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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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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Władysław III
파일:165407024456.jpg
출생 1424년 10월 31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444년 11월 10일 (향년 20세)
오스만 제국 바르나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1434년 7월 25일 ~ 1444년 11월 10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1440년 6월 29일 ~ 1444년 11월 10일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
어머니 조피아 홀샨스카
형제 카지미에시 4세, 카지미에시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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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헝가리에서는 '울라슬로 1세', 크로아티아에서는 블라디슬라브 1세이며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2대 국왕, 헝가리 야기에우워 왕조의 초대 국왕이다.

2. 언어별 표기

폴란드어Władysław III Warneńczyk
헝가리어I. Ulászló
크로아티아어Vladislav I. Jagelović
슬로바키아어Vladislav I. Jagelovci
리투아니아어Vladislovas Varnietis

3. 생애

1424년 10월 31일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와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의 심복이었던 이반 홀샨스키의 손녀인 넷째 왕비 조피아 홀샨스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1399년에 죽은 첫 아내인 야드비가 여왕 사후에 시간을 두고 세 번 결혼했다. 야드비가 소생인 공주 엘즈비에타는 갓난아기일 때 죽었고, 둘째 왕비 안나(1381~1416)의 소생으로 야드비가 야기엘론카를 두었고, 셋째 왕비 엘즈비에타(1372~1420) 사이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장녀 야드비가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와 약혼시키고 후계자 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측이 튜튼 기사단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자신을 잘 도와주지 않자 반감을 품고 결혼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던 중 네번째로 맞이한 조피아가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낳자, 그는 즉시 아들이 폴란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1425년 4월 브레스트 의회에서, 폴란드 귀족들은 적절한 시기에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하면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가 아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할 경우 조피아가 섭정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귀족 가문의 여식인 그녀가 섭정을 맡을 경우, 리투아니아인들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426년 5월 웽치차 의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지만, 귀족들은 이번에도 조피아의 섭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가 난 브와디스와프 2세가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외치자, 귀족들은 브레스트 합의서를 잘게 찢어버렸다. 1427년 6월, 루테니아 귀족들은 할리치나 의회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여전히 복종하지 않았다.

많은 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가 출생한 후에도 그 대신 야드비가를 폴란드 여왕으로 옹립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출신인 야기에우워 왕조가 폴란드 왕위를 세습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에 야드비가를 여왕으로 옹립한 뒤 외국의 왕족과 결혼시키길 희망했다. 또한 리투아니아 측이 고대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등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에게 빼앗긴 실지를 되찾는 일에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속한 가문이며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확보하고 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힘을 빌려 이 실지들을 탈환하고 싶어했다. 룩셈부르크 가문 역시 야드비가와 프리드리히 2세와의 약혼을 성사시킴으로써 폴란드 왕국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 했다. 이로 인해 조피아와 브와디스와프 3세 모자를 겨냥한 음모가 폴란드 정계에서 횡행했다.

1427년, 폴란드 궁정은 심각한 스캔들에 휘말렸다. 세번째 아들[1] 카지미에시 4세를 임신 중이던 조피아 왕비가 표트르 쿠로프스키, 얀 크라스카, 얀 코니에츠폴스크, 바브지니에츠 자랭바, 그리고 슈체코치니 출신의 피오트르와 도비에슬라프 형제 등 6명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고발을 당한 것이다. 피고인 중 얀 코니에츠폴스크, 슈체코니 출신의 두 형제는 탈출했고, 나머지는 투옥되었다. 만약 조피아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뱃속의 아기는 사생아로 격하될 테고,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정통성 역시 훼손될 게 자명했다. 이에 조피아는 1427년 11월 카지미에시 4세를 낳은 뒤 "내가 결백하지 않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죽음을 내려주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의 '정화의 맹세(iuramentum purgatorium)'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건을 기각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재판은 아무런 결론 없이 종결되었다.

1430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에들니아에서 폴란드 귀족에게 개인적인 불가침성을 보장하는 특권을 부여했으며, 각 도시들에게도 특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아들의 계승을 보장받았다. 1431년 12월, 야드비가 공주가 1년간 모종의 질병에 시달린 끝에 사망하여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많은 이들은 조피아가 아들의 계승을 보장받기 위해 야드비가를 독살했다고 여겼으며, 마우고자타 두츠말(Małgorzata Duchmal, 1946 ~ )을 비롯한 현대의 일부 폴란드 사학자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조피아는 이번에도 정화의 맹세를 하는 것으로써 독살했다는 혐의를 피해갔다.

1434년 6월 1일,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망했다. 많은 폴란드 귀족들이 오파토프 회의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의 왕위 계승 반대를 표명했지만,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뉴 올레스니키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입후보를 추진했다. 1434년 7월 25일, 브와디스와프 3세는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기에, 섭정을 둬야 했다. 조피아는 폴란드 귀족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섭정이 되지 못했고, 즈비그뉴 올레스니키를 비롯한 유력한 성직자 및 귀족들이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조피아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보다 앞서, 조피아의 막내 여동생 마리아의 남편이며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였던 일리아슈는 형제 슈테판 2세와 여러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된 뒤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망명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새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된 슈테판 2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일리아슈를 감옥에 가두었다. 1435년 여름, 조피아는 아들과 섭정단을 구슬려서 일리아슈가 석방되어 몰다비아로 돌아가게 했다. 몰다비아에 귀환한 일리아슈는 폴란드의 지원에 힘입어 슈테판 2세를 상대로 수체아바 인근 다르마네스티에서 맞붙었지만 패배했다. 하지만 몰다비아 보야르들이 슈테판 2세 지지자들과 일리아슈 지지자들로 나뉜 덕분에 세력을 보전할 수 있었고, 결국 슈테판 2세는 1435년 8월 그와 타협했다. 슈테판 2세는 비를라트, 테쿠치, 칠리아를 포함하는 소위 저지대의 통치자로 군림했고, 일리아슈는 상류 지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 후 일리아슈는 몰다비아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했다. 조피아는 이와 더불어 브와디스와프 3세와 당시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상속녀였던 룩셈부르크 공작 부인 안과 약혼시키는 계획을 지원했지만, 안이 작센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빌헬름과 결혼하면서 무산되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했을 당시, 폴란드 왕국은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시키려는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리투아니아 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와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435년, 스비트리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출신의 루테니아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용병대, 킵차크 칸국 출신의 최소 5백 명의 타타르인, 그리고 몇명의 튜튼 기사를 포함해 총 11,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중심부의 빌뉴스와 트라카이를 향해 진격했다. 지기만타스는 이에 맞서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일대에서 동원한 리투아니아군 5천 명을 지휘했고, 야쿠브 코빌란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4천 명이 지기만타스에 가세했다.

양군은 1435년 9월 1일 빌코미에시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지점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스비트리가일라는 전군이 궤멸되는 참패를 입고 3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폴로츠크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튜튼 기사단과 함께 1435년 12월 31일 브제시치 쿠야브스키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더 이상 리투아니아나 폴란드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전쟁 배상금으로 9,500 헝가리 줄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1437년, 헝가리,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사망했다. 이에 즈비그뉴 올레스니키는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헝가리 국왕이 된 알브레히트 2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 계승을 보장받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후스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레스니키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올레스니키는 후스파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조피아는 아들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기회를 걷어차버린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올레스니키와 정쟁을 벌였다.

1438년 4월, 로키차니의 요한 대주교가 이끄는 보헤미아 귀족들은 쿠트나 호라에서 선거를 실시해 브와디스와프 3세의 형제인 카지미에시 4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에 알브레히트 2세는 헝가리군을 이끌고 프라하로 진군한 뒤 6월에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보헤미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셍지워이 오스트로로그, 얀 텡친스키가 지휘하는 5,000명의 폴란드군이 이들과 합류해 알브레히트 2세를 몰아붙였다. 결국 보헤미아에서 물러난 알브레히트 2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징발해 보헤미아 반란 세력 및 폴란드군과 대결했다.

양자간의 대결은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보헤미아에서 활동하는 폴란드군을 강화하기 위해 1438년 9월 20일 소폴란드 출신 징집병들을 이끌고 오포예를 점거한 뒤 몇몇 상부 실레시아 공작들을 복속시켰다. 여기에 대폴란드 징집병들은 밀리츠를 파괴한 뒤 브제크를 공략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술탄국이 헝가리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브레히트 2세는 휴전을 제안했다. 이후 양자는 1439년 2월 10일 니미스우프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1439년, 소폴란드 출신 귀족인 스피테크 멜슈틴스키의 지휘하에 노베 미아스토 코르친에서 귀족 연합이 신설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간섭하려 드는 즈비그뉴 올레스니키 주교를 실각시킬 때까지 싸우기로 맹세했다. 조피아 왕비는 초기엔 이들을 지지했지만, 올레스니키가 단호한 태도로 군대를 동원해 맞서는데다 본인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자, 입장을 바꿔 올레스니키 주교와 타협하고 스피테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결국 반란군은 그로트니키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피테크는 전사했다. 이후 올레스니키는 스피테크 등이 추진했던 카지미에시 4세의 보헤미아 국왕 옹립 계획을 백지화했다.

1439년 10월 27일, 알브레히트 2세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약탈하는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군사 원정을 준비하던 중 심각한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임신한 아내 엘리자베트가 아들을 낳으면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물려주겠으며, 아내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오스만 술탄국의 헝가리 침공을 두려워한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기를 왕으로 받들라는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인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를 왕으로 받들고, 엘리자베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에는 권고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의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거라는 예측을 접하자 남편의 유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하녀 헬레네 코타너(Helene Kottanner)에게 비셰그라드 성에 있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헬레네가 왕관을 성공적으로 빼돌려서 가져왔는데, 바로 그 날 엘리자베트는 진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낳았고,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Szécsi Dénes 1410~1465)는 아기에게 세례를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은 갓난아기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알브레히트 2세의 유언에 따라 프리드리히 5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엘리자베트는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 귀족 대표들에게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와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1440년 3월 8일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1세로 선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엘리자베트에게 자신과 결혼한다면 그녀의 아이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군림하도록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제안을 거부하고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아들을 데려가서 1440년 5월 15일 세치 데네시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치렀다. 6일 후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헝가리 귀족 연합군을 이끌고 부더에 입성하자, 엘리자베트는 아들과 함께 쇼프론으로 도주했다.

거러이 라슬로(Garai László 1410~1459), 주라지 브란코비치, 프리드리히 5세, 첼레 백작 울리크 2세를 포함한 여러 도시와 독일계 군주들은 어린 왕을 지지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에 맞서려면 아기보다는 성인이 훨씬 낫다고 여겼기에 브와디스와프 3세가 집권하는 편이 낫다고 확신했다. 1440년 6월 29일, 헝가리 의회는 라슬로 5세의 즉위를 무효로 선언했다. 7월 17일 세치 데네시는 압력에 못이겨 헝가리의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의 무덤에서 가져온 왕관을 브와디스와프 3세의 머리 위에 씌웠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항하고자 1440년 11월 22일 노이슈타트에서 프리드리히 5세와 협약을 맺었다. 쇼프론을 프리드리히 5세에게 저당잡혔고,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그에게 넘겼다. 이후 라디슬라우스는 프리드리히 5세의 궁정에서 살았다. 또한 그녀는 보헤미아인 용병대장 얀 이스크라(Jan Jiskra z Brandýsa 1400~1469)에게 커셔를 비롯한 12개 마을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1441년 초 후냐디 야노시와 우일러키 미클로시(Újlaki Miklós 1410~1477)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라슬로 5세 지지를 천명한 적군을 상대로 바트셰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휘하 지휘관들은 헝가리 서부와 동부 영토를 장악했지만, 엘리자베트의 추종자들은 에스테르곰, 죄르, 프레스부르크 및 여러 도시들과 함께 헝가리 북부 일대를 계속 장악했다.

이렇듯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 문제에 전념하던 1440년 3월 20일, 리투아니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차르토리스키 공작 이반 바실리예비치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빌뉴스 총독 얀 도브거드, 트라카이 총독 표트르 렐루쉬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올레스니키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설득해 당시 12살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를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 문제로 정신없는 틈을 타 1440년 6월 29일 카지미에시 4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옹립했다. 동생과 쓸데없이 마찰을 벌일 겨를이 없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를 용인해주기로 했다.

1442년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더 이상 내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그해 12월 13일 죄르에서 엘리자베트와 만나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의 중재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인정했지만, 아들의 왕위 계승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3일 후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라디슬라우스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이에 대해 그녀가 브와디스와프 3세와 체사리니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스만 술탄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왕실 재산을 대규모로 저당잡혔고, 귀족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다. 1443년 10월, 군자금을 충분히 모은 그는 오스만 술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1443년 11월 3일 알렉시나츠 인근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었고, 그 해 12월 1일 소피아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12월 12일 즐라트니차에서 투르크군을 다시 한 번 격파했다. 하지만 12월 15일 즐라트니차 요새에서 농성하는 투르크군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멜스트니차로 후퇴했고, 12월 24일 그곳으로 쫓아온 투르크군을 격파했다. 1444년 1월 2일, 그는 쿠노비차 협곡에서 투르크군을 격파했다. 이후 양국은 평화 협상을 벌였고, 1444년 6월 12일 세게드에서 10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는 세르비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24개의 다뉴브 강 유역 성들을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3세는 1444년 8월 4일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로부터 "부르고뉴군과 베네치아 함대가 도와줄 테니 이교도와의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이어가라"는 주장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협정을 깨뜨렸고, 9월에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헝가리-폴란드-왈라키아 연합군 25,000명을 이끌고 에디르네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9월에 비딘, 10월에 슈멘, 11월 6일에 프로바디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가 무라트 2세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에서 발칸 반도로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444년 11월 10일, 베네치아 함대와 조우하기 위해 바르나 해안에 머물던 브와디스와프 3세의 군대는 6만 명에 달하는 투르크군과 조우했다. 이후 벌어진 바르나 전투에서, 중앙 부대를 이끌던 후녀디 야노시가 튀르크군을 격파하고 시파히 지휘관 카라자 파샤가 전사하면서 한때 기독교 측이 유리해지는 듯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적군이 지휘관의 전사로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자신이 도와주러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야노시의 권고를 무시하고 폴란드 중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니체리 부대에게 포위되어 삽시간에 궤멸되었다. 이후 폴란드-헝가리 군대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후녀디 야노시는 나머지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일설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 3세는 타고 다니던 말에서 낙마한 뒤 코자 기즈르(Kodża Hyzyr)라는 이름의 예니체리 병사에게 목이 베어졌고, 무라트 2세는 그의 수급을 전달받은 뒤 꿀 단지에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수년 후, 무라트 2세는 꿀 단지에 담긴 그의 수급을 손님들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자녀를 두지 못했다.[2] 그의 유해는 바르나 전투 이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떠돌았다. 이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은 1445년 6월 1일까지 브와디스와프 3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끝내 돌아오지 않자 지난날 브와디스와프 3세와 헝가리 왕위를 놓고 경쟁했던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헝가리 국왕으로 옹립했다. 한편 리투아니아 대공을 맡고 있던 동생 카지미에시 4세는 형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폴란드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번번이 거부하다가 3년이 지난 144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1] 두번째 아들 카지미에시는 1426년에 태어나 1427년에 요절했다.[2]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으나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