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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0대 국왕 칼만 Kálmán | |
출생 | 1070년경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사망 | 1116년 2월 3일 (향년 45~46세)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재위 | 헝가리 왕국의 왕 |
1095년 ~ 1116년 2월 3일 | |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 |
1097년 ~ 1116년 2월 3일 | |
배우자 | 시칠리아의 펠리시아 (1097년 결혼 / 1110년 사망) |
키예프의 에우페미아 (1112년 결혼) | |
자녀 | 소피아, 이슈트반 2세, 라슬로, 보리스?[1] |
아버지 | 게저 1세 |
어머니 | 소피아 |
형제 | 알모스 |
[clearfix]
1. 개요
헝가리 왕국 제10대 국왕. 크로아트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며 헝가리 주변 영토를 향한 정복 전쟁을 단행했다.2. 생애
1070년경 헝가리 왕국의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게저 1세와 소피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알모스가 있었다. 1077년 4월 25일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와 알모스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숙부인 라슬로 1세가 헝가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알모스가 라슬로 1세의 중용을 받고 크로아트 왕국의 영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데 비해, 그는 일찌감치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성직 활동을 하면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라틴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습득했다. 1096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그의 교회법 숙달 능력을 칭찬했다. 그렇게 학업을 마친 뒤 사제가 되었고, 1090년대 초에 주교가 되었다. 15세기의 헝가리 연대기는 그가 에게르 또는 바러드의 주교가 되었다고 기술했다.1095년 라슬로 1세는 누이 에우페미아와 두 조카 스바토플루크 2세, 오타 2세가 보헤미아 공국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을 돕기 위해 보헤미아로 진군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중병에 걸렸고, 그해 7월 29일 헝가리-보헤이마 국경 근처 마을인 니트러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1090년경 볼히니아 공작 스뱌토폴크 2세의 아들인 이아로슬라프 스뱌토폴치히와 결혼한 성명 미상의 딸과 피로슈커를 두었을 뿐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게저 1세의 두 아들인 칼만과 알모스 중 한 사람이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했다. 라슬로 1세는 이중 알모스를 새 왕으로 지명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숙청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폴란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으로부터 병력을 빌려 헝가리로 진격했다. 알모스는 형과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형에게 왕관을 바쳤다. 1096년 초, 칼만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허락을 받아 성직에서 면직되고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별다른 저항없이 왕위를 넘긴 동생에게 보답하고자 할아버지 벨러 1세가 과거에 통치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영지인 두카투스를 자율적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대관식 직후, 그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 왕국을 통과하면서 야기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헝가리인은 그동안 서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 음식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숫자가 수만 명에 달한 데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발터가 지휘한 첫 번째 십자군은 1096년 5월 초 헝가리 국경에 도착했다. 칼만은 이들에게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발터의 십자군은 별다른 충돌없이 헝가리를 통과했다. 다만 헝가리-동로마 국경 인근의 셈린 마을에서 '나쁜 의도를 가진' 헝가리인이 16명의 십자군들을 공격해 갑옷과 무기, 돈을 탈취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1096년 5월 말 또는 6월 초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2만 명이 도착했을 때 사달이 났다. 이들은 헝가리를 통과하면서 제물을 약탈하다가 셈린 마을에서 폭동을 일으켜 4,000명에 달하는 헝가리인을 학살한 뒤 헝가리군의 보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동로마 제국군을 죽이고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했다. 이후 3번째 십자군 부대가 니트러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약탈하다 현지인들에게 쫓겨났다.
4번째 십자군 부대는 6월 중순에 모손에 도착했다. 칼만은 다른 부대가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했는데, 이들이 식량과 포도주를 얻기 위해 인근 정착촌을 자주 기습하여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데다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죽이기까지 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부관을 십자군에 보내 식량을 공급하며 동로마 제국으로 보내줄 테니 무장을 해제하라고 권했다. 십자군이 이를 믿고 무기를 반납하자, 헝가리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동로마 제국으로 이송하는 척했다가 7월 초 펀논헐머 인근에서 전원 학살했다.
1096년 7월 중순, 플론헤임의 에미코 백작이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로 진입하려 했다. 칼만은 이들의 입국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에미코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선을 뚫고 모손을 포위 공격했다. 십자군이 투석기를 활용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8월 15일 성벽이 두 지점에서 허물어지면서 십자군이 요새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공황 상태에 빠졌고, 모손 수비대가 그 틈에 출격하여 십자군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대다수 십자군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에미코는 소수의 추종자만 거느린 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아났다.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에미코의 패배는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이 내린 천벌로 여겼다.
1096년 9월, 교황령이 조직한 최초의 십자군 부대가 헝가리 국경에 도착했다. 이들의 지휘관인 하(下) 로트링겐[2]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칼만에게 기사를 보내 십자군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칼만은 고심 끝에 8일만에 인질을 내준다면 헝가리를 통과하게 해주겠다고 답했다. 십자군은 도나우 강 우안을 따라 평화롭게 행군했고, 칼만과 그의 군대는 왼쪽 둑을 따라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고드프루아의 군대가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인 사바강을 건넌 후에야 인질들을 풀어줬다.
이리하여 십자군 문제를 해결한 뒤, 칼만은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 착수했다. 1097년, 그는 지난날 선대 왕 라슬로 1세 대에 헝가리 왕국에 일부 병합되었지만 여전히 헝가리에 복종하지 않는 크로아트 왕국을 침공했다. 페타르 스나치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인은 카펠라 산맥에서 항전했지만 그보즈드 산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나치치는 전사했다. 헝가리군은 아드리아 해에 도달하여 중요한 항구 거점인 비오그라드나모루를 점령했다.
헝가리군의 위협을 받은 트로기르, 스플리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베네치아 도제 비탈레 2세 미켈레가 이끄는 해군이 함대를 이끌고 달마티아에 접근했다. 베네치아의 원군이 당도하자 함대가 따로 없었던 칼만은 도제에게 협상을 요청했고 협상 결과, 헝가리가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을 가지는 대신 달마티아 섬들은 베네치아가 갖기로 했다.
칼만이 크로아트 왕국을 침공하고 왕을 자처하던 사이, 알모스는 그가 부재한 틈을 타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본국으로 귀환한 뒤 1098년 동생이 다스리고 있던 두카투스를 향해 진격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벌어지는 듯 했지만, 양군 지휘관들이 동족끼리 싸우기를 원하지 않아 두 사람에게 화해할 것을 강권하면서, "그렇게 싸움이 좋다면 결투를 해라. 우리는 이기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겠다."고 밝혔다. 이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화해하기로 했다.
1099년,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폴크 2세가 아들 야로슬라프를 헝가리로 보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공작 토벌에 힘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칼만은 군대를 이끌고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반란 지도자인 볼로다르 로스티슬라비치의 성인 페레미실을 포위했다. 이에 볼로다르의 동맹인 다비트 이고레비치는 쿠만인들을 설득해 헝가리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헝가리군은 쿠만인의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참패했고, 칼만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칼만은 보헤미아 공작 브레슬라프 2세의 맹공을 받고 있는 모라바 변경백이자 아르파드 왕조의 친척인[3] 스바토플루크와 오토 2세를 돕기 위해 달려가서 두 사람을 구원했다.
1100년, 칼만은 전임자들의 칙령을 재검토해 라슬로 1세의 법전을 현실에 맞게 개정한 새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스트릭스(strix: 아기의 배를 갈라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알려진 전설의 새)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새를 잡으려 했다가 애꿎은 짐승을 잡을 수 있다"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헝가리 노예와 말의 수출을 금지했고, 경제 활동의 다양한 측면에 규제를 가했다.
1102년, 그는 알바 마리티마에서 크로아티아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헝가리 국왕은 1918년까지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을 겸하였다. 1104년 또는 1105년,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보에몽 1세의 디라히온 침공에 대처하던 중, 보에몽이 칼만과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하고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안니스 2세와 칼만의 사촌인 피로슈커의 결혼을 주선했다. 마침 칼만 역시 세력 확장에 공을 들이는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과 공연히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서 남부 전선을 안정시킨 뒤, 칼만은 1105년 달마티아를 침공하여 트로기르를 포위 공격했다. 트로기르 시는 몇 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칼만에게 복종했다. 뒤이어 포위된 스플리트 시 역시 곧 항복했으며, 다른 달마티아 도시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1105년, 칼만은 4살된 아들 이슈트반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동생 알모스가 헝가리를 떠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의 반란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상황이라 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알모스는 1106년 폴란드의 군주 볼레스와프 3세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응해 헝가리로 쳐들어가 아바우이바르(Abaújvár)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칼만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폴란드군과 대치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군이 생각보다 강력한 걸 확인하고 전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칼만과 볼레스와프 3세는 서로 만나서 담화를 나눈 끝에 영원한 우정을 맺고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의했고, 알모스는 어쩔 수 없이 칼만에게 복종했다.
1106년 10월, 칼만은 교황 파스칼 2세가 소집한 과스탈라 공의회에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헝가리 왕이 자신의 영토에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특권을 사임했음을 알렸다. 교황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칼만의 달마티아 정복을 승인했다. 이후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뉴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볼레스와프 3세를 지원하여 즈비그뉴를 폴란드에서 축출하는 데 일조했다. 1107년 10월에는 보에몽과 싸우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며, 1108년 보에몽이 알렉시오스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안티오키아의 통치권을 황제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의 데볼 조약을 체결했을 때 증인으로 참석했다.
1107년 또는 1108년, 알모스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칼만은 동생이 부재한 틈을 타 두카투스를 몰수했다. 이리하여 헝가리 전역이 칼만의 통치하에 돌아갔다. 성지에서 귀환한 알모스는 도모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칼만은 수도원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한 고발자로부터 알모스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고변을 받자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헝가리의 주교들과 여러 고위 인사들이 알모스를 변호했고, 칼만은 알모스와 손을 맞잡고 화해했다. 그러나 형이 언젠가 자신을 제거할 거라 확신한 알모스는 하인리히 5세를 찾아가 파사우에서 접견한 후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5세는 그의 요청을 수락해 1108년 9월 헝가리를 침공해 포조니를 포위했다. 이에 칼만과 동맹을 맺은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가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하인리히 5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하기로 했다. 다만 칼만에게 알모스를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신성 로마 제국을 적대하고 싶지 않았던 칼만은 알모스가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칼만은 달마티아를 순방하며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의 특권을 인정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113년, 그동안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섰던 동생 즈비그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가 형제를 해친 것을 속죄하고자 헝가리의 소모기바르 수도원을 순례했다. 칼만은 소모기바르에서 폴란드 군주를 정성껏 영접했다. 얼마 후, 그는 알모스가 또다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여긴 칼만은 알모스와 알모스의 어린 아들 벨러를 실명시키고 그의 추종자들을 신체 절단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일루미네이티드 연대기의 한 사본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벨러를 거세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집행인이 차마 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없어서 개를 거세한 뒤 그 고환을 왕에게 가져왔다고 한다.
그 후 칼만은 뇌염으로 추정되는 질환에 시달리다가 1116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헝가리인은 이에 대해 형제와 조카를 잔혹하게 해친 일로 천벌을 받았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칼만은 1097년 시칠리아 백작 루지에로 1세의 딸 펠리시아와 결혼하여 소피아, 이슈트반 2세, 라슬로를 낳았다. 펠리시아가 1110년에 사망한 뒤, 칼만은 1112년 페레야슬라블 공국의 공작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딸 에우페미아와 재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1113년 또는 1114년 간통 혐의로 고발된 뒤 이혼당했고, 키이우로 도망친 후 아들 보리스를 낳았다. 그녀는 이 아이가 칼만의 자식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르파드 왕조는 이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칼만이 1116년에 사망한 후, 이슈트반 2세가 헝가리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