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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라주 (파진) | }}}}}}}}} |
풀라 Pula | Pola |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국가 | 크로아티아 | ||||
주 | 이스트라주 | ||||
면적 | 51.65㎢ | ||||
인구수 | 52,220 (2021년 기준) | ||||
인구밀도 | 970/㎢ | ||||
시간대 | UTC+1 |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로마 시대 (1세기)의 원형 경기장.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 개요
크로아티아 북서부의 항구 도시. 리예카에서 남서쪽으로 60km, 이탈리아령 트리에스테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5만 8천여 명이다. 크로아티아의 로마로 불릴 만큼 시내에 고대 로마 유적이 즐비하며, 온화한 기후와 해변 덕에 관광객이 많다. 20세기 이전까진 트리에스테와 더불어 이스트리아 지방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도시였으므로 로마 유적을 제외하고도 아직도 그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다만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을 거친 후,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대다수이고 이탈리아계 주민은 5%에 그친다. 나머지는 세르비아, 보슈냐크계 주민들이다.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풀라 공항이 있다.2. 언어별 표기
크로아티아어 | Pula |
이탈리아어 | Pola(폴라) |
슬로베니아어 | Pulj(풀) |
3. 역사
세르기우스 개선문 | 아우구스투스 신전 |
원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리리아 인들의 거주지로 폴라이로 불리다가 기원전 177년, 로마에게 정복되며 현재 위치에 도시가 세워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고 인구 3만이 넘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벌어진 안토니우스 &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 & 카시우스 간의 내전에서 풀라는 후자의 편을 들었고, 그 대가로 2차 삼두정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룰리아에 의해 재건되며 세르기우스 개선문과 원형 경기장 등 대부분 현존하는 건물들이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기에 풀라는 황실의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며 악명이 높았다.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354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촌[1] 콘스탄티우스 갈루스가 처형되었다. 둘다 공동황제 (카이사르)였음에도 황제의 일방적인 호출에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죽음을 맞았다. 425년, 도시는 주교령이 되었고 476년에는 오도아케르에게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후 풀라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2]을 거쳤고 788년부터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 1148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3.1. 중세 ~ 근대
12세기부터 베네치아가 피사, 제노바 등과 해상권을 두고 경쟁할 때마다 풀라는 그 적국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도시 내부에서도 로마인 혈통의 귀족들과 신흥 귀족들 간의 암투가 벌어져 점점 쇠퇴하였다. 1192년, 풀라는 피사에게 점령되었으나 곧 베네치아가 회복하였다. 그리고 1243년, 풀라는 피사와 동맹하였다가 베네치아에게 점령되기도 하였고 1267년에는 그와 전쟁 중이던 제노바 측에게 함락되었다.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며 풀라는 1397년에 재차 제노바 군에게 함락되었고 그 외에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의 습격을 받았다. 또한 전염병도 겪으며 1750년에 이르자 풀라는 3천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로 쇠락하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체되자 풀라는 프랑스 제국령 일리리아주를 거쳐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내륙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의 획득으로 유일한 해양 진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베네치아를 상실하자 이스트라 반도의 풀라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핵심기지로서 기능하며 오랜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1859년에 해군 기지가 지어졌고 합스부르크 황실은 풀라로 여름 휴가를 오기도 하였다. 1856년 풀라 해군공창이 세워지면서부터 풀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심장으로 떠올랐다.
▲ 1886년 풀라 구시가지와 해군공창 일대 군항(Kriegshafen)의 지도. 가운데의 섬이 올리벤(울랴니크) 섬이며 육지부의 남쪽 해안 역시 해군공창(Seearsenal) 이다. 오른쪽은 시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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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라 항에 정박 중인 오스트리아 해군의 테게토프급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 |
3.2. 근대 ~ 현대
오스트리아 지배기 동안 도시에는 인근 크로아티아계 이주민들이 노동자로서 유입되었는데, 1910년 통계에 따르면 시민 중 15%가 크로아티아계였다. 다만 아직까지 도시 인구의 과반수는 이탈리아계였다. 한편,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고 도시는 폴라주의 치소가 되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스트 세력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박해하였고, 따라서 상당수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떠났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U보트 기지로 쓰이던 풀라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나치 독일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서로 적군의 부역자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하는 전쟁 범죄를 일으켰는데 전자가 훨씬 가혹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풀라에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의 결과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었다. 이후 폴라의 이탈리아계 주민들은 유고슬라비아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트리에스테 쪽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추축국을 도운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재판없이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는 파르티잔이 점령한 이탈리아 지역에서 많이 벌어졌는데 이를 포이베 학살이라 부른다. 이때부터 폴라는 완전한 크로아티아계 도시가 되어 이탈리아식 명칭인 폴라보다 풀라로 불리게 되었다. 1991년에 유고 연방이 해체된 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
4. 관광
종종 지역 행사가 열리는 풀라 원형 경기장
풀라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에메랄드빛 바닷물로 인해 인기 있는 여름 휴가지이다. 특히 풀라 앞바다에 위치한 브리유니 (Brijuni)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여름 거주지라서 수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방문하였다.
- 풀라 아레나 (Pulska Arena) : 4개의 측면탑이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로마 원형 경기장으로 기원전 68년에 만들어졌다, 1993년, 1995년, 2001년, 2004년에 발행된 크로아티아 쿠나 화폐 뒷면에 그려져 있다.
- 풀라 대성당 (Katedrala uznesenja Blažene Djevice Marije) : 5세기 경에 지어진 성당으로 여러 차례 확장하였다. 화려한 프레스코화와 바닥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또한 사도 토마스의 유물을 보관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황금 유물함이 있다.
- 아우구스투스 신전 (Augustov hram) :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바쳐진 신전으로 기원전 14년경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 세르기우스 개선문 (Slavoluk Sergijevaca) :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호민관 루시우스 세리지우스 레피두스를 기념하기 위한 개선문으로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 포르타 제미나 (Porta Gemina) : 2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중 아치형 문으로 풀라 북쪽에 위치해 있다.
- 부르기뇽 요새 (Fort Bourguignon) :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풀라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요새로 현재는 라이브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
- 브리유니 국립 공원 (Nacionalni park Brijuni) : 원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새가 있던 곳이었으니 빈의 사업가인 파울 쿠펠바이저는 군도 전체를 사서 리조트로 만들었다. 이 리조트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황실 구성원들이 방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리조트는 황폐화되었고 이탈리아 왕국이 카지노에 높은 세금을 매기자 파산하여 이탈리아 정부가 인수했다. 하지만 브리유니가 유고슬라비아 차지가 된 이후 티토는 이 곳에 개인 별장을 만들었다. 이 섬에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 버튼, 소피아 로렌, 카를로 폰티를 비롯한 유명인들이 방문하였고 이집트 대통령인 가말 압델 나세르,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를 포함한 100여명의 국가 원수들도 방문하였다. 전형적인 지중해 특성을 지닌 이 섬은 600종의 토종 식물을 비롯하여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
5. 기타
- 축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NK 이스트라 1961의 연고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