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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06:41

서포여이 야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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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동헝가리 왕국 초대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
Szapolyai János
파일:서포여이 야노시.jpg
출생 1487년 2월 2일
헝가리 왕국 세페슈바러여[1]
사망 1540년 7월 17일 (향년 53세)
동헝가리 왕국 사스셰베시[2]
재위 동헝가리 왕국의 왕
1526년 11월 10일 ~ 1540년 7월 17일
배우자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1539년 결혼)
자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아버지 서포여이 이슈트반
어머니 테센의 헤드비히
형제 죄르지, 바르바라, 크리스티나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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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헝가리 왕국 초대 국왕. 헝가리 국왕을 자처한 합스부르크 가문페르디난트 1세대립왕이었다.

2. 생애

1487년 2월 2일 헝가리 왕국 세페슈바러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서포여이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과 동군연합이었던 크로아티아 왕국 포제가(Požega)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서포여이 가문의 일원으로, 1492년에서 1499년 사이에 헝가리 궁정백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테센의 헤드비히로, 테센 프르제미슬라프 공과 마조프셰의 안나의 딸이다. 형제로 죄르지[3], 바르바라[4], 크리스티나[5]가 있었다.

1505년 10월, 왕실 판관이자 궁정백 베르보치 이슈트반(Werbőczy István 1458~1541)은 라코시 평원에서 기사단 의회를 소집한 뒤 헝가리 왕국이 최근에 재난을 겪은 이유는 튀르크인보다 헝가리인을 더욱 잔인하게 억압하고 영토 상실을 막지 못한 외국 출신의 왕 때문이며, 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가 합법적인 결혼에서 태어난 남성 상속인 없이 사망할 경우 외국 통치자를 더 이상 선출하지 않고 "헝가리 태생"만 선출한다고 규정하는 라코시 법령(Rákosi végzés)을 발표했다. 그는 이 의회에 참석했고, 라코시 법령이 통과된 후 결성된 헝가리 귀족 정당의 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라코시 법령은 울라슬로 2세 및 헝가리 의회의 인가를 받지 못했기에 정식 칙령이 되지 못했다.

1510년부터 에르데이 총독을 역임했으며, 1513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 영토 일부를 탈환했다. 1514년 농민 봉기를 일으킨 도자 죄르지를 상대로 테메슈바르 인근에서 섬멸했다. 그 후 그는 도자 죄르지에게 "농민 왕"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머리에 뜨겁게 달군 철 '왕관'을 씌웠고, 역시 뜨겁게 달군 철 '왕좌'에 앉힌 뒤 끔찍한 고통을 안기지만 쉽게 죽지 못하는 고문을 가해 서서히 죽어가게 했다. 그 외에도 봉기 지도자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고 농민들을 학살했다. 한편 기면증에 시달리는 울라슬로 2세를 대신해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와 함께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정을 주도했다. 1515년 4월 바토리 이슈트반, 페레니 임레, 팍시 미하이와 함께 난도르페헤르바르 인근의 오스만 제국 요새인 주르노프를 포위 공격했지만, 스메데레보의 통치자 하딤 시난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격파되었다.

1516년 3월 13일 울라슬로 2세가 사망한 후, 아직 10살이 채 되지 않은 새 국왕 러요시 2세를 대신해 에스테르곰 대주교 버코츠 터마시, 궁정백 페레니 임레, 재상 서트마르 죄르지와 함께 섭정을 맡았으며, 왕국 행정관을 역임했다. 섭정들은 왕실의 수입을 낭비했으며, 에스테르곰 대주교 버코츠 터마시가 사망한 뒤 에스테르곰 대주교에 자기 친척을 세우려 하면서 바토리 추기경, 베르베츠 추기경과 대립했다. 이로 인해 국정 혼란은 더욱 심해졌고, 각지의 대귀족들은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여기에 군대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방치되었고 병사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1522년 4월,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5세가 서포여이 야노시가 관장하는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다. 그는 라두 5세에게 에르데이 분견대를 지원하여 라두 5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걸 도와줬다. 1526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소집한 뒤 모하치를 향해 출발했지만, 모하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투에 참석하려 했지만 러요시 2세의 모순된 명령으로 인해 전투에 미처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의도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 지지자들은 그가 1526년 이전부터 쉴레이만 1세와 접촉했으며, 헝가리 국왕보다는 에르데이를 독립 국가로 삼고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기를 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주장의 신빙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1526년 8월 29일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와 귀족 28명, 헝가리 추기경 및 주교 7명 등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전사한 뒤, 서포여이는 헝가리 각지를 파괴하는 오스만 제국군에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그 후 토커이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추종자들을 이끌고 11월 1일 부다에 입성했다. 11월 10일 세케슈페헤르바르 의회는 그를 왕으로 선출했고, 11월 11일 헝가리 국왕 대관식니트러의 주교 포드머니츠키 이슈트반에 의해 거행되었다. 헝가리 법에 따르면, 왕이 부재한 경우 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는 이는 궁정백이었다. 그러나 당시 궁정백이었던 바토리 이슈트반은 그와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그는 바토리 이슈트반을 배제한 채 의회를 소집하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 달 후, 바토리 이슈트반은 헝가리 대귀족 13명과 헝가리 대주교 및 추기경들을 포조니로 소집하여 의회를 개최했다. 그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궁정백 없이 왕을 선출하는 의회를 소집한 뒤 즉위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니 적법한 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전임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체결한 협약[6]에 따라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의회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1526년 12월 16일 포조니에서 열린 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이에 맞서 1505년 10월 외국 출신 인물은 헝가리 국왕이 될 수 없다는 라코시 법령이 반포되었기에 자신이 유일한 헝가리 국왕이라고 주장했다. 헝가리 하급 귀족 대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했고, 헝가리 대귀족들은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방대한 사적 재산, 하급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토대로 헝가리 전역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한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유럽 각지로 파견해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오직 합스부르크 가문에 악감정을 품었던 프랑스 왕국의 국왕 프랑수아 1세만 호응했다. 1527년 초, 세르비아인 용병대장 요반 네다드(Јован Ненад 1492~1527)가 이끄는 용병대 600명이 남부 판노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세르비아인, 블라흐인 등을 끌어모으면서 병력 규모를 15,000명으로 급속도로 증강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요반 네다드의 군세를 과소평가하여 차키 라슬로에게 기사 300명을 보내 토벌하게 했지만, 차키 라슬로는 그해 4월 초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생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이후 요반 네다드의 위세는 절정에 이르렀고, 본인을 황제라고 칭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다시 에르데이 보이보드인 페레니 페테르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지만, 4월 말 티서강 유역의 치게르쇨뢰시(Csigérszőllős) 인근에서 패배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에르데이와 상 헝가리의 병력을 대거 파견했고, 1527년 7월 25일 세게드 인근 소드펄버(Szódfalva) 전투에서 반란군 8,0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요반 네다드는 페르디난트 1세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토르뇨시 마을에서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수급은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전달되었다.

서포여이 야노시가 요반 네다드의 반란 수습에 힘을 쏟던 1527년 7월, 페르디난트 1세가 독일 용병대를 헝가리로 파견해 부다를 순조롭게 접수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반란을 진압한 후 즉시 합스부르크군을 격퇴하려 했지만, 9월 27일 타르칼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 후 페르디난트 1세는 1527년 11월 3일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서 헝가리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528년, 서포여이 야노시는 합스부르크군의 공세를 피해 폴란드 왕국으로 피신한 뒤 폴란드 대원수 얀 아모르 타르노프스키(Jan Tarnowski 1488~1561)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군주들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기댈 곳은 오스만 제국 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1529년 제로모시 라스키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오스만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옹립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봉신이 되어서 공물을 매년 바치라고 권고했다. 서포여이 야노시가 이에 동의하자, 쉴레이만 1세는 1529년 5월 10일 대군을 일으켜 헝가리로 출진했고, 8월 18일 모하치 인근에 숙영지를 세웠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즉각 오스만 제국군 숙영지로 가서 쉴레이만 1세에게 복종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은 9월 3일 부더를 포위해 며칠 만에 공략했고, 여세를 이어가 헝가리 전역을 수복하고 합스부르크군을 축출했다. 쉴레이만 1세는 내친 김에 제1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간의 전쟁이 쭉 이어졌고, 서포여이 야노시는 봉신으로서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 참여했다.

1538년 2월 24일, 바러드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왕국의 2/3에 달하는 동쪽 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의 통치를 받기로 했고,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서쪽 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의 지배를 받기로 했다. 또한 당시 아들이 없었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하면, 그에게 속했던 영토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서포여이 야노시가 차후에 적법한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헝가리 왕관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그 대신 금전적 보상, 왕자의 칭호 및 스피슈(Spiš)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기로 했다. 이 협약은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기에, 양자는 비밀을 엄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포여이 야노시는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를 원했고, 1539년 3월 2일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의 딸인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결혼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디난트 1세는 쉴레이만 1세에게 바러드 조약 내용을 알리기 위해 개인 고문인 히에로니무스 라스키를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쉴레이만 1세가 바러드 조약의 내용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원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1540년 7월 7일, 서포여이 야노시는 이자벨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낳았다. 그러나 열흘 후인 7월 17일에 심장마비에 걸려 급사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재무관 프라테르 죄르지[7]에게 바러드 조약을 따르지 말고 아들을 헝가리 왕위에 세운 뒤 섭정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왕의 유언을 집행하기로 했고, 갓난아기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동헝가리 왕국 제2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1]슬로바키아 스피슈스케 포드흐라디에[2]루마니아 세베슈[3] 1494 ~ 1526,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했다.[4] 1495 ~ 1515,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지그문트 1세의 첫번째 왕비.[5] 1480년대 ~ 1526, 호모나이 야노시의 부인.[6] 울라슬로 2세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를 점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7] Fráter György, 죄르지 형제. 본명은 우체셰니치 유라이(Utješenić Jura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