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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2:42:07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

<colbgcolor=#808080> 카를 알브레히트 폰 합스부르크
Karl Albrecht von Österreich-Teschen
파일:Karl_Albrecht_Austria_1888_1951_photo1918.jpg
<colcolor=#ffffff> 이름 카를 알브레히트 니콜라우스 레오 그라티아누스

카를 알브레히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독일어)
Karl Albrecht Nikolaus Leo Gratianus

Karl Albrecht Habsburg-Lothringen
카롤 올브라흐트 합스부르크로타린스키 (폴란드어)
Karol Olbracht Habsburg-Lotaryński
출생 1888년 12월 18일

[[이스트리아 변경백국|]][[틀:국기|]][[틀:국기|]] 풀라
사망 1951년 3월 17일 (항년 62세)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스톡홀름 근교 외스터비크(Östervik)
배우자 앨리스 안카크로나
(1920년 11월 18일 결혼[1])
자녀 카를슈테판(1921 ~ 2018)
마리아크리스티나(1923 ~ 2012)
카를알브레히트(1926 ~ 1928)
레나타(1931년생)
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2](1860 ~ 1933)
어머니 토스카나 공녀 마리아 테레사[3](1862 ~ 1933)
형제 엘레오노라(1886 ~ 1974)
레나타(1888 ~ 1935)
메흐틸디스(1891 ~ 1966)
레오 카를(1893 ~ 1939)
빌헬름 프란츠(1895 ~ 1948)
최종계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대령(기병)
폴란드군 대령(포병)

1. 개요2. 생애
2.1. 제국 해체 전2.2. 제국 해체 후2.3. 제2차 세계 대전2.4. 전후
3. 참고문헌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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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족. 제국이 해체된 후에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민으로 살았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4],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와 사촌간이다.[5]

독일계였음에도 폴란드에 충성하며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당시 폴란드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독일계 장군들은 모두 나치의 침공에 맞서 싸웠지만[6] 그처럼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정체화하고 나치에 항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7] 또한 그는 다원주의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군주제와 다원주의를 혐오하는 히틀러와 성격이 맞을 리가 없었다.[8]

참고로 그의 남동생인 빌헬름 프란츠는 반대로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정체화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다. 때문에 이들 두 형제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서 각각 자국의 독립 영웅으로서 숭앙받는다.

2. 생애

2.1. 제국 해체 전

1888년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풀라에서 합스부르크테셴 가문의 일원이었던 황립 및 왕립 해군 원수 카를 슈테판 대공의 셋째 자녀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한 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도시 지비에츠(Żywiec)를 영지로 가지게 되었으며 갈리치아 왕국군 기병 대령으로 복무했고, 1910년에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1,175번째 기사로 임명되었다.

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은 자녀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는 등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 했고, 카를 알브레히트는 철저히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으로 살았던 레오 카를,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빌헬름 프란츠와는 달리 아버지의 교육 방침을 충실히 따랐다. 때문에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폴란드 섭정왕국의 국왕 후보로 아버지와 함께 논의되기도 했다.

2.2. 제국 해체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헝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카를 알브레히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지비에츠 지역이 폴란드의 영토가 되자 폴란드에서 살기를 선택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반 합스부르크 법이 헌법에 추가되자 그 역시 법적으로 이름에 폰(von)을 쓰지 않게 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카를 알브레히트는 폴란드군에 자원, 포병 대령으로 복무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약혼했었던 앨리스 안카크로나와 결혼하였다.

앨리스와 결혼한 이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지비에츠에서 부모를 모시고 동생 레오 카를 부부와 함께 살았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그는 아버지처럼 자녀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쳤다. 이 시기 막내동생 빌헬름 프란츠와의 사이가 틀어졌었는데, 20년대 폴란드 독립과 관련하여 의견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카를 알브레히트는 또 한번 폴란드군에 입대하려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9]

이후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 총독부를 세우면서 그가 독일계임을 주목, 그에게 독일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폴란드인임을 천명하며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1939년 11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치에신[10]의 수용소에서 전향을 강요받으며 고문당했다.[11]

아내 앨리스는 스웨덴 정부에게 남편의 석방을 청원할 것을 요구했고, 유럽의 많은 전현직 왕족들이 카를 알브레히트의 석방을 요구하여 결국 나치는 1941년 12월 한쪽 눈이 멀고 반신불수가 된 그를 의 한 병원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석방시켰다. 그는 고문당하고도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으며, 아내는 폴란드 국내군으로 일하기도 했다.

1942년 10월 카를 알브레히트는 또 한번 체포되어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45년 4월 10일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2.4. 전후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폴란드로 돌아온 카를 알브레히트 일가는 크라쿠프에 정착했다. 하지만 공산화되어가던 폴란드는 카를 알브레히트의 귀환을 반가워하지 않았고, 나치 독일에게 압류당했던 지비에츠 재산도 되찾아주긴커녕 재압류하여[12] 카를 알브레히트 일가는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13] 결국 카를 알브레히트 일가는 1946년 스웨덴에 있는 아내의 친척들에 의해 이민을 허가받아 스웨덴으로 이주하였다.

1949년 12월 15일 합스부르크 본가의 수장 오토 황태자는 카를 알브레히트 일가에 알텐부르크 공작 작위를 부여하였다.[14]

스웨덴에서 살던 카를 알브레히트는 1951년 스톡홀름 근교의 마을에서 사망하였다.

3. 참고문헌

4. 대중매체



[1] 앨리스에게는 재혼이었다.[2] 레오폴트 2세의 증손자이며,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의 손자이다. 1차대전기 오헝제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프리드리히 대공의 남동생이자,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와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외삼촌이다.[3]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차남 카를로 살바토레의 장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이종사촌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막내딸 마리 발레리 여대공의 시누이이다. 아버지 쪽으로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2세,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와 6촌간이다.[4] 알폰소 13세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카를 알브레히트의 고모다.(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의 바로 위 누나)[5] 루프레히트 왕세자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카를 알브레히트의 고모다.(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의 이부누나, 할머니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가 카를 알브레히트의 할아버지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과 결혼하기 전에 사별한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6] 다만 나중에 항복을 주도하는 율리우시 룸멜 소장 또한 독일계였다. 물론 룸멜도 처음부터 폴란드를 팔아먹으려고 한 게 아니고 영토를 지킬 가망이 없어져 항복을 주도한 것이니 충분히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7] 심지어 폴란드의 독일계 장군들 중에는 해군 사령관이었던 유제프 운루크 소장과 같이 폴란드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물론 독일계 폴란드인 중에서도 할레르 가문이나 안데르스 가문처럼 대대로 폴란드에 살아서 폴란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당연히 있었다.[8] 원래 군주 가문은 지위 보전 문제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적대적이다.[9] 폴란드어 위키백과 기준 서술이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입대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10] 독일어로 테셴, 체코어로 테신[11] 이 때 시인이자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던 막내동생 빌헬름 프란츠 대공 역시 함께 끌려가 취조를 받았는데, 이 무렵 나치에 기울어지고 있었던 빌헬름은 이에 격분하여 반나치 인사가 되었다. 더해서 나치가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또한 빌헬름이 반나치 인사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12] 반대로 빌헬름 프란츠는 지비에츠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았는데,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었기에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13] 당시 폴란드의 공산정부 입장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인 카를 알브레히트 일가는 타도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카를 알브레히트가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폴란드에 충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박한 대우였다.[14]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내가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천상혼 취급을 받아서 자녀들이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의 분가에서 대대로 습작해오던 테셴 공작위 역시 귀천상혼으로 인해 습작하지 못해 대가 끊겼다.[영어] [폴란드어] [17] =현대 독일 판도를 제외한 모든 독일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