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지도. |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통일(Risorgimento, 리소르지멘토[1])은 1859년에서 1870년 사이 사보이아 가문이 통치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체들이 통일된 일을 가리킨다.
이탈리아 통일은 랑고바르드족이 침입한 이후 지속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의 세력들이 1천여 년만에 통합된 것으로서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 전개
2.1. 분열의 역사
서기 530년대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수복 전쟁[2]은 이후 55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는 황폐화되었다. 동로마군의 이탈리아 수복 이후에도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568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세워져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3] 랑고바르드 왕국의 세력권. 주황색이 랑고바르드족, 분홍색은 동로마 제국이다. |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과 간섭을 받던 교황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했고 피핀의 정벌에 이어 774년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하여 프랑크 왕국에 합병했다. 이후 840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고 이탈리아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했다. 다시 중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고 여기서 중세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다.
독일 왕국의 오토 1세는 중세 이탈리아 왕국을 합병하고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을 세웠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산하 구성국이 되었다.[4] 그러나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독일 왕국과 마찬가지로 거의 명목상의 왕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독립적인 여러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에는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국을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들이 분립하였다.[5] 초창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 경영에 주력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권의 강화와 더불어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경영에 몰두했던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으로 대공위시대를 거친 후 14세기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마침내 이탈리아 경영을 포기하고 독일 내부 정치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516년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카를이 외가 혈통을 통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아라곤 왕국의 부속인 사르데냐 왕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이 그에게 상속되었고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선출되면서 다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이탈리아에 다시 간섭하기 시작했다. 밀라노 공국을 노렸던 프랑스 왕국의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가 계속 이탈리아 문제에 간섭하였고, 카를 5세가 이를 막으려는 형국 속에서 이탈리아 반도는 외세의 알력 다툼이 점점 심해졌다.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이탈리아 전쟁은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종결되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스페인의 우위가 확정되었으며 이는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베네치아 공화국도 오스만 제국의 발흥으로 서서히 쇠락해간 와중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국력을 신장시킨 나라는 사보이아 공국이었다. 사보이아 공국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치세를 거치며 유일하게 프랑스-스페인과 대항할만한 국력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이후로 프랑스 영향권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중 벌어진 토리노 공방전에서 육촌인 오스트리아군 야전원수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의 도움을 얻어 승리하면서 프랑스 영향력을 일소시키는데 성공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사국 동맹 전쟁이 종결된 후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고 사보이아 공국이 사르데냐 왕국으로 승격되었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 파르마 공국은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 귀속되었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방계가 들어섰다.
18세기 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 사르데냐만 남은 사르데냐 왕국과 시칠리아만 남은 나폴리 왕국을 제외한 이탈리아반도 전역이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으나, 나폴레옹의 몰락 후 1814년 이루어진 빈 회의의 결과 이듬해 빈 체제가 성립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는 사보이아 왕조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스페인 부르봉의 파르마 공국과 양시칠리아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방계가 다스리는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2.2.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Prima guerra d'indipendenza italiana The First Italian War of Independence | |
1849년 노바라 전투 | |
1848년 3월 23일 ~ 1849년 8월 22일 | |
장소 | |
피에몬테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 |
원인 | |
자유주의 사상의 전파 시칠리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된 빈 체제 항거 운동 발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밀라노 병합 시도 | |
교전국 | |
이탈리아 반도군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이탈리아 자원군 밀라노 임시 정부 [[산마르코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토스카나 대공국 시칠리아 왕국 | 오스트리아 제국-프랑스 연합군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공화국 양시칠리아 왕국 |
지휘관 | |
카를로 알베르토 피에몬테 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알폰소 페레로 라 마모라 | 요제프 라데츠키 나폴레옹 3세 |
병력 | |
피에몬테군 115,000명 자원군 22,000명 | 오스트리아 제국군 100,000명 프랑스군 40,000명 |
결과 | |
오스트리아의 승리 로마 공화국에 맞선 프랑스의 승리 | |
영향 | |
오스트리아의 중부 이탈리아 통제권 회복 교황령의 로마 재수복 | |
피해규모 | |
사망/실종 17,400명 부상 5,000명 | 사망/실종 6,441명 부상 2,944명 |
당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이었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봉기가 일어난 밀라노를 샤르데나-피에몬테 왕국에 병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849년 3월 23일의 노바라 전투에서 요제프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게 대패하자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은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태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났다.
결국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6]은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과 나폴레옹 3세의 무력 간섭으로 실패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북중부 이탈리아 지방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실패와 혁명의 실패로 인해 세 가지 통일 방안 중 다음 두 가지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연방 구성
가톨릭 사제 출신 빈첸초 조베르티(Vincenzo Gioverti)가 주장하였는데, 그는 자유주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9세(Pius IX)에게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11월 로마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로마 공화국이 세워지자 교황은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도피하였고 1849년 6월 프랑스군이 로마에 입성하고서야 교황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교황은 20년간 프랑스 주둔군에 의해 그 지위가 유지되었는데 이 상태에서 교황 중심의 연방 국가가 수립되면 통일 이후에도 프랑스의 영향 하에 놓일 것이 명약관화했다. 따라서 이 방안은 무산되었다. 물론 교황이 조베르티의 연방안을 받아들여 의장이 되었다고 해도 오스트리아 등 주변 열강을 잘 설득해야 된다는 쉽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 공화국 건설 방안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가 주장했으며 1의 정반대 방안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시에 폭력 혁명을 일으켜 이를 통해 이탈리아 공화국을 창설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과 이탈리아 국민의 의식 수준으로 보건대 실현 가능성은 전무하였다.
위의 두 가지 방안이 무산되자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은 북이탈리아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중심의 통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중 통일을 주도할 만한 역량이 있었던 국가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뿐이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으로 합병되어 정치적인 구심점이 없었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방계가, 양시칠리아 왕국과 파르마 공국은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방계가 통치하는 외국계 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인데다가 각국 본가의 영향으로 인해 반동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경우 사보이아 왕조의 뿌리가 프랑스계였으나 1563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토리노 천도를 기점으로 완전히 이탈리아화하여 19세기에는 이미 이탈리아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인구는 좀 부족할지언정 피에몬테와 리구리아를 기반으로 한 농업과 상업 등의 경제력이나 입헌군주제, 토리노 대학교를 위시한 정치, 교육적인 면에서는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고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외국과 경쟁이 가능한 국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2.3.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2.3.1. 국제적 상황
- 영국
카밀로 카보우르는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선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만의 부족한 체급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필수적이었는데 그러한 동맹국으로는 영국과 프랑스뿐이었다. 당시 러시아나 프로이센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감수할 만한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수상이던 파머스턴은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다만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면서까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지원할 이유는 없었으며 더군다나 1856년 체결한 파리 조약에 의한 유럽의 외교질서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에 따라 프랑스의 강대화를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프랑스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건 영국에 있어서는 꽤나 큰 리스크였다. 따라서 영국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고 이러한 태도는 파머스턴 내각을 이은 더비(E. S. Derby) 내각에서 두드러졌다. - 프랑스 제2제국
영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소극적이자 카보우르는 프랑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폴레옹 3세[7]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 통일에 관심을 가졌던들 공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1858년 1월 14일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인 펠리체 오르시니(F. Orsini)가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오르시니는 황제가 젊었던 시절 이탈리아 통일에 적극적이었던 것에 비해 황제로 즉위한 후 태도가 바뀐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도리어 오르시니를 영웅시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코노(H. Conneau)를 보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카밀로 카보우르를 만나도록 하였고 이 자리에서 비밀회동을 가질 것을 합의하였다. 1858년 7월 20일 카보우르와 코노는 플롱비에르레뱅(Plombières-les-Bains)의 한 호텔에서 극비리에 회담을 가졌다. 이때 맺어진 합의를 플롱비에르 협약이라고 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사르데냐-피에몬테가 도발하고 이 전쟁으로 인한 국제 관계와 전쟁의 국지화 노력은 주로 프랑스가 담당한다.2. 전후 이탈리아를 다음과 같은 4개의 정치단위로 구성한다.*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이탈리아 왕국3. 이들 4개의 정치단위는 연방으로 구성되며 교황이 그 의장이 되나 실제로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지배한다.5.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장녀인 15세의 클로틸데(Clotide) 공주는 나폴레옹 3세의 조카인 36세의 제롬(Jerome) 공과 결혼한다.
-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나폴레옹 3세가 두려워한 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양국의 동맹 체결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프로이센의 중립을 이끌어내야 했다.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건강이 1857년 들어 극도로 악화되었고 11월에는 그의 동생 빌헬름 왕자가 섭정하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영국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는 친선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러시아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동부 국경에 집결시켜 프로이센의 발목을 잡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모든 병력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리하여 1858년 9월, 제롬 공이 나폴레옹 3세의 특사 자격으로 당시 바르샤바에 와 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알현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롬 공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경우 러시아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국경에 7만의 군사만 주둔시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제롬 공은 귀국 후에도 몇 차례 러시아에게 교섭을 제의하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이후 제롬 공의 러시아 접촉을 알아챈 발레브스키 프랑스 외상은 제롬 공을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고 다시 러시아와 교섭을 재개하였고, 이듬해 3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서 프랑스는 흑해 비무장 조항의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하였다.
2.3.2.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1859년 1월 1일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짐은 우리 프랑스와 귀국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과거처럼 우호적이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고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국제회의를 소집해 이탈리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영국은 현상 유지를 원했기에, 1859년 2월 코울리(H. W. Cowley)를 빈에 파견하여 '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사르데냐-피에몬테를 중립화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랑스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권익을 포기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중재안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이 와중에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청년들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밀입국해 피에몬테군에 입대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들을 롬바르디아로 귀환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4월 초에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4월 23일 사르데냐-피에몬테에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물론 카보우르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절하였다.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몬테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나폴레옹 3세가 친정하는 프랑스군과 역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친정하는 피에몬테군 연합군은 5월 20일 몬테벨로(Montebello)에서 3배가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6월 4일 마젠타(Magenta) 전투[9]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아에서 후퇴해 사각요새(Quadrilatero)[10]까지 후퇴했다. 프랑스와 사르데냐-피에몬테 연합군은 밀라노를 점령하고 프로이센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마젠타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자마자 역시 친정에 나섰고 세 나라의 군주가 친정한 가운데 양군은 6월 24일 솔페리노(Solferino)에서 또 다시 격돌[11]하였다. 전투 자체는 무승부에 가까웠으나 서쪽으로 진격했던 오스트리아가 다시 사각요새로 후퇴하면서 결과적으로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그런데 솔페리노 전투를 계기로 나폴레옹 3세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그는 카보우르와의 협의 없이 7월 11일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직접 만나 휴전에 합의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의중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제기되었다.
-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859년 5월 토스카나, 모데나, 파르마 등 중부 이탈리아 일대의 소국들에서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지배자들이 축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 배후에는 카보우르가 연결되어 있었다. 혁명으로 세워진 신정권들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의 통합을 목표로 삼았고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의 목숨을 대가로 강해진 사르데냐-피에몬테가 그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프랑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 오스트리아가 전투에서 패퇴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프로이센 문제가 제기되었다. 4월 오스트리아 대공(大公) 알브레히트(Albrecht von Österreich-Teschen)가 베를린을 방문해 프로이센에 연합전선을 제의했다. 프로이센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6월에 13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프랑스가 남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 솔페리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예상보다 커진 데다가 오스트리아가 사각요새로 후퇴하며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는 1859년 7월 12일 빌라프란카 조약[12]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는 만토바와 페스키에라 요새를 제외한 롬바르디아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는 이 지역을 다시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할양할 수 있다.
2.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계속 보유한다.
3. 이탈리아의 구 지배자들을 다시 복귀시킨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들은 사면한다.
2.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계속 보유한다.
3. 이탈리아의 구 지배자들을 다시 복귀시킨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들은 사면한다.
휴전협정은 1859년 11월 10일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빌라프란카 조약이 체결되자 카보우르는 격분하며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얼마 후 복귀했다. 그리고 조약 내용대로 프랑스가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피에몬테에 양도하면서 프랑스의 지원은 끝났다. 하지만 조약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는데 혁명이 일어난 중부 이탈리아에 진주한 사르데냐-피에몬테는 구 지배자들을 복귀시킬 의사가 없었고 프랑스 역시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구 지배자들을 복귀시키라고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격분했지만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이탈리아 전역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린 마당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2.4. 중부 이탈리아 합병
프랑스로부터 롬바르디아를 받은 후 통일 운동은 열강의 개입없이 이탈리아인의 힘만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군주들을 축출한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의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이 역시 통일주의자들이 봉기한 교황령의 로마냐 지방과 함께 1859년 12월 중앙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결성하였다. 중앙이탈리아 연합주가 사르데냐-피에몬테와의 통합을 결의하자 사르데냐-피에몬테는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해 주춤하다가 1860년 1월 카밀로 카보우르가 복귀한 후 1860년 3월 주민투표를 통해 통합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투표 결과 압도적으로 통합 찬성으로 결론이 나면서 사르데냐-피에몬테는 3월 22일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를 합병하였다. 3월 24일 사르데냐-피에몬테는 프랑스와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사보이아와 니차(Nizza)를 할양하고 중앙이탈리아 연합주의 합병을 인정받았다.2.5. 양시칠리아 합병과 이탈리아 왕국 수립
중부 이탈리아를 합병한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의 다음 목표는 남부의 양시칠리아 왕국이었다. 1860년 5월 부르봉 왕조의 전복과 남부의 해방을 목표로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 원정대 1,000여 명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였다.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가리발디와 원정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시칠리아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시칠리아의 중심도시인 팔레르모를 비롯한 시칠리아 섬 전역을 점령하였다. 8월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반도 장화 끝에 위치한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나폴리로 진격했고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군대는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거나 가리발디 편에 가담하는 등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덕분에 가리발디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9월 나폴리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2세는 북쪽의 가에타 요새로 도망쳐 가리발디에게 저항을 이어나갔다.가리발디가 나폴리로 진격할 무렵 때마침 교황령의 마르케와 움브리아에서 교황에 반대하는 소요가 발생했고 이를 빌미로 사르데냐-피에몬테는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란체스코 2세와 교황의 지원 요청에도 로마만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가리발디군과 피에몬테군의 행동을 묵인했고 덕분에 피에몬테군은 수월하게 마르케와 움브리아를 점령하고 나폴리로 남하했다.
10월 21일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실시된 주민투표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0월 26일 테아노에서 가리발디와 조우했고, 가리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했다. 한편 피에몬테군이 점령한 교황령의 마르케와 움브리아 역시 11월에 주민투표를 통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다.
가에타에서 농성하던 프란체스코 2세는 이듬해 2월까지 저항을 이어갔으나 결국 로마로 망명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13] 이로써 이탈리아는 교황 보호를 이유로 프랑스군이 진주한 로마와 아직 오스트리아가 보유 중이던 베네토를 제외하고 거의 통일되었다. 1861년 3월 17일 토리노에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이 선포되었고 초대 이탈리아 왕국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기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알베르토 헌법(Statuto Albertino)을 계승하여 국민 주권적 원칙과 입헌군주제를 융합시켰다.
또한 1865년에는 북쪽에 치우친 위치에 있는 기존 수도 토리노에서 중부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위치한 피렌체로 천도함으로써, 남북의 균형 발전을 꾀하는 동시에 아직 라치오를 장악하고 있던 교황령을 압박했다.
2.6.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게 중립을 대가로 베네토 지방 매입을 제안했으나 이탈리아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오히려 프로이센 쪽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베네토를 침공했다.이렇게 이탈리아는 기세 등등하게 오스트리아의 제안도 거절하고 베네토로 진격했지만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가 공들여 건설한 사각요새에 막히면서 졸전을 면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박살내면서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고 이탈리아는 약속받은 베네토 지방을 넘겨받아 주민투표를 치르고 1866년 10월 합병했다.
2.7. 교황령 병합: 통일 완료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인 프랑스가 본국을 방어하기 위해 교황령을 지키던 마지막 방패인 프랑스군을 로마에서 철수시키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마지막 남은 교황령을 침공하여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하였고 10월 2일 주민투표를 통해 로마 및 라치오 지방을 공식적으로 병합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 통일은 완수되었으나 교황령에 대한 강제병합은 세계 가톨릭 교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교황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이 독립할 때까지 바티칸 유수가 된다. 이렇듯 프랑스&사르데냐-피에몬테 vs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사르데냐-피에몬테 vs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사르데냐-피에몬테 vs 프랑스[14] 등 열강 하나의 지지를 얻고 다른 열강과 대결하는 외교력이 돋보였다.3. 미수복 영토
전간기 시대의 이탈리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 승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트렌티노알토아디제,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등을 편입하였으며 초록색, 보라색,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들이 바로 아직 이탈리아가 편입하지 못한 '미수복 이탈리아'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부아도 미수복 이탈리아로 보기도 한다. |
1870년 로마 입성을 끝으로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인이 사는 지역의 대부분을 통일했으나 아직 이탈리아 왕국이 통일하지 못한 이탈리아인들의 땅이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지 않고 따로 남아 있는 바티칸[15], 산마리노[16], 모나코[17]와 프랑스령인 사부아[18], 니스와 코르시카[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인 트렌티노알토아디제, 트리에스테, 고리치아,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영국의 식민지인 몰타[20], 스위스의 이탈리아어권 지역인 티치노[21] 등이 바로 그 지역들인데 이 지역들을 미수복 이탈리아(Italia irredenta, 이탈리아 이레덴타)라고 하며 미수복 이탈리아를 수복하자는 주장을 이탈리아 수복주의(Irredentismo italiano, 이레덴티스모 이탈리아노)라고 한다.[22] 미수복 이탈리아의 수복을 위해 1877년 미수복 이탈리아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이탈리아 수복주의 운동은 국가통일 운동의 흐름을 이어 받은 근대 내셔널리즘 운동의 연장선이었으나, 20세기 초부턴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결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후 트렌티노알토아디제,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의 일부인 자다르[23]를 얻고 얼마 안 가 리예카[24]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졌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이탈리아가 추축국으로 참전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이탈리아는 몰타와 티치노, 산마리노, 바티칸을 제외한 전 지역을 수복했다.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달마티아 전역을 점령해서 스플리트 등 일부는 이탈리아 영토로 합병되었고 다른 지역은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으나 크로아티아 독립국 자체가 추축국 점령지안에 세워진 괴뢰국이라 이탈리아 점령지는 이탈리아 맘대로 주무를 수 있어 사실상 이탈리아 영토나 다름없었다. 니스와 모나코, 코르시카는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당시의 이탈리아군 졸전으로 확보에 실패했으나 2번째 기회인 안톤 작전에 참여해 이후 니스를 점령하고 중립을 유지하던 모나코 역시 침공해 점령, 유명무실해진 비시 프랑스로부터 코르시카까지 추가로 뜯어내면서 확보했다. 산마리노와 바티칸은 독립국이나 영토가 매우 작은 미니 국가고 사방이 이탈리아로 둘러쌓여 있어 이탈리아 영향권 하에 있었다. 당시 산마리노의 집권당은 아예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이기도 했다. 다만 몰타는 몰타 항공전에 패배하여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고, 티치노는 스위스가 전쟁중 중립을 지켜서 진군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는 달리 이탈리아가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국이 되며 오히려 니스 인근의 텐다(Tenda)[25] 일대 계곡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유고슬라비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으로 얻어낸 이스트리아 반도를 대부분 넘겨주는 등 오히려 영토만 잃었다.
4. 부작용
이탈리아 북부는 서양의 전형적인 근대화 경로인 시민사회의 발전, 내셔널리즘 및 자유주의를 체험했다. 이탈리아 민족주의도 북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에서 소외되었던 남부는 북부만큼의 민족의식이 없었고 따라서 많은 남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의 통일은 단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주축으로 한 북부에 의해 남부가 강제 병합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민족의식이 약했던 남부 이탈리아인에게 이탈리아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느라 애를 먹었는데 통일 이후로도 남부에서 양시칠리아 왕국 왕당파와 지역 주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그 예이다.이탈리아 통일 이후 북부와 남부 사람들은 서로를 멸시했다. 북부에서는 남부 사람들을 "테로네"(terrone)[26] 즉 농사나 짓는 거지 같은 촌놈으로 멸시했으며 남부에서는 북부 사람들을 "폴렌토네"(polentone) 즉 폴렌타(polenta)[27]나 쳐먹는 무리들이라고 멸시했다. 그리고 이 남북문제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아 이탈리아 사회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28]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질 의식도 분리 의식 못지않게 커 남부문제는 민족 갈등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고[29] (교육 수준이 낮고 민족 의식이 미약했기 때문이었지만) 남부 농민들의 상당수는 통일과 분리주의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통일운동과 시칠리아 독립을 위시한 분리주의 모두 귀족과 부르주아를 위시한 지주층의 관심 분야로 농민들은 봉건제 폐지 당시 사라진 공유지 용익권 부활 혹은 토지 재분배를 주장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농민층의 반(反) 혁명 운동인 산페디스타로 인해 자유주의 파르테노페아 공화국 수립에 실패한 남부 혁명 세력은 이후 카르보나리 반란이나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정복 시 토지 문제의 원흉이 양시칠리아 왕실인 것처럼 선동하여 농민층의 지지를 얻어내나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30] 통일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다. 이후 지주층을 대변하는 통일 정부에 대한 반감, 토지 중과세와 징병제를 위시한 근대 제도의 이질감, 반동 세력의 충동질 등이 엮여 브리간타조(Brigantagio) 반란이 남부 전역에서 일어났고 신생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이를 억압적으로 진압한 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시스템을 강요해 반도 전역에 중앙집권 시스템을 확립했다.[31] 지금의 남북간 지역감정은 이러한 갈등을 겪은 후 경제격차가 벌어지면서 격화된 것에 가깝고 역사적 발전 경로 차이와 사회 구조 차이로 인한 이질감 외에 완전한 독일어권인 쥐트티롤을 제외하면 분리주의 의식이 딱히 크게 존재하지는 않는다.[32]
5. 기타
-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멸망한 모든 국가중에서 교황령을 제외한 국가들의 세습군주들은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7촌 이내의 친척 관계였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페르디난도 4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삼촌 레오폴도 2세의 아들로, 외사촌이다.
-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프란체스코 2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조모 루이사 마리아의 남동생 프란체스코 1세의 손자로, 6촌간이다.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국왕 프란츠 요제프 1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조부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의 형 프란츠 2세의 손자로, 6촌간이다.
- 파르마 공국의 공작 로베르토 1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증조부 레오폴트 2세의 딸 마리아 클레멘티나의 외손녀의 아들로, 7촌간이다.
- 모데나 레조 공국의 공작 프란체스코 5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증조부 레오폴트 2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카를의 손자로, 7촌간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외가와 처가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분가인 토스카나 대공가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다른 국가의 왕공가들도 모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와 혼맥으로 연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역사가 늘 그랬듯 국익 앞에서 혼맥은 무의미했고 결과적으로 토스카나, 모데나, 파르마, 양시칠리아의 폐위된 왕실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떠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정착해서 사망했다.[33]
- 국제적십자위원회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사업차 잠시 이탈리아 북부에 방문했던 앙리 뒤낭은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였던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이에 충격을 받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는 한편 1863년 10월 26~29일에 제네바에서 적십자 창립회의를 주도하였다. 이 공로로 그는 노벨평화상 초대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토리노의 카리냐노 궁전(Palazzo Carignano), 제노바의 마치니 박물관(Museo del Risorgimento)에서 이탈리아 통일과 관련한 역사를 전시한다.[34]
[1] 이탈리아어로 부활, 부흥이라는 뜻이며 19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847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총리 카밀로 카보우르가 창간한 신문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다.[2] 대(對) 고트 전쟁[3] 계속되는 전염병으로 인해서 동로마 제국도 혼란에 빠졌고 이탈리아 반도를 안정화시킬 힘 자체가 사라졌다.[4]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자동으로 독일왕과 이탈리아 국왕 자리를 계승하였다.[5]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은 처음부터 신성 로마 제국-중세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국가들이었다.[6] 1848년 3월 23일 ~ 1849년 8월 22일[7] 나폴레옹 3세는 젊은 시절 카르보나리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8] 사보이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통치 가문인 사보이아 왕조의 본관이었으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이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왕실의 본관까지 포기하면서까지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9] 색깔 푹시아(Fuchsia)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이름이 마젠타로 바뀌었다. 또한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이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나폴레옹 3세는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을 마장타 공작에 봉하였다.[10]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사이에 있는 페스키에라(Peschiera), 베로나(Verona), 만토바(Mantova), 레냐고(Legnago)의 4개 도시에 세워진 요새를 가리킨다. 이 4개 요새를 이은 모양이 사각형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11] 한편 솔페리노 전투는 국제적십자위원회 창설의 배경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12] 빌라프란카는 현재 프랑스 알프마리팀 빌프랑슈쉬르메르이다. 당시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영토였다.[13] 프란체스코 2세는 로마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다가 1866년 이탈리아가 베네토 지방까지 합병하면서 교황령의 멸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망명해 189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14] 이건 전쟁은 아니고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얻어터지는 틈에 교황령을 날름한 케이스다.[15] 바티칸은 국제법상 이탈리아 영토로 인정받았지만 바티칸 유수로서 교황이 제한적으로나마 자치권을 행사하던 지역이라서 강성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미수복 영토로 간주되었고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다시 독립국이 되었다. 정작 해당 조약을 체결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웬만한 민족주의자들 이상으로 애국심을 강조하는 파시스트였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이탈리아와는 별개의 나라가 되었다.[16] 주세페 가리발디가 도피 생활을 할 때 받아준 공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지 않고 독립을 인정받았다.[17]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지만 통치 가문인 그리말디 가문이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이탈리아계 가문이며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8] 오트사부아 포함[19] 사부아와 니스는 앞서 말했듯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을 돕는 대가로 프랑스 제2제국이 할양받은 지역이며 코르시카는 본래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로 이탈리아계 주민이 다수지만 18세기 말 지역 주민들의 반란에 질린 제노바 공화국이 프랑스 왕국에 매각하면서 프랑스령이 되었다.[20] 아랍어 방언에 속하는 몰타어를 사용하는 주민이 다수지만, 역사적으로 시칠리아 왕국 영토였고, 이탈리아인과 현지인의 혼혈이 오랫동안 진행되었기에 미수복 영토에 포함되었다.[21] 원래 알프스 이남에 있어 밀라노 공국의 일부였으나 스위스에 정복당하면서 편입된 지역으로 스위스 내 이탈리아어권의 대다수를 차지한다.[22] 실지회복주의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Irredentism이 여기서 유래된 단어인데, 그만큼 이탈리아 수복주의가 매우 열렬하였음을 보여준다.[23] 이탈리아명 차라(Zara).[24] 이탈리아명 피우메(Fiume). 당시 피우메 자유국이 수립되어 있었다.[25] 현 프랑스 탕드(Tende)[26] 이탈리아어 "terra"(땅)에서 유래하였다.[27] 옥수수로 만든 죽의 일종. 원래는 옥수수가 아닌 다른 곡물 가루로 만드는 죽이었다. 죽이라고는 하지만 식혀서 반죽처럼 만든 뒤 튀기거나 구워먹기도 한다.[28] 이탈리아 북부는 독일, 프랑스 급으로 잘 사는 것에 비해 남부의 경제력은 구 공산권 국가였던 헝가리, 폴란드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북부와 남부는 상호간에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이다.[29] 정치적으로 통일된 이탈리아가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이탈리아 문화권 및 같은 이탈리아 반도 지역 국가들이라는 의식은 존재했으며 이탈리아어의 근원이 된 토스카나어가 반도 전역에서 식자층과 상인들의 링구아 프랑카로 이용되었다. 가장 이질적인 남부의 양시칠리아 왕국도 공식 언어는 토스카나어였다. 지역주의가 강하고 국가 의식이 약한 건 사실이었지만 독일 통일처럼 큰 부작용 없이 통일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 정도 동질의식도 없었으면 통일운동 자체가 일어나기 힘들었다.[30] 가리발디의 부관 니노 빅시오(Nino Bixio)가 붉은 셔츠단 진군 와중에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시칠리아 브론테 지역 농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다.[31] 역사적으로는 이를 피에몬테화(Piemontesizzazione)라고 부른다.[32] 시칠리아도 약간이나마 있기는 하지만 쥐트티롤만큼 크지는 않다. 애초에 같은 이탈리아어 문화권인 데다 시칠리아는 과거부터 이탈리아 반도의 연장으로 여겨졌을 정도.[33] 마지막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만 예외적으로 비아레조에서 사망했으나 11세에 폐위당한 이후 생애 대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보냈다.[34] 세 박물관은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로마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이탈리아 역사 통사적인 관점에서, 토리노 카리냐노 궁전은 통일 이탈리아의 왕가가 되는 사보이아 가문의 관점에서, 제노바 마치니 박물관은 마치니의 공화주의 관점에서 전시한다. 그래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과 마치니 박물관은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시작하지만 토리노 카리냐노 궁전은 1706년 벌어진 토리노 공방전으로 시작한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 공자가 루이 14세의 프랑스군 침략군을 무찌르면서 이탈리아 민족주의 의식이 싹텄다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