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오스트리아 제국 상부 헝가리 출신 가문의 일원으로, 의사 베네딕트 마투슈카(Benedikt Matuschky)(1814-1864)의 아들로 1859년 락센부르크(Laxenburg)에서 태어났다. 클라겐푸르트에서 실과학교를 마쳤고, 1875년부터 2년동안트리에스테의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877년 클라겐푸르트의 제7보병연대에 소위로 입대했다.
1880년부터 1882년까지는 빈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중위 계급으로 참모장교단에 편입되었다. 이후 아라트의 제34보병여단과 프라크의 제18보병여단에서 복무했다. 1886년부터는 4년동안 참모본부 전사편찬국에서 근무했는데, 이 시기에 군사 저술가이자 전문가로 활동했다.
1893년 소령, 1896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1899년 대령이 되어 1900-1905년 야로스와프(Jarosław)의 제10보병연대장을 지냈다. 1905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장크트바이트암플라움의 제71보병여단을 지휘했고, 1907년에는 프라크로 전임되었다. 1910년 11월 1일부로 중장이 되어 라이바흐의 제28보병사단장이 되었고, 1911-1914년에는 부다페스트의 제4군단 부사령관을 맡았다.
1914년 5월 예비역으로 전역했으나, 전쟁 발발 후 크라쿠프 방위사령관으로 복귀했다. 1914년 10월 31일부로 명예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14-1915년 교체기에 지휘부가 크라쿠프에서 오스트라우로 이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계엄령 하에 탈영병과 혐의자들에 대해 가차없는 조치를 취했다. "시민들이 내 앞에서 떨어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부임했고, 곧 "피의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러 체코 민간인들에 대한 사형 선고에 직접 서명했다. 1915년 11월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다가, 병들고 전투 불능인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전선에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해임되었고, 이후 빈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수립 후 연금 자격을 잃지 않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군 편입을 신청했으나, 오스트라바에서의 과거 행적 때문에 거절당했다.
1888년 라이바흐에서 중장 하인리히 폰 카일(Heinrich von Keil, 1829-1911)의 딸 루이자 카일(Luisa Keil, 1866-)과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이자의 동생 프란츠 폰 카일(Franz von Keil, 1862-1945)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제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