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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바르 Vukovar | Вуковар |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국가 | 크로아티아 | ||||
주 | 부코바르스리옘주 | ||||
면적 | 100.1㎢ | ||||
인구수 | 23,175명 (2021년 기준) | ||||
인구밀도 | 230/㎢ | ||||
시간대 | UTC+1 |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1. 개요
부카 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크로아티아 최대의 강 항구가 위치해있다. 19세기 증기선이 나오면서 부코바르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 부다페스트와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루마니아 왕국)을 잇는 주요한 수입 및 수출 기지로 발전했다.2. 어원
부코바르는 부카 강에 있는 도시라는 의미이다.3. 역사
부코바르는 게르만족으로부터 로마 제국을 보호하는 요새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인들이 부코바르에 정착하면서 포도원을 조성하고 습지를 배수함으로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이 지역에 슬라브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1231년 헝가리 왕국에게 왕립 자유 도시의 지위를 받았다. 이는 헝가리 왕국의 국왕인 칼만이 이 일대의 개발을 원해서 였다. 도나우강 중간에 위치했다는 이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350개의 주태과 2,000~2,500명의 주민을 거느린 가장 큰 중세 슬라브 도시로 성장하였다.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성장해 발칸 반도로 쳐들어 오면서 부코바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다. 18세기가 되면 50채의 집만 있는 텅 빈 마을로 남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이 부코바르를 점령하고 산업 혁명이 시작되자 도나우강에도 증기선이 다니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가 부코바르를 지나가게 되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4,000명의 크로아티아인, 3,500명의 독일인, 1,600명의 세르비아인, 950명의 헝가리인을 포함하여 10,400명의 주민이 있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배하고 부코바르는 신생국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차지가 되었다. 부코바르는 시르미아 주의 행정 중심지로 신발 및 섬유 산업이 발전하였는데 이 때 생긴 회사가 현재도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신발 회사인 Borovo이다. 경제적인 발전과는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의 민족 간 긴장감은 계속해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학생은 고등학교에 권총을 들고 와 크로아티아인 급우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거나 지방 선거에서 크로아티아인이 당선되자 우스타샤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개전이 일어나자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크로아티아 지역에 자신들이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다. 크로아티아국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거나 즉결 처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독립국도 무너지고 부코바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차지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시절 부코바르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도시였다. 특히 Borovo는 22,0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잘 나가던 회사로 한 때 도시 세수입의 3분의 4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 두 차례 발생한 오일 쇼크는 유고슬라비아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고 1980년대 되면 악화된 경제 상황은 회복 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Borovo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부코바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버스와 트럭을 대절해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공화국 광장에서 시위를 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이들을 무시했고 이에 화가난 부코바르 노동자들은 유고슬라비아 의회 의사당에 강제로 들어갔다. 이들은 의장인 두샨 포포프스키, 유고슬라비아 노동조합 의장인 마르잔 오로젠을 만난 뒤 돌아갔다.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민족 감정은 악화 일로였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두 민족인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의 갈등은 다른 민족 간의 갈등보다 더 안 좋았다. 1991년 4월 1일 부코바르를 포함한 동슬라보니아의 도시에 사는 세르비아인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우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이 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쟁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독립 투표에서 무려 94%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독립에 찬성하였다. 이에 호응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의 간부인 토미슬라브 메르체프는 부코바르에 사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집과 카페를 폭파시키고 납치 및 즉결 처형을 자행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군과 민병대들은 부코바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시에 있던 크로아티아인 1,800명은 87일 동안 부코바르를 방어했지만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한 36,000명의 세르비아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로 크로아티아군과 민간인 1,800명이 사망하고 800명이 실종되고 22,000명의 민간인이 강제로 추방되었다. 부코바르 전투가 끝나자 세르비아군은 부코바르 병원에 있던 환자 및 의료진 264명을 죽이고 8,000명 이상의 민간인과 포로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하지만 서방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군을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몰아냈고 1995년 부코바르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부코바르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로 피난갔다. 하지만 도시를 구성하는 인구의 3분의 1인 세르비아계라서 도시 표지판 곳곳에 키릴 문자를 볼 수 있다.
4. 관광
- 두딕 기념 공원 (Spomen-park Dudik) : 우스타샤에 의해 학살당한 384명의 희생자 유해가 발굴된 곳에 세운 공원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이후 축구장으로 쓰였지만 세르비아인들의 항의로 다시 추모 공간으로 바뀌었다.
- 부코바르 급수탑 (Vukovarski vodotoranj) : 유고슬라비아 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부코바르 전투 당시 부코바르가 겪은 고통을 상징하는 건물로 부코바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600회 이상의 포격을 받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 엘츠 장원 (Dvorac Eltz) : 18세기 엘츠 가문이 살았던 궁전으로 현재 부코바르 시립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 성 니콜라스 교회 (Hram svetog Nikole) : 사바 강 북쪽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으로 이 건물에 세르비아 성가 협회가 들어서 있었지만 2차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 홈으로 바꾸고 건물 꼭대기에 있던 키를 문자 비문을 파괴했다.
- 시르미아 카운티 궁전 (Palača Srijemske županije) : 1773년 크로아티아 귀족인 마크 페야체비치가 세운 궁전으로 현재 시르미아 카운티의 의회와 공공 기관이 위치해 있다.
- 부체돌 고고학 박물관 (Muzej vučedolske kulture) : 기원전 3,000년 경에서 2,200년 경까지 존재한 선사시대 문화인 부체돌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부체돌 비둘기라 불리는 작은 도자기 조각상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