어에 기여했다. 1917년 8월 1일 기병대장으로 진급했으며, 8월 22일 제4군단장이 되어 이손초 전선에 배치되었다. 제11차 이손초 전투(1917년 8월 17일-9월 12일) 중에는 그의 부대가 바인시차 고원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17년 10월 중순에는 몬테 산 가브리엘레에 대한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1918년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극심한 식량난과 대규모 파업 사태라는 이중고에 직면해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토카르 체르닌 외무장관이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에게 '식량독재관(Ernährungsdiktator)'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려 했으나, 카를 1세는 이러한 극단적 조치를 피하고자 이를 "후방 총감찰관(Generalinspektor im Hinterland)"이라는 더 온건한 직책으로 변경했다. 후방 총감찰관으로서 그는 파업 주동자들과 약 44,000명의 탈영병들을 체포하는 등 후방 질서 유지에 힘썼다. 하지만 전쟁성과 일반참모의 반대로 실질적인 권한 행사에 제약이 많았고, 이에 실망한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은 전선 복귀를 요청했다. 결국 1918년 3월 다시 피아베 전선으로 복귀하여 제4군단 지휘를 재개했다.
1918년 6월 피아베 전투에서 그가 지휘하는 제29사단과 제64, 70혼베드사단이 도하작전에서 일부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과정에서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은 포탄 파편에 두 번째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그는 전쟁 중 두 차례나 부상을 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극소수 고위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 한편,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은 짧은 병원 치료 후 전선에 복귀하여 1918년 7월 16일 제6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전선은 펠트레에서 파파도폴리 섬까지 이어졌다. 1918년 10월 24일 이탈리아 왕국군이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를 개시했고, 10월 27일 몬텔로와 파파도폴리 섬 양쪽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1918년 11월 1일 붕괴되어가는 전선에서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은 빈으로 소환되어 황제의 지시를 기다렸다. 11월 5일 자동차로 자신의 제6군 새 사령부가 있는 빌라흐로 이동했으나, 그곳에서는 소수의 장교들과 크게 감소한 병력만을 발견했다. 11월 11일, 제국 최후의 상급대장 진급을 받은 후, 11월 16일 카를 레너의 새로운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군에서 강제 예편되었고, 그렇게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마지막 제국상급대장 계급을 보유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1918년 12월 1일 정식으로 퇴역한 그는 아헨제(Achensee) 인근의 자신의 영지로 물러났다. 1920년 레오폴트 쿤샤크가 제안한 니더외스터라이히 향토방위대(Heimwehr) 지휘직은 거절했으나, 참전용사회 설립은 지원했다. 1927년에는 이손초 전선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단장 십자가를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은 1928년과 1930년에 스페인으로 망명한 지타 황후와 그의 아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33년 여름, 체코슬로바키아의 치초(Csicsó)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다가 발각되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금서였던 이 책으로 인해 큰 공론화가 되어 재판까지 이어졌다. 1933년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서 국방부 차관을 지냈고, 1934년 3월부터 7월까지 돌푸스 정부에서 오스트리아 연방국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 당시 군 투입을 지휘했다. 1936년에는 보험회사 피닉스(Phönix)의 파산과 관련된 부정한 금전 거래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두 번의 재판에서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1936년 5월 국가평의회 직을 사임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당시 슈슈니크 수상과 하임베어 지도자 슈타렘베르크 사이의 권력 다툼의 일환으로도 해석되었다. 이후에 조국이 나치 독일에게 강제로 병합당하는 것을 지켜본 후 1944년 9월 20일 작센의 하르텐슈타인에서 86세로 사망했다.
3. 평가
전쟁 중 두 차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복귀해 지휘를 계속했으며, 특히 제11차 이손초 전투에서의 산 가브리엘레 방어는 뛰어난 지휘력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상급대장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제국 해체 이후에도 가톨릭 귀족 연합과 참전용사회를 통해 구 체제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건물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곡사포 실탄 대신 연습탄 사용을 지시하는 등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4. 여담
1887년 4월 23일 빈에서 요한나 그래핀 폰 콜로레도-만스펠트(Johanna Gräfin von Colloredo-Mannsfeld, 1867년 7월 27일 도브르지슈 - 1938년 8월 26일 브르노)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동생 요한(Johan von Schönburg-Hartensteinn, 1861-1937)은 바티칸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를 지냈다.알로이스는 재산이 많았는데, 독일의 하르텐슈타인 영지 외에도 체코의 밀레틴, 체르베나 로타 성을 소유했다. 또한 1905년에는 73만 크로네를 들여 모라비아의 크랄로보 폴레[3] 대농장을 구입했는데, 이 영지는 2,000헥타르가 넘는 토지와 여러 산업시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토지개혁에서 일부 손실이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 영지를 유지했다. 그의 가족이 전간기에 모라비아에 자주 머물렀다는 것은 1938년 그의 부인이 브르노에서 사망한 사실로도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