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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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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동헝가리 왕국 2대 국왕
트란실바니아 공국 초대 공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Szapolyai János Zsigmond
파일: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jpg
출생 1540년 7월 7일
동헝가리 왕국 부더
사망 1571년 3월 14일 (향년 30세)
에르데이 공국 줄러페헤르바르
재위 동헝가리 왕국 국왕 (1차)
1540년 9월 13일 ~ 1551년 7월 19일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작
1551년 ~ 1556년
동헝가리 왕국 국왕 (2차)
1556년 11월 25일 ~ 1570년 8월 16일
에르데이 공국의 공
1570년 ~ 1571년
아버지 서포여이 야노시
어머니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종교 가톨릭루터교회칼뱅교회유니테리언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헝가리 왕국 2대 국왕, 에르데이 초대 .

2. 생애

1540년 7월 7일, 동헝가리 왕국 초대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지그문트 1세의 장녀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서포여이 야노시는 그가 태어난 지 열흘 후인 7월 17일에 사망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1538년 2월 24일 독일왕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크로아티아 왕국 국왕이며, 헝가리 국왕을 자처한 페르디난트 1세바러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왕국의 2/3에 달하는 동쪽 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의 통치를 받기로 했고,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서쪽 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의 지배를 받기로 했다. 또한 당시 아들이 없었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하면, 그에게 속했던 영토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서포여이 야노시가 차후에 적법한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헝가리 왕관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그 대신 금전적 보상, 왕자의 칭호 및 스피슈(Spiš)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아들이 생긴 이상 자신의 왕조를 건설하기로 마음먹고, 재무관인 프라테르 죄르지[1]에게 바러드 조약을 따르지 말고 아들을 헝가리 왕위에 세운 뒤 섭정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한 직후 부더로 서둘러 가서 국정을 장악했다. 이후 1540년 9월 13일 의회를 소집한 뒤 서포여이 야노시의 유언장을 낭독했고, 헝가리 의회는 유언에 따라 갓난아기였던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또한 의회는 어머니 이자벨라, 프라테르 죄르지, 그리고 2명의 헝가리 대귀족 페트로비치 페테르, 퇴레 발린트를 유아 군주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얼마 후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사절이 부더에 도착한 뒤 바러드 조약을 준수하여 서포여이 야노시의 영토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고, 이자벨라의 어린 자식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군주로 앉혀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이자벨라 등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한편,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상 헝가리에서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레니 페테르와 크로아티아인 컬로처 대주교 프라뇨 프랑코판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귀순했고, 에르데이 보이보드 마즐라트 이슈트반 역시 페르디난트 1세 지지를 천명하면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지자들을 대거 축출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1세의 또다른 사절인 히에로니무스 라스키는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바러드 조약 내용을 알리면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전역을 차지하는 걸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라스키를 체포했다.

1540년 10월,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제국군이 헝가리 전역을 휩쓸자 프라테르 죄르지와 이자벨라는 쉴레이만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그해 6월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일으켜 헝가리로 진군했다. 에르데이 의회는 오스만 제국군의 압력에 굴복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41년 8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 퇴레 발린트를 포함한 헝가리 대귀족 6명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함께 파디샤의 진영으로 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구금되었고, 예니체리가 부더에 입성했다. 쉴레이만 1세는 어린 아이를 헝가리 왕위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하고,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오스만 헝가리라는 이름의 직할지로 삼고 티서강 동쪽의 영토만 매년 10,000 플로린의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1541년 9월 5일,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어린 왕과 함께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 중심지인 리퍼(Lippa 현 루마니아 리포바)로 이동했다. 그해 10월 18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추종자들은 쉴레이만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고 서약했다.

1541년 12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현 루마니아 길라우)에서 페르디난트 1세의 사절인 카스파르 세레디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페르디난트 1세가 부더를 탈환할 경우 헝가리의 주권이 페르디난트 1세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이후 프라테르 죄르지는 동헝가리 왕국에 속한 귀족들에게 페르디난트 1세와 협력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에르데이 의회는 1542년 12월 20일 줄러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 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1543년 2월, 에르데이 의회는 이자벨라가 프라테르 죄르지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후에도 국가 행정과 재정을 통제하면서, 이자벨라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1543년 6월, 루터교회를 받아들인 크론슈타트의 작센인 성직자들이 줄러페헤르바르로 찾아와 가톨릭 사제들과 토론을 벌였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해 종교재판에 세우고 싶어했지만,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1544년 4월, 투르다 의회는 여행자들이 방문한 정착지의 종교 관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1545년 데브레첸 의회를 주재해 누구도 자신의 소유지에 루터교인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도록 했고, 같은 해 투르다 의회를 재소집해 "아무도 어떤 종교적 혁신도 도입해서는 안 되며, 사제와 수도자의 직업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하게 했다. 헝가리 종교개혁가 헬터이 가슈파르가 성경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하자, 프라테르 죄르지는 성경은 오직 라틴어만 쓰여야 한다고 못박고 그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교황청은 그런 그의 노고를 인정해 1551년 10월 12일 그를 헝가리 추기경으로 승격했고, 동시에 에스테르곰 대주교로 선임했다.

1544년 8월 에르데이 의회에서 프라테르 죄르지가 대법원장이 되었고, 이전에 페르디난트 1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던 5개 백작령(베레그, 샤볼치, 서트마르, 웅그바르, 젬플렌)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46년 초, 오스만 제국이 베체와 베치스케레그 요새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여기에 154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체결한 에디르데 평화 협정에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지 일부를 빼앗을 의도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1548년 페르디난트 1세와 헝가리 통합에 대해 협상을 재개했다. 1549년 9월 8일, 니르바토르에서 양자간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페르디난트 1세가 보유한 보헤미아 왕국 산하의 오폴리와 라치보르시(현 폴란드 라치부시) 공국을 받고 10만 플로린을 별도로 받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아들의 퇴위를 거부하고 줄러페헤르바르에 남았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자신과 아들의 지위를 지키기로 하고,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지배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550년 9월,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이자벨라를 포위한 뒤 강한 압력을 가한 끝에 1550년 10월 13일에 항복하고 평화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뒤이어 1550년 12월 몰다비아 공국과 튀르크 분견대의 헝가리 침공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페르디난트 1세와 협상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자마자 서둘러 의회를 소집한 뒤, 프라테르 죄르지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아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돌아와 군대를 소집하였다. 의회는 곧 해산되었고, 이자벨라는 강한 압력에 시달렸다. 1551년 5월, 이자벨라는 추종자인 파토치 페렌츠 등에게 군대를 일으켜서 자신을 구출하게 했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를 추종하는 군대가 이들을 물리쳤다. 결국 1551년 7월 19일, 이자벨라는 강요에 못 이겨 아들의 왕위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기고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 및 140,000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이틀 후, 이자벨라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페르디난트 1세가 선임한 헝가리 총독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에게 넘겼다. 에르데이 의회는 7월 26일 그들의 퇴위를 인정하고 페르디난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51년 8월 6일,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는 에르데이를 떠나 커셔에 정착했고, 1552년 3월 오폴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좋지 못한 사정 탓에 수년간 외가인 크라쿠프, 바르샤바, 사노크 등 폴란드의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그러는 사이, 동헝가리 왕국의 사정은 지극히 불안정했다. 1551년 말,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과 공모하고 있다고 의심한 끝에 그를 죽여버렸다. 이에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귀순했고, 오스만 제국은 1552년 여름 바나트 저지대를 점령했다. 1553년 9월 세케이푈드 주민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강경 진압되었다. 1554년 4월,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서포여이를 지지하는 페테르 페트로비치가 바나트의 2개 요새를 장악하는 걸 허용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도 이자벨라에게 헝가리로 돌아가라고 촉구했고, 자기 딸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556년 3월 12일, 사스셰베시(Szászsebes)에서 소집된 에르데이 의회는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기로 결의하고, 이자벨라의 추종자였던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왕의 부총리로 선출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지지자들과 서포여이 지지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데,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의 지원을 받은 서포여이 지지자들은 신속하게 에르데이 전역을 장악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귀환을 지지하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에르데이를 포기했다.

그 후 에르데이 의회 사절단이 6월 1일 폴란드로 파견되었고, 10월 22일 콜로즈바르에서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알현했다. 의회는 이자벨라가 아직 미성년이던 아들을 대신해 5년간 섭정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몇달 동안 에르데이 외부의 여러 카운티(이바우치, 비하르, 괴뫼르 등)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통치를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아들과 함께 동헝가리 왕국으로 귀환한 이자벨라는 관대한 종교 정책을 채택하여 파르티움(Partium)[2]과 콜로즈바르에서 칼뱅교회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토커이(1556년 말), 후스트(1557년 1월), 바러드(1557년 5월)을 탈환했다.

155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친정을 시작했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딸과 결혼하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역시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를 거부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1561년 12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다스리는 영역에서 가장 부유한 영주 중 한 사람인 멜치오르 벌러셔(Melchior Balaša)가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귀순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이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켰지만, 1562년 3월 4일 허더드(현 루마니아 호도드)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세케이푈드 주민들은 발러셔의 선동에 힘입어 세금 면제 등 특권을 회복하고자 봉기했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파견한 토벌대는 5월에 세케이푈드 봉기를 진압했고, 주동자들은 꼬챙이에 꿰뚫리거나 사지가 절단되었다. 이후 에르데이 의회는 평민을 배심원으로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세케이인의 특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률을 채택했다. 그러나 벌러셔를 토벌하는 데 실패한 뒤, 에르데이 외부의 도시 대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섰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2년 7월 페르디난트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국왕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을 테니 도시들의 주권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1562년 말, 에르데이 의회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돌아선 도시들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에르데이군은 서트마르, 허더드, 너지바녀(현 루마니아 바이아마레)를 점령했지만, 호엔란츠베르크 남작 라자루스 폰 슈벤디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1564년 7월 25일 페르디난트 1세가 붕어했고, 맏아들 막시밀리안 2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막시밀리안 2세의 사절은 1565년 3월 13일 서트마르에서 조약을 체결하였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에르데이에서 세습 통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헝가리 국왕 칭호를 포기하는 대신 막시밀리안 2세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요하나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강한 압력에 직면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5년 4월 21일 서트마르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테메슈바르의 통치자인 하산 파샤가 에르데이군과 연합하여 에르되드(현 루마니아 아르두드), 너지바녀, 서트마르를 탈환했다.

1566년 여름, 쉴레이만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강에 인접한 지모니(Zimony 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문 구)에 이르렀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에르데이 영주 400명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 진영으로 서둘러 달려가서 쉴레이만 1세 앞에 엎드렸고, 쉴레이만 1세는 그를 세습 통치자로 인정했다. 오스만 연대기 작가 무스타파 셀라니키는 쉴레이만 1세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기술했다. 이후 그는 쉴레이만 1세와 함께 상 헝가리를 침공했지만, 그해 9월 6일 시게트바르 요새 공방전 도중에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자 오스만 제국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지시에 따라 에르데이로 돌아갔다. 1568년 2월, 에디르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때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지난 몇년간 막시밀리안 2세로부터 빼앗았던 모든 영토를 유지했다.

한편,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종교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560년 1월 메드제시(Medgyes 현 루마니아 메디아슈)에서 루터교회와 칼뱅교회 사제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도록 했다. 이후 종교 개혁가들의 교리를 유심히 살핀 끝에, 1562년 말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1564년 4월 궁정 의사이며 삼위일체론 반대자로서 루터교회나 칼뱅교회의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던 조르조 비안드라타에게 루터교회와 칼뱅교회 성직자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공의회를 이끌도록 했지만, 공의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1564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다시 칼뱅교회로 개종하고 페렌츠 다비드를 에르데이 통일교회의 주교이자 궁정 설교자로 삼았다.

페렌츠 다비드는 에르데이 통일교회 주교로서 반삼위일체 사상을 설교에 포함했다. 이에 데브레첸의 칼뱅교회 주교 페테르 멜리우스 유하시 페테르가 강하게 반발했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1566년 4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공개 토론을 개최하도록 했고, 토론이 끝난 뒤 데브레첸의 칼뱅교회 출판사에 기금을 지원했다. 또한 콜로즈바르, 머로슈바샤르헤이, 바러드에 개신교 대학을 세우는 걸 후원했다. 1566년 1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정교회를 믿는 루마니아인 종교 지도자로 칼뱅교회 주교를 임명했다. 또한 에르데이 의회는 칼뱅주의로 개종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루마니아인 사제를 추방하라는 법령을 제정했지만 실제로 집행되지 않았다.

1567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페렌츠 다비드에게 감화되어 반삼위일체 사상을 수용했다. 페렌츠 다비드는 그의 지원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홍보하는 다섯 권의 책을 출판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우상 숭배자라고 비난했다. 1568년 초 투르다에서 다시 소집된 에르데이 의회는 설교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해에 따라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승인했고, 아무도 종교적 이유로 다른 사람의 손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가톨릭, 루터교회, 칼뱅교회 성직자들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았고, 유니테리언, 정교회, 콥트교, 유대교, 이슬람교 신자들은 비록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믿는 교리에 관해 어떤 간섭도 받지 않았다.

1568년 3월 8일부터 17일까지,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공식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뒤이어 1569년 10월 20일부터 25일까지 바러드에서 칼뱅파와 유니테리언 신학자들 사이의 토론회가 열렸다. 두 토론회 모두 승자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마침내 삼위일체를 거부하기로 마음먹고, 1569년 말 대다수 신하들과 함께 유니테리언으로 개종했다. 그는 유일한 유니테리언 군주로서 유럽사에 기록되었다.

1570년 8월 16일, 슈파이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막시밀리안 2세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은 더 이상 왕을 칭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트란실바니아의 공이자 헝가리 왕국 일부의 주권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채택했으며, 자신이 통치하는 공국은 헝가리 왕국의 일부이며, 자기가 죽은 후에는 막시밀리안 2세 또는 막시밀리안 2세의 후계자에게 돌아갈 것임을 확인했다. 12월 1일 슈파이어 조약이 에르데이 의회에서 비준되면서, 오랜 세월 이어진 합스부르크 가문과 서포여이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되었다.

1571년 3월 14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유니테리언 예식에 따라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대부분의 재산을 폴란드 국왕이자 삼촌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세 이모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안나 야기엘론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부인 조피에게 넘길 것이며, 개인 도서관을 줄러페헤르바르의 개신교 학교에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또한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에, 의회에 새로운 군주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했다. 에르데이 귀족들은 며칠 동안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한 뒤 연일 논의한 끝에 바토리 이슈트반을 에르데이 공으로 옹립했다.
[1] Fráter György, 죄르지 형제. 본명은 우체셰니치 유라이(Utješenić Juraj)[2] 오늘날 헝가리 동부 미슈콜츠, 데브레첸과 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 일대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지역. 파르티움은 라틴어인데 중세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