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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20:15:57

벨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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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2대 국왕
벨러 2세
II. Béla
파일:Bela_II_KK2.jpg
출생 1109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141년 2월 13일 (향년 32세)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1131년 ~ 1141년 2월 13일
배우자 세르비아의 엘레니
(1029년 결혼)
아버지 알모스
어머니 키예프의 프레슬라바
누이 아델라이데, 소피아
자녀 게저 2세, 라슬로 2세, 이슈트반 4세, 알모스, 소피아, 엘리자베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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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제12대 국왕. 맹인이었기 때문에 아내 세르비아의 엘레니가 전권을 행사했다.

2. 생애

1109년경 게저 1세의 아들 알모스와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의 딸인 프레슬라바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아델라이데와 소피아가 있었다. 아버지 알모스는 게저 1세 사후 헝가리 왕위에 오른 형 칼만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후 형에게 용서받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1115년에 또다시 반역 음모를 꾀하다 발각되자, 칼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보고 알모스와 벨러 부자를 실명시키라고 명령했다.

그 후 도모스 수도원에 조용히 지내던 알모스 부자는 1120년대 중반에 탈출했다. 알모스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지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페치바러드(Pécsvárad) 수도원에 남겨졌다. 1128년 또는 1129년, 칼만의 아들이자 당시 헝가리 국왕이었던 이슈트반 2세는 벨러가 페치바러드 수도원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는 즉시 벨러를 데려와서 화해한 뒤 토리나에 정착시킨 뒤 왕족에 적합한 대우를 받게 했다. 이에 벨러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접으면서, 헝가리의 혼란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슈트반 2세는 벨러를 세르비아 공작 우로시 1세의 딸인 엘레니와 결혼시켰다. 이에 대해 중세의 여러 연대기는 자녀가 없었던 이슈트반 2세가 벨러를 후계자로 삼기로 정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그가 누이 소피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사울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한다. 1131년 3월 1일 이슈트반 2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국왕은 2달이 지나도록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1131년 4월 28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펠리키안의 주도로 벨러가 '벨러 2세'로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로 볼 때 사울과 벨러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벌어진 끝에 벨러가 승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한 후, 헝가리 정계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과거에 그를 추종했던 이들은 지위를 얻었지만, 칼만과 이슈트반 2세를 지지했던 영주들은 권력에서 쫓겨났다. 특히 그를 실명시키는 데 관여한 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엘레니 왕비가 모든 재판과 집행을 주관했고 68명에 달하는 귀족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편, 칼만의 사생아 보리스는 이슈트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해외에 망명했다. 그러다가 실명한 벨러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왕위를 빼앗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폴란드로 가서 볼레스와프 3세의 지원을 받았다. 벨러는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변경백과 군사 동맹을 맺고,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리스는 칼만의 아들이 아니니 다들 사칭범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1132년 7월 22일, 사요 강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보리스와 볼레스와프 3세의 폴란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보리스는 폴란드로 달아났고, 벨러 2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헝가리 왕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벨러는 여세를 몰아 폴란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보헤미아의 소조슬라프 1세,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와 손을 잡고 폴란드 공격을 획책했다. 여기에 1136년 중앙 달마티아를 헝가리의 지배에 복속시켰고, 1137년경 네레트바 강의 지류인 라마 강 계곡을 공략하고 자신의 칭호에 '라마의 왕'을 추가했다. 또한 1139년 키예프 대공 야로폴크 2세가 브세볼로드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지원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관계를 개전하기 위해 1139년 6월에 자신의 딸 소피아와 새로운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약혼을 주선했지만 무산되었다.

벨러 2세는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와 맞서고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해, 이에 대한 보답으로 헝가리의 교회들을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용인받았다. 그는 국내 교회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교회에 많은 기부금을 냈다. 1137년 화재로 소실된 펀논헐머의 수도원은 그의 지원에 힘입어 재건되었다. 하지만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장애로 인해 국왕으로서 통치하기 힘들어 했고, 엘레니 왕비가 왕을 대리해 통치를 행사했다.

1141년 2월 13일에 사망했고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엘레니 왕비와의 사이에서 게저 2세, 라슬로 2세, 이슈트반 4세, 알모스, 소피아, 엘리자베트를 두었다. 그가 사망한 후 장남 게저 2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