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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헝가리 왕국의 국왕 트란실바니아 제9대 공 베틀렌 가보르 Bethlen Gábor | |
이름 | 베틀렌 가보르 (Bethlen Gábor) |
출생 | 1580년 11월 15일 |
트란실바니아 공국 머로시예 | |
사망 | 1629년 11월 15일 (향년 49세) |
트란실바니아 공국 줄러페헤르바르 | |
재위 | 헝가리 왕국의 국왕 |
1620년 8월 25일 ~ 1621년 12월 31일 |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작 | |
1613년 10월 ~ 1629년 11월 15일 | |
오폴레 공국의 공작 | |
1622년 ~ 1625년 | |
배우자 | 카로이 주전너 (1605년 결혼 / 1622년 사망) |
브란덴부르크의 카타리나 (1626년 결혼) | |
아버지 | 베틀렌 퍼르커시 |
어머니 | 라자르 드루지너 |
형제 | 이슈트반 |
종교 | 칼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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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9대 공. 1620~1621년 헝가리 왕을 칭해 페르디난트 2세에 대립했으며, 1622~1625년에는 보헤미아 왕국 산하 슐레지엔의 오폴레 공작도 겸임했다.2. 생애
1580년 11월 15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머로시예(Marosillye)[1]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케슈와 자란드 카운티에 영지를 대대로 소유한 헝가리 귀족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베틀렌 가보르는 모하치 전투 때 창병 600명을 이끌고 러요시 2세 휘하에 들어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고, 이후 벌어진 헝가리 내전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헝가리 국왕을 칭한 페르디난트 1세에 맞서 동헝가리 왕국 초대 국왕이 된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했다.아버지 베틀렌 페르커시는 초기에는 페르디난트 1세의 추종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후기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편에 들어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571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한 후 바토리 이슈트반을 지지했고, 1575년 바토리 이슈트반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아 자기에게 반기를 든 가스파르 베케시를 상대로 케렐뢰센트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걸 기여한 뒤 머로시예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어머니 라자르 드루지너는 대대로 기병대 지휘관을 맡은 세케이인 귀족 가문 출신이다. 베틀렌 가보르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으나 대부분 일찍 죽었고, 1584년에 태어난 남동생 베틀렌 이슈트반 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베틀렌 가보르와 이슈트반 형제는 1590년 또는 1592년에 아버지 베틀렌 퍼르커시가 사망할 때까지 머로시예 성에서 살았다. 퍼르커시는 두 아들을 클루지의 예수회 학교에 보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의 공 바토리 지그몬드가 베틀렌 가문의 영지를 몰수했고, 어머니 라자르는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인 게르기오샤르헤기(Gyergyószárhegy, 현재 루마니아 하르기타 카운티 라자레아)로 이사해 형제 라자르 언드라시에게 의탁했다. 두 아이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도 라자르 언드라시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언드라시는 두 아이를 군인으로 삼기 위해 군사 지식에 중점을 뒀을 뿐 그 외의 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베틀렌 가보르는 훗날 자신은 어렸을 때 라틴어를 배운 적 없으며, 나중에 스스로 익혔다고 회상했다.
1595년 바토리 지그몬드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하바살폴트 전투를 치를 때 참전했고, 1596년 여름에는 티미쇼아라 공방전에 참여했다. 1597년 초 바토리 지그몬드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인 루돌프 2세와 접견해 오스만 제국에 맞설 병력을 지원받기 위해 프라하로 갔을 때 함께 했다. 1599년 3월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하고 바토리 언드라시가 새 공이 되었을 때 충성을 맹세했고, 1599년 10월 바토리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한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하이 2세를 상대로 셀림바르 전투를 치를 때 함께 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후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 18,000명이 미하이 2세를 몰아내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할 때 곧바로 가세했고, 1600년 9월 18일에 벌어진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황제군이 미하이 2세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이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철저하게 약탈하자 크게 실망했고, 1601년 3월 폴란드군이 바토리 지그몬드를 앞세워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할 때 즉시 가담해 황제군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은 그는 머로시예를 자기 수중으로 두고 세케이푈드(Székelyföld)[2]와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이 거주하는 지역 내 영지를 남동생 이슈트반에게 양도했다.
1602년 7월 26일, 바토리 지그몬드가 조르조 바스타와 협상한 끝에 퇴위하기로 했다. 그 후 트란실바니아 총독이 된 조르조 바스타는 개신교 세력을 트란실바니아에서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칼뱅파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정교회 왈라키아인과 세르비아인, 루터교 색슨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에 분노한 세케이인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황제군을 이끌고 퇴비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세케이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 각지에서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아사했다.
칼뱅파 신도였던 베틀렌 가보르는 조르조 바스타의 행보에 분노와 위협을 동시에 느끼고, 1602~1603년 겨울 트란실바니아 귀족 세케이 모제시와 함께 반(反) 합스부르크 연맹을 조직한 뒤 티미쇼아라에서 거점을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3세의 지원을 받으며 조르조 바스타에 대적했다. 세케이 모제시는 1603년 4월 15일 하체그 인근의 숙영지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되었고, 5월 9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조르조 바스타는 적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오스트리아로 퇴각했다. 그러나 1603년 7월 17일,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10세가 루돌프 2세의 사주를 받고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라쇼노프 전투에서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고, 세케이 모제시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추격대에 따라잡혀 전사했다. 베틀렌 가보르도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오스만 제국의 영역에 속한 베오그라드로 피신했다. 1603년 말 그와 함께 베오그라드로 피신한 귀족들은 그를 베오그라드 공으로 선출했지만, 그는 자기가 아직 젊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상술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베틀렌 가보르는 본래 트란실바니아의 역대 공 휘하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트란실바니아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중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트란실바니아에 더욱 큰 악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그는 합스부르크 장성 조르조 바스타가 개신교 박해를 자행하는 것에 깊은 반감을 품었고, 트란실바니아인들을 상대로는 무력을 거리낌없이 구사하면서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에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고 여겼다. 이에 오스만 제국을 주군으로 받들고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만이 트란실바니아가 살 길이라고 판단하고, 트란실바니아의 영향력 있는 귀족인 보치커이 이슈트반에게 루돌프 2세에 맞서 봉기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베틀렌 가보르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전해들은 루돌프 2세는 1604년 7월 2일에 트란실바니아 내 그의 영지를 돌려주기로 했다. 치커이는 즉시 트란실바니아로 향했지만, 지난 몇년 동안 도시와 마을이 철저히 약탈당하고 파괴된 것을 보고, 이대로면 트란실바니아인들은 귀족과 백성 모두 파멸하고 말 거라고 여겼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루돌프 2세에 대적하기로 마음먹고, 자기를 따르는 성주들을 설득해 그들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키도록 했다. 1604년 가을 보치커이 이슈트반의 봉기가 발발하자, 베틀렌 가보르는 오스만 궁정에 보치커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1604년 11월 베틀렌 가보르와 랄라 메흐케트 파샤를 보치커이가 거점으로 삼은 커셔에 사절로 파견해 보치커이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수여했다.
이후 베틀렌 가보르는 보치커이 이슈트반 휘하 사령관을 맡아서 황제군에 맞서 여러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다. 한창 전쟁을 치르던 중인 1605년 사투마레의 지주 카로이 라슬로의 딸인 카로이 주전너와 결혼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4월 24일로 정해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8월이 되어서야 클루지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파르티움(Partium)[3]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과 인맥을 맺을 수 있었으며, 보치커이 이슈트반과도 인척이 되었다.
1606년 12월 29일,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사망했다.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생전에 상 헝가리 방면군 총사령관 드러게트 발린트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콜로츠바르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606년 2월 11일에 드러게트 발린트를 배제하고 라코치 지그몬드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했다. 베틀렌 가보르는 라코치 지그몬드는 63세의 고령인 데다 상 헝가리에 주로 살았기에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고, 트란실바니아의 역대 대공을 대대로 역임한 바 있는 바토리 가문의 일원인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는 바토리 가보르에게 접근해 그의 고문이 되었고, 1608년 3월 5일 라코치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3월 7일에 바토리 가보르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출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바토리 가보르의 지시에 따라 코스탄티니예로 가서 오스만 제국이 바토리 가보르의 집권을 용인하고 우호 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1608년 11월 코스탄티니예에서 돌아온 뒤 가보르의 선출을 인정하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의 칙령을 가져왔다. 여기에 오스만 궁정은 트란실바니아가 3년 동안 공물을 바치는 걸 면제하기로 했다. 1610년 3월 바토리 가보리에 의해 세케이인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바토리 가보르의 통치는 그를 선출한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그는 사치스럽고 무책임한 생활 방식을 보여 신민들의 반감을 샀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바토리 가보르는 술에 매일 취했고, 젊은 여성들을 유혹했으며, 자신에게 아내를 제공해줄 의향이 있는 귀족들을 승진시켰다. 이에 시민들은 그를 새로운 사르다나팔루스[4]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또한 바토리 가보르는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에게 전쟁 비용에 쓰기 위해 100,000 플로린을 바치라고 명령했지만 10,000 플로린만 받자, 이에 보복하기 위해 1610년 12월 10일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세벤(현재 루마니아 시비우)에 입성한 뒤 이곳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새 수도로 선언하고, 귀족들이 부동산을 취득하는 걸 허가했으며, 칼뱅파 사제들이 세벤의 루터파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하는 걸 허락했다. 이리하여 세벤의 색슨족은 그동안 누렸던 특권을 크게 제약당했고, 자연히 색슨족의 반감은 거세졌다.
베틀렌 가보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러 외교 임무를 수행하고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중재하는 등 바토리 가보르를 충실히 보좌했다. 1611년 7월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에게 참패한 바토리 가보르가 세벤에서 고립되었을 때 오스만 궁정으로 달려가서 왈라키아 공국을 침공해달라고 요청해 라두 10세가 왈라키아로 철수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토리 가보르가 합스부르크 제국과 화해한 뒤 오스만 제국에 맞서려 들자, 그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테메스바르 파샤에게 이 사실을 고발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 서신은 도중에 바토리 가보르의 수중에 넘어갔고, 바토리 가보르는 그를 의심한 끝에 1612년 9월 베틀렌 가보르를 반역자로 성토하고 죽이려 들었다. 이에 베틀렌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 영내로 도주한 뒤 티미쇼아라, 부다, 카니자의 베이들을 접견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오스만 대재상 나수흐 파샤와 연락했다.
1613년 4월 12일, 바토리 가보르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와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마티아스는 바토리 가보르의 트란실바니아 통치에 대한 세습권을 인정했으며, 가보르는 마티아스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는 격노했고, 대재상 나수흐 파샤의 설득에 따라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1613년 8월, 오스만 제국군은 베틀렌 가보르를 앞세워 코스탄티니예로 출진했다. 이때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9세와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9세 톰샤도 아흐메트 1세의 지시에 따라 오스만 제국군의 원정에 참여했고, 크림 칸국의 칸 차니베크 기라이도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침공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압도적인 군세로 밀려오는 적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트란실바니아 본토에서 도망쳐 바라드로 철수한 뒤, 마티아스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오스만 제국군 총사령관 스켄더르 파샤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10월 21일에 가보르를 폐위하고 가보르에게 서신을 보내 이를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10월 23일 의회는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1613년 10월 27일, 바토리 가보르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 출신 경비대장 게치 언드라시와 아바피 미클로시에 의해 피살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된 베틀렌 가보르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내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내치를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의 자치권을 회복해줬고,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을 지킬 권리도 인정했다. 1616년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영주들 중 주모자 2명을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용서했다. 1616년 11월 트란실바니아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던 하이두크를 응징하는 원정을 개시해 에세드, 실라기슬로묘, 실라기체흐 성을 점령한 뒤,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또한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권을 회복했으며,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국고 수입에 대한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고 1588년 이후 국가가 귀족들에게 내준 특권을 조사해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특권만 인정했다.
다만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추진한 방식 중에는 마녀재판이라는 악습을 활용한 것도 있었다. 후녀드의 여성 영주로서 트란실바니아에서 막강한 재력을 갖췄던 퇴뢰크 커털린은 남편이 따로 있음에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의 공비가 되기를 원해 가보르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베틀렌 가보르는 그녀가 주술을 일삼고 바토리 가보르와 불륜을 맺은 혐의로 고발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추방하고 막대한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바토리 가보르의 여동생인 바토리 언너는 마녀 혐의로 3번이나 재판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합의금 명목으로 많은 재산을 국고에 헌납해야 했다.
베틀렌 가보르는 산업과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상품의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상품의 다방향 이동을 규제했고, 타국 사업가들을 자국에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귀금속 채굴을 권장했고, 해외의 유능한 채굴 전문가를 초청했다. 그리고 줄러페헤르바르에 웅장한 새 궁전을 세웠다. 그는 예술을 후원했고 칼뱅파 교회에 상당한 자금을 기부했으며, 개신교 사제들에게 세습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베틀렌 가보르 대학'을 설립하고 헝가리 학자와 교사의 등록을 장려했으며, 트란실바니아 학생들을 영국, 네덜란드, 독일 내 신교도 제후령 등 개신교 국가들에 파견해 학습하도록 장려했으며, 농노의 자녀들에게도 기초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했다.
한편, 마티아스는 자신과 평화 협약을 맺었던 바토리 가보르를 축출한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는 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양자간 오랜 협상이 이어진 끝에, 1615년 5월 6일 협정이 맺어졌다. 마티아스는 베틀란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며, 후스트 성을 돌려주기로 했다. 1617년 7월 31일에 양국 모두 협정을 조인했다. 이리하여 마티아스와 화해한 그는 1616년 리파 성을 오스만 제국에 넘겨줌으로써 그들의 호의도 확보했다. 리파 성을 내준 일은 당대 헝가리인들은 물론이고 후대 역사가들에게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다만 그는 1616년 봄 오스만 제국이 폴란드를 주권자로 섬기는 몰다비아 공국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여하는 걸 거절했고, 추가로 성을 내주라는 요구 역시 거절했다.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베틀렌 가보르는 보헤미아 왕국의 후스파와 손잡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1619년 11월 27일, 그의 군대는 빈 교외엔 에베르스도르프를 점령했고, 빈을 포위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페르디난트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에게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고, 지그문트 3세 바사는 매형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폴란드군 10,000명을 트란실바니아로 파견해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약탈하게 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베틀렌 가보르는 트란실바니아로 철수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앙심을 품고,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대상으로 보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오스만 2세는 1620년 이스칸데르 파샤가 이끄는 20,000명을 파견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대원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와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스폴츠키는 몰다비아의 이아시 인근 체초라에서 8,000 가량의 보병과 수백 명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고무된 오스만 2세는 1621년 봄 친히 12만 대군을 이끌고 폴란드로 진격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에 맞서 싸우느라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위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620년 8월 25일, 베틀렌 가보르는 상 헝가리의 반스카비스트리차에서 열린 의회에서 헝가리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다가 보헤미아 반란군이 1620년 11월 8일에 벌어진 백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파견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가 이끄는 황제군에게 격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페르디난트 2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1621년 12월 31일, 양자는 니콜스부르크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헝가리 왕위를 포기했지만, 그 대신 신성 로마 제국 공작이라는 칭호와 상부 티서 7개 백국, 실레시아의 오폴레 공작령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30년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실레시아 내 영지를 운영하는 게 힘들어지고 자칫했다간 전쟁의 불똥이 자기한테까지 미칠 위험이 생기자, 그는 1625년 5월 8일에 빈 협약을 체결하면서 실레시아에 있는 영지를 반납하는 대가로 페르디난트 2세와 완전히 화해했다.
1622년 아내 카로이 주전너가 사망한 후, 베틀렌 가보르는 오스만 제국이 폴란드-티루아니아를 상대로 호틴 전투에서 참패한 여파로 흔들리는 틈을 타, 페르디난트 2세와 결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3세의 오스트리아 대공비 체칠리아 레나타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2세가 독일 내 개신교 세력을 상대로 거세게 몰아붙이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반(反) 합스부르크 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1626년 3월 1일,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의 누이인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와 동맹을 맺었고, 1626년에는 웨스트민스터 개신교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전쟁에 참여한 그는 한때 헝가리에서 황제군을 몰아냈지만, 개신교 세력의 호응이 미비하자 페르디난트 2세와 브라티슬라바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1629년 11월 15일, 베틀렌 가보르는 과로에 시달린 여파로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고,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에게는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기에, 당초 남동생 베틀렌 이슈트반을 후계자로 삼았지만,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와 재혼한 뒤인 1626년 6월 12일 줄러페헤르바르 의회에서 카타리나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러면서도 이슈트반을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으로 지명했다. 그가 사망한 뒤 카타리나가 트란실바니아 여공이 되었지만, 베틀렌 이슈트반과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그 해 9월 28일에 폐위되었고 베틀렌 이슈트반이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되었다.
3. 가족
- 카로이 주전너(? ~ 1622): 사투마레의 지주 카로이 라슬로의 딸.
- 베틀렌 가보르: 유년기에 사망.
- 베틀렌 미하이: 유년기에 사망.
- 딸: 출생 직후 사망.
-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1602 ~ 1649): 브란덴부르크 제16대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의 딸.
4. 여담
헝가리 2000포린트 지폐의 인물이다.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
튀르키예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 : 쾨셈에서 시즌2의 히로인 "베들렌 파리아"의 아버지라는 설정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