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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출생 | 1042년 | ||
사망 | 1081년 / 1082년 4월 2일 (향년 38~40세) | ||
헝가리 왕국 오시아흐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058년 3월 19일 ~ 1076년 12월 25일 | |||
폴란드 국왕 | |||
1076년 12월 25일 ~ 107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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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키예프의 비체스와바 | ||
자녀 | 1남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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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폴란드 왕국의 국왕. 왕권 강화를 꾀했으나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다.2. 생애
1042년경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와 키예프 루스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딸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 자매로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미에슈코,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 오토가 있었다. 105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폴란드 대공이 되었고, 동생 브와디스와프와 미에슈코는 각각 마조프셰와 쿠자비의 공에 봉해졌다. 그는 독자적으로 은화를 발행했으며, 그리에즈노의 모길노, 크라쿠프의 티니에크, 브로츠와프, 루비인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독일 수도사들을 초청했다. 1064년에는 1038년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그니에즈노 대성당을 재건했다. 여기에 포즈난 주교단을 복원했으며, 프워츠크의 마조프 교구를 설립하기도 했다.1060년, 볼레스와프 2세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와 형제 벨러 1세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벨러 1세를 지원했다. 언드라시는 이에 맞서 아녜스 황후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보헤미아, 작센에서 파견된 제국군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몬슨 인근에서 맞붙었고,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벨러가 승리했다. 언드라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사전에 탈출로를 차단한 기병대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후 바코니 숲의 지르크 저택에 갇혀 지내다 1260년 12월 6일 이전에 사망했다. 그 후 벨러는 1260년 12월 6일 헝가리 국왕 벨러 1세로 등극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2세는 보헤미아 공국이 언드라시 1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틈을 타 슐레지엔 서부 지역인 오파비안 실레시아를 침공해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 시를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 보헤미아군이 도중에 매복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가까스로 도주했다. 이후 1062년에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화해하고 여동생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와 결혼시켰다. 1063년 보헤미아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이 셜러몬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그는 벨러 1세를 돕기를 거부했지만 벨러 1세의 세 아들 게저 1세, 라슬로 1세, 람페르트가 자국에 망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1063년 가을, 게저 1세, 라슬로 1세, 람페르트는 제국군이 철수한 틈을 타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군했다. 이후 셜로몬과 세 형제간의 협상이 진행된 끝에, 벨러 1세의 세 아들은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1068년, 키이우 루스 대공 이자슬라프 1세가 민중 봉기에 휘말려 폐위된 뒤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자슬라프 1세는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의 딸 거트루드의 남편이었기에, 볼레스와프 2세는 그를 복위시키고 했다. 1069년, 이자슬라프 1세는 폴란드군의 도움에 힘입어 자신이 도망친 뒤 키이우 루스 대공을 칭했던 브세슬라프를 폴로츠크로 몰아내고 권좌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자슬라프 1세는 폴란드군이 떠난 뒤 각지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끝내 1073년 프세볼로트 1세에게 축출되었다. 이자슬라프 1세는 아들 야로폴크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내 자신을 도와주면 키이우 루스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교황의 수위권 하에 두겠다고 제안했고, 볼레스와프 1세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주교 서임권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기에 그를 도울 여유가 없었고, 볼레스와프 1세 역시 하인리히 4세와의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에 그를 돕지 않았다.
<大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1070년경 보헤미아인들이 폴란드로 쳐들어왔다가 볼레스와프 2세에게 패배했고, 볼레스와프는 그들을 모라비아까지 추격했다고 한다. 1071년 가을, 볼레스와프는 마이센에 있는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연대기 작가인 헤르스펠트의 람페르트에 따르면, 그와 브르제티슬라프 2세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었고, 황제가 그들에게 평화를 이루고 현재 국경에 만족하라고 명령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1072년, 볼레스와프는 마이센 협약을 파기하고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이에 진노한 하인리히 4세는 1073년 5월 폴란드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작센 귀족들이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로의 원정 계획을 취소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간의 주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헝가리 왕국과 함께 그레고리오 7세의 편에 섰다. 그러면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국왕이 되는 걸 허락해달라고 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1076년 12월 25일, 볼레스와프는 교황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구밀로부터 왕관을 수여받았다. 그 후 볼레스와프는 이자슬라프 1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키이우 원정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크라쿠프 수도사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오랜 원정 동안 폴란드에 남겨진 폴란드 기사의 아내들이 영지를 대신 관리하던 가신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왕의 동의 없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승리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던 볼레스와프는 몹시 분노해 멋대로 돌아가버린 기사들과 불성실한 아내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 빈센티 카드우벡에 따르면, 그는 강아지를 여인의 가슴 속에 넣어 살을 물어뜯게 하는 고문을 가했다. 이에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가 볼레스와프의 잔인무도함을 규탄하며 파문하였다. <大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이를 반역죄로 간주하고 즉시 주교를 체포하고 그의 팔다리를 잘라 죽였다고 한다. 반면 빈센티 카드우벡에 따르면, 스타니스와프는 미사를 드리던 중에 납치되어 살해된 후 대중 앞에 공개되고 온갖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볼레스와프는 여러 귀족이 스타니스와프 주교와 내통했다고 간주해 숙청을 단행했다. 이에 분노한 귀족들은 1079년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헝가리로 망명해 라슬로 1세의 궁정에 지냈다. <大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헝가리인들에게도 미움을 사는 바람에 1081년 또는 1082년 4월 2일에 오시아흐에서 누군가가 독을 탄 술을 먹고 사망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로마로 순례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벙어리 회개자'로서 오시아흐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보고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은 볼레스와프가 축출된지 몇 세기 후에 창작된 이야기이기에 신빙성이 없다.
3. 가족
- 키이우의 비체스와바(1047년경 ~ 1089년 이후): 키이우 루스 대공 스뱌토슬라프 2세의 딸.
- 미에슈코 볼레스와비치(1069년경 ~ 1089년): 크라쿠프 공작(1086년 ~ 10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