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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22:36:25

르헤데이 페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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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4대 공
르헤데이 페렌츠
Rhédey Ferenc
파일:르헤데이 페렌츠.jpg
이름 르헤데이 페렌츠
(Rhédey Ferenc)
출생 1610년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지바러드(현재 루마니아 오라데아)
사망 1667년 5월 13일 (향년 56~57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후스트(현재 우크라이나 허스트)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657년 11월 2일 ~ 1658년 1월 9일
배우자 베틀렌 드루지나 (1635년 결혼)
자녀 르헤데이 라슬로
아버지 르헤데이 페렌츠
어머니 카로이 커털린
종교 칼뱅파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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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4대 .

2. 생애

1610년경 트란시랍니아 공국 너지바러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르헤데이 페렌츠는 너지바러드의 수비대장이자 비하르 카운티의 최고 영주였으며, 어머니는 사투마레의 지주 카로이 라슬로의 딸인 카로이 커털린이었다. 아버지 르헤데이 페렌츠는 베틀렌 가보르의 심복으로서 그의 여정에 언제나 함께 했다. 그러나 1619년 베틀렌 가보르의 오스트리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황제군에 생포된 뒤 옥고를 치르다가 1621년에 팔라코보에서 옥사했다. 1623년, 어머니 카로이 커털린이 베틀렌 이슈트반과 재혼하면서, 그는 베틀렌 이슈트반의 양자가 되었다.

그 후 1630년 12월 1일에 통치를 시작한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총애를 입으면서 1637년 쿠쿨로 카운티의 최고 청지기이자 트란실바니아 평의회의 구성원으로 선임되었다. 1648년 여름에는 마르마로스 영주의 지위를 받았지만, 그곳에 가지 않고 라코치 죄르지 1세의 고문으로 남았다. 또한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아들이자 차기 공인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라코치 죄르지 2세 치세에서도 무난한 경력을 이어갔고, 1657년 1월부터 버르처이 아코시, 세레디 이슈트반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트란실바니아군 부대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1657년 10월 25일, 오스만 제국은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스웨덴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카자크와 동맹을 맺은 걸 문제 삼아 그의 폐위를 선고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에서 2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면서 위신이 추락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이 페렌츠를 새 공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르헤데이 페렌츠는 공으로 선출되기 전에 나중에 오스만 궁정이 동의하면 직위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라코치 죄르지 2세와 비밀리에 맺었다. 1658년 1월 9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히 페렌츠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라코치 죄르지 2세를 공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기엔 사절을 보내 라코치 죄르지 2세를 도로 폐위하라고 요구했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658년 여름 군대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압박해 10월 7일 버르처이 아코시를 새 공으로 세우도록 했다.

그후 르헤데이 페렌츠는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놓고 버르처이 아코시와 내전을 치르는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종종 연락했지만, 정치에 관심을 끊었다. 1659년 1월 1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 레오폴트 1세에게 귀순한 뒤 헝가리의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1661년 9월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된 어퍼피 미하이 1세의 고문으로 기용되었고, 칼뱅교회 산하 기관, 특히 학교를 지원했다. 1667년 5월 13일 후스트 성에서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