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독일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원수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 Erzherzog Friedrich, Herzog von Teschen | |
이름 | Friedrich Maria Albrecht Wilhelm Karl 프리드리히 마리아 알브레히트 빌헬름 카를 |
출생 | 1856년 6월 4일 |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관령 그로스젤로비츠[1] | |
사망 | 1936년 12월 30일 (향년 80세) |
헝가리 왕국 머저로바르 | |
재위 | 테셴 공국 공작 |
1895년 2월 18일 ~ 1918년 11월 11일 |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4년)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푸르 르 메리트 붉은 독수리 훈장 1급 |
아버지 | 오스트리아의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여대공 |
형제자매 | 프란츠 요제프, 마리아 크리스티나[2], 카를 슈테판[3], 오이겐, 마리아 엘레오노라 |
배우자 | 크로이의 이자벨라 공녀 (1878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라아 아나, 마리아 헨리에타, 나탈리 마리아, 슈테파니 마리아 이자벨레, 가브리엘레 마리아 테레지아, 이사벨라, 마리아 알리체, 알브레히트 프란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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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 황족이자 제국원수[4].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는 카를 루트비히의 차남인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의 아들로[5] 1차 세계대전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었다. 동시에 테셴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었으며, 독일 제국군의 명예 원수였다.2. 가족 관계
합스부르크테셴 가문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시조인데, 자녀가 없어 조카 카를 루트비히를 양자로 들였고, 카를 루트비히의 장남 알베르트가 대를 이었으나 1남 2녀 중 딸들만 무사히 장성해서 1895년에 조카인 프리드리히가 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남 9녀를 두었는데 막내인 아들 알브레히트 프란츠가 1955년 세상을 떠나 대가 끊겼다.[6]3. 생애
프리드리히 대공은 모라비아의 그로스 젤로비츠(Groß Seelowitz, 현 Židlochovice) 성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대공비(Erzherzogin Elisabeth Franziska von Österreich)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 그의 가문은 나폴레옹을 물리친 카를 대공과 1866년 쿠스토차 전투의 승리자인 알베르트 대공으로 이어지는 군사적 전통을 가진 명문이었다. 14세라는 이른 나이에 티롤 황제 엽병연대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 프리드리히 대공은 삼촌인 알베르트 대공의 후원 덕분에 매우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보통 성년이 된 후에야 받을 수 있는 황금양털기사단 작위를 18세도 되기 전인 1873년에 받았고,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제국의 공용어인 독일어 외에도 헝가리어, 체코어, 폴란드어, 심지어 프랑스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교양 있는 장교로 성장했다. 1878년에는 크로이-뒬멘의 이자벨라 공녀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에서 8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얻었다.프리드리히 대공의 군사 경력은 꾸준했으나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 그는 18연대장, 27여단장, 14사단장을 거쳐 1889년부터 1905년까지는 프레스부르크의 제5군단장을 지냈고, 1907년부터는 오스트리아 방위군 사령관을 맡았다. 1895년 삼촌 알베르트 대공이 사망하자 테셴 공작위와 함께 체코, 모라비아, 슐레지엔, 헝가리에 걸친 광대한 영지와 빈의 알베르티나 궁을 포함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이 재산을 바탕으로 낙농업, 맥주, 설탕 등 다양한 사업에 투자했는데, 특히 그의 우유회사는 빈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고 테셴 버터는 독일까지 수출될 정도로 유명했다. 이런 사업가적 면모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대공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며 그를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3.1. 제1차 세계 대전
▲그의 원수봉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84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리드리히 대공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실질적인 지휘권을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에게 맡기고 대공을 명목상의 수장으로 세우기 위한 조치였다. 프리드리히 대공은 자신의 능력을 겸손하게 평가했고, 황제와의 약속대로 실제 작전 지휘는 콘라트에게 일임했다. 그는 1871년 제11엽병대대 소위 시절부터 알고 지낸 콘라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했으며, 각종 정치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독일의 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과 콘라트가 갈등을 빚을 때마다 빌헬름 2세와의 개인적 친분을 활용해 중재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로이센의 원수 작위도 받았다.
대신 그는 전선을 수시로 방문하며 사기를 진작하고 훈장을 수여하는 등 군 통수권자로서의 상징적 역할에 충실했다. 1914년 12월에는 리마노바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원수로 진급했는데, 이는 1847년 알베르트 대공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로 오스트리아군이 큰 타격을 입자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장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동부전선 지휘권을 넘겨야 했고, 같은 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붕어하고 그의 후계자인 카를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젊은 황제 카를 1세는 직접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프리드리히 대공을 부사령관으로 강등시켰다가 1917년 2월에는 완전히 해임했다. 프리드리히 대공은 이를 담담히 받아들였으나, 그의 아내 이자벨라는 이를 크게 모욕으로 여겼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정부는 그의 재산을 몰수했고, 협상국은 그를 전범 재판 소환 대상에 올렸으나 실제 기소되지는 않았다. 스위스와 바이에른에서 3년을 보낸 후 1921년부터는 헝가리 모숀마잘로바르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프리드리히 대공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1929년 승소하였다. 1936년 사망 시 그의 장례식은 1916년 카를 1세의 대관식 이후 헝가리 최대의 왕실 행사가 되었다.
4. 평가
프리드리히 대공은 수줍음이 많고 온화하며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우직하고 투박한 모습 때문에 빈 사람들은 그를 "밀크맨 대공" 또는 "버터 프리츠"라고 불렀고, 전쟁 중에는 박격포 폭발을 보며 "붐스티!"를 연발했다 하여 "붐스티 대공"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군사적 재능은 평범했으나, 제국의 귀족으로서 품위와 의무를 잘 지켰고 정치적 중재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콘라트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원만했고, 프리드리히 대공이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실무를 맡긴 점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콘라트의 회고록에 따르면 "2년 반의 전쟁 기간 동안 함께 일했음에도 작은 기념품 하나 받은 적이 없고, 내가 중병을 앓았을 때도 안부를 물어본 적이 없다"며 서운함을 표현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공이 공적인 관계에는 충실했으나 사적인 친분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그는 아내 이자벨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이자벨라는 페르디난트 대공이 자신의 딸이 아닌 시녀 초텍과 결혼하려 하자 크게 분노했고, 이것이 나중에 프리드리히 대공과 페르디난트 대공의 불화로 이어졌다. 전시에 군수품 납품과 식량 공급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이를 부당하게 악용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종합적인 그에 대한 평가는 무난한 편이다.
5. 여담
꽤나 부자였는데, 그는 삼촌이 죽자 막대한 양의 유산을 받았고, 심지어 성공적인 기업가였다.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에스파냐 국왕 알폰소 12세의 왕비가 되었다. 때문에 알폰소 13세는 그의 조카가 된다.
[1] 現 체코 지들로초비체[2] 알폰소 12세의 왕비이자 알폰소 13세의 모후.[3] 카를 알브레히트 대공과 빌헬름 프란츠 대공의 아버지.[4]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5] 어머니는 레오폴트 2세의 7남 요제프 대공의 3녀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여대공으로,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과는 친사촌간이었다. 당초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의 아들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으나 결혼 3년 만에 고작 18세의 나이로 사별하고, 사촌오빠인 카를 페르디난트와 재혼해 4남 2녀를 두었다.[6] 알브레히트 프란츠는 세 번 결혼해서 1남 2녀를 봤지만, 전부 귀천상혼이라 자녀들이 합스부르크가 당주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내려준 합스부르크 백작/백작부인 칭호만 쓸 수 있었을 뿐 테셴 공작은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의 막내동생인 오이겐 대공은 독신이었고, 아래 남동생인 카를 슈테판 대공의 세 아들들 중 카를 알브레히트 대공와 레오 카를 대공은 결혼해서 각각 2남 2녀, 2남 3녀를 두었지만 둘 다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아들들도 테셴 공작위를 습작할 수 없었다.[7] 다만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갓난 아기때 사망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공이 사실상의 장남 취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