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54년 5월 1일, 콜로슈바리는 변호사이자 지주인 요제프 콜로슈바리(József Kolossváry)와 카롤리나 네데츠키(Karolina Nedeczky) 사이의 아들로 베스프렘에서 태어났다. 빈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1876년부터 제10후사르연대 소위로 복무했다. 1881년 중위로 진급해 작전참모부에 배속되었고, 1884년 대위, 1891년 소령이 되었다. 1896년 중령으로 진급한 후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정보국장을 지냈고, 이어 작전국장을 역임했다. 1897년 5월 대령이 되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작전참모부에서 전출되어 고향 헝가리의 헝가리 왕립 국토방위군[2]으로 전속, 제2기병여단을 지휘했다. 1903년 5월 소장으로 진급했으나, 한 달 뒤인 6월 쿠엔헤데르바리(Khuen-Héderváry) 내각의 왕립 헝가리 국방성 장관직을 수락해 11월까지 5개월간 재직했다. 임기 중 논란이 된 징병법 개정안 처리에 실패하며 내각이 총사퇴했다. 후임 국방장관 샨도르 니리(Sándor Nyiri) 소장의 배려로 현역 복귀가 허용되어, 1904년 라이히쇼프의 제14기병여단장을 거쳐 1906년 8월부터는 스타니스와프 사단을 지휘했다.
콜로슈바리의 군 경력 말년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수도 렘베르크 인근에서 보냈다. 1907년 11월 중장으로 진급해 렘베르크 주둔 제30보병사단장이 되었고, 1912년 10월 31일부터는 같은 지역 제11군단을 지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8월, 콜로슈바리는 루돌프 폰 브루더만 남작 휘하 제3군 예하의 제11군단장으로 갈리치아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참패 끝에 렘베르크를 상실하고, 9월 군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재기용되지 못한 채 1915년 2월 1일부로 무기한 휴가에 들어갔고, 전쟁에 더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후 1919년 4월 5일 향년 64세로 쇼프론에서 사망했다.
[1] 대신 Dezső Kolossváry de Kolosvár를 사용해도 됨[2] 키라이 머저르 혼베드세그, Királyi Magyar Honvédsé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