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25:47

야드비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30000, #ff0000 20%, #ff0000 80%, #a3000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피아스트 왕조 프르셰미슬 왕조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프셰미수 2세 바츠와프 2세
프르셰미슬 왕조 피아스트 왕조 앙주 왕조
바츠와프 3세 브와디스와프 1세 카지미에시 3세 루드비크 야드비가
야기에우워 왕조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브와디스와프 3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야기에우워 왕조
지그문트 1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
}}}}}}
<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앙주 왕조 국왕
야드비가
Jadwiga
파일:야드비가그림.jpg
출생 1373년 10월 3일 ~ 1374년 2월 18일 사이
헝가리 왕국 부더
사망 1399년 7월 17일 (향년 25세)[1]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1384년 10월 16일 ~ 1399년 7월 17일
배우자 요가일라 (1386년 결혼)
자녀 엘주비에타
아버지 러요시 1세
어머니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
자매 커털린, 마리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시성4. 기타

[clearfix]

1. 개요

폴란드 왕국 앙주 왕조 제2대 여왕.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동군연합을 이끌어냈다.

2. 생애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1세와 보스니아의 반(Ban)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의 딸이며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조카 쿠야비아의 마리아의 딸이기도 한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의 막내딸이다. 누이로 마리어, 커털린이 있었다. 생년월일은 기록되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1373년 말에서 1374년 초 사이에 출생했을 거라고 본다. 러요시 1세는 1373년 10월 3일자 칙령에서 자신의 두 딸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언급했는데, 이로 볼 때 야드비가는 1373년 10월 3일 이후에 출생했을 것이다. 또한 크라쿠프바벨 대성당 달력의 항목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1388년 2월 18일에 이미 성숙해졌다고 언급했다. 이로 볼 때, 그녀는 1374년 2월 18일 이전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녀의 출생지로는 비셰그라드 성 또는 부더로 추정된다.

그녀는 1267년에 시성된 브로츠와프 공작 부인 실롱스크의 야드비가를 기리는 의미로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일각에서는 그녀의 증조할머니이며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왕비인 야드비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추정한다. 당대 연대기에는 그녀의 이름이 "Adviga", "Hedviga(Heduiga)", "Hedvigis(Hedwigis, Heduigis)", 'Hedwig"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야드비가는 어린 시절부터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다방면의 고급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읽기 능력, 외국어 구사력에서 재능을 드러냈고, 음악, 예술 및 과학 분야에서도 열정이 있었다. 러요시 1세는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1370년 외숙부 카지미에시 3세가 사망한 후 폴란드 왕위를 물려받은 뒤 폴란드 공주였던 어머니 엘즈비에타에게 폴란드 통치를 맡기고 있었다. 이 덕분에, 그녀는 헝가리와 폴란드의 공주로서 유럽 열강들로부터 훌륭한 신부감으로 각광받았다. 1378년 6월 15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자이며 당시 8살이었던 빌헬름[2]과 약혼했다. 이때 약혼을 파기하는 쪽이 상대방에게 200,000 골드 플로린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이 덧붙여졌다.

말년의 러요시 1세는 마리어와 야드비가의 폴란드 상속에만 골몰했고 폴란드 귀족들에게 막대한 특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딸들의 폴란드 상속을 인정받았다. 1382년 9월 10일, 러요시 1세가 너지솜버트에서 사망하자 같은해 11월 25일 라돔스코에서 열린 폴란드 세임은, 야드비가와 마리어 중 한 명을 폴란드 여왕으로 선임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여왕으로 선출된 이는 폴란드에 영구적으로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덧붙여졌다. 마리어와 야드비가의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1383년 2월 26일 시에라츠에서 열린 회의에 선언문을 보내 야드비가를 폴란드 여왕 대관식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야드비가의 출발은 지체되었고, 그 사이에 피아스트 왕조 출신이 폴란드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이들은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를 내세우려 했다.

1383년 3월 28일, 여러 귀족들은 시에라츠에서 새 회의를 열고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고, 야드비가를 시에모비트와 결혼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인 탱친스키 가문의 일원인 얀 탱친스키는 시에모비트의 선출을 연기하자고 설득했고, 귀족들은 야드비가를 5월 10일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에 지난날 러요시 1세가 헝가리령으로 삼았던 루테니아 왕국을 폴란드 왕국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시에모비트 4세의 지지자들이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잔타의 수행원 자격으로 크라쿠프로 들어가려 했지만, 시민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야드비가는 1383년 5월 10일까지 폴란드에 도착하지 못했다.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보낸 사절들은 홍수 때문에 야드비가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가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이때를 틈타, 시에모비트 4세는 군대를 일으켜 칼리시로 진격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해 8월 시에라츠에 모여서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잔타는 시에슈미트 4세의 대관식 집전을 거부했다. 이후의 회의에서, 엘리자베타의 사절들은 야드비가를 11월 이전에 폴란드로 보내겠다고 제안했으며, 야드비가나 마리어가 자녀 없이 죽으면, 살아남은 누이가 다른 누이의 영지를 물려받을 거라고 밝혔다.

한편, 시에모비트 4세는 칼리시를 몇 달간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후퇴했다. 칼리시의 귀족이자 크라쿠프의 스타로스타(starosta)였던 셍지보이 파우카는 달마티아차라로 가서 엘리자베타와 협상하려 했지만, 엘리자베타는 그를 투옥한 뒤 헝가리 군대를 바벨 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파우카는 탈출한 뒤 그녀의 군인들이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1384년 3월 초, 라돔스코에서 열린 총회에서 폴란드의 모든 지방과 도시의 대표들은 야드비가가 2개월 이내에 폴란드에 오지 않을 경우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오직 "영주와 시민의 공동체"만이 임기 동안 폴란드를 통치할 권한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어린 딸이 홀로 폴란드에 갔다가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해 계속 붙들려 했던 야드비가의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이러다가 정말로 폴란드를 잃을 것임을 깨닫고 야드비가를 폴란드로 보냈다.

야드비가가 크라쿠프에 도착한 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많은 성직자, 귀족, 시민이 애정의 표시로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크라쿠프에 모였다고 한다. 그후 야드비가는 1384년 10월 13일에 바벨 성으로 이동했고, 같은 해 10월 16일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잔타의 주관하에 거행된 대관식에서 폴란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그녀가 받은 칭호는 다음과 같다.
Hedvigis Dei gratia regina Poloniae, necnon terrarum Cracovie, Sandomirie, Siradie, Lancicie, Cuiavie, Pomoranieque domina et heres.
하느님의 은총으로 폴란드의 여왕이자 크라쿠프, 산도미에시,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 및 포모제의 여주인이며 상속녀.[3]

원칙대로라면 엘리자베타가 10~11살된 여왕의 섭정을 맡아야 했지만, 당시 엘리자베타는 헝가리에 남아서 야드비가의 언니인 헝가리-크로아티아 여왕 마리어의 섭정을 맡기로 했기 때문에 폴란드에 가지 않았고, 소 폴란드의 대귀족들이 엘리자베타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가 부더로 와서 8월 16일 이전에 아들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결혼을 완료해달라고 요청했다. 엘리자베타는 이를 받아들이고, 폴란드의 실권자들 중 한 명이었던 오폴레 공작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결혼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야드비가는 12살이 안 되었기 때문에, 적법한 성직자가 그녀의 조숙함을 증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는 이에 필요한 절차를 준비하겠다는 문서를 발행했고, 바벨성에서 결혼식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크라쿠프 영주들은 전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를 결속시키는 것이 오스트리아와 결혼 동맹을 맺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여기고, 1385년 8월 14일 크레보에서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를 폴란드 여왕의 남편으로 삼자고 결의했다. 다만, 그들은 요가일라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세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 모두 리투아니아와 요가일라에게 무리한 조건이었지만, 요가일라는 폴란드에서 요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크레보 조약이 성립된 뒤, 크라쿠프의 영주 도비에스와프 쿠르즈벤츠키는 바벨 성으로 들어오려던 빌헬름을 문전박대했다. 15세기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정혼자와 함께 실롱스크로 탈출하기 위해 도끼로 바벨 성문을 부수려 했지만 왕관을 관리하던 고라지의 디미트르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는 낭만적으로 윤색되었을 뿐,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1386년 1월 11일, 폴란드 귀족들은 볼로비스크에서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하고 20만 플로린을 오스트리아에 보내겠다고 밝혔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에게 여왕이 그의 아내가 되기로 동의했다고 알렸다. 요가일라는 즉시 크라쿠프로 가서 1386년 2월 15일에 세례성사를 받고 브와디스와프라는 새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사흘 후인 2월 18일, 바벨 대성당에서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주 뒤인 3월 4일에는 요가일라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크레보 조약의 첫 번째 조건과 세 번째 조건이 이뤄졌지만, 두 번째 조건은 리투아니아 독립파를 이끌던 요가일라의 사촌 비타우타스가 만만찮은 세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지켜지지 않았고 야드비가, 요가일라, 비타우타스가 모두 죽고 야기에우워 왕조[4]가 끝난 뒤인 1572년에 귀족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면서 지켜졌다.

오랜 세월 이교도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던 튜튼 기사단은 이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이대로는 리투아니아를 공격할 명분을 잃게 되고, 장차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폴란드 영주와 주교들이 야드비가를 협박해 요가일라와 결혼시키게 했다고 비난했고, 요가일라는 폴란드를 가로채기 위해 기독교로 거짓 개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교황 특사 람푸냐노의 마피올루스를 크라쿠프로 파견해 요가일라와 야드비가의 결혼에 대해 조사하게 한 뒤, 마피올루스의 보고를 접수한 후 두 사람의 결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선포했다.

1387년 봄, 폴란드 왕국은 헝가리 왕국이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지난날 헝가리가 점령했던 루테니아 왕국을 공략했다. 이때 야드비가 본인이 원정군과 함께 가서 현지 총독들로부터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항복을 받아냈다고 전해진다. 1387년 3월 8일에는 리비프 시의 특권을 확인했다. 1387년 9월 26일, 몰다비아 공국의 공작 표트르 1세는 그동안 주군으로 모셨던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를 끊고 야드비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1395년 야드비가의 누이 마리어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마리어의 남편이자 룩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아들인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헝가리의 상속자"라는 칭호를 채택했지만, 남편이 헝가리 왕위를 되찾게 해주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데다 교황령오스만 술탄국을 상대로 일어난 십자군에 가담한 지기스문트를 지지하자, 어쩔 수 없이 뜻을 거두었다.

1397년,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만나 협의한 끝에 지기스문트가 갈리치나 루테니아 일대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영구적으로 양도하는 대가로 몰다비아에 대한 주권을 헝가리에게 반납했다. 이후 야드비가는 이노브로츠와프에서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융잉겐과 만나서 도브진을 폴란드 왕국에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튜튼 기사단이 이 지역을 포기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후 그녀는 폴란드 지식인들을 자신의 궁정에 모여서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시편폴란드어로 번역하도록 의뢰했다. 또한 수도원에 많은 자금을 기부하고 새 성당 건립에 투자했으며, 빈민들을 구제하고 병원을 돌봤다.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세웠으며, 교황의 동의를 얻어 크라쿠프 대학교에 신학부를 설립했다.

1399년 6월 22일, 야드비가는 딸 엘즈비에타를 낳았다. 그러나 엘즈비에타는 1399년 7월 13일에 사망했고, 야드비가는 산후병에 시달리다 1399년 7월 17일에 사망했고, 7월 19일에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크라쿠프 대학교 교장인 스칼브미에츠의 스탄니스와프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왕은 성직자의 보물이요, 가난한 이들의 이슬이요, 교회의 기둥이요, 고관들의 자비로움이요, 시민들의 다정한 보호자요, 가난한 이의 어머니요, 빈민의 피난처요, 고아들의 수호자였으며, 약자의 닻이자 모든 신민의 수호자였다."

야드비가는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한 보석들을 매각해서 카지미에시 3세 시절 건설되었다가 방치되었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를 재건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유언에 따라 1400년 대학을 다시 열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 본인은 문맹이었지만 야드비가의 부탁을 생각해서 이후로도 예술과 학문에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 시성

1426년, 그니에즈노 대주교 보이치에흐 야스트르제비에츠는 사도좌에 야드비가에 대한 시복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많은 정치적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도중에 흐지부지되었다. 1949년, 크라쿠프 대주교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가 야드비가를 시복해달라는 청원서를 사도좌에 제출했다. 1950년 야드비가의 생전 행적과 기적 행위 등을 수집한 자료가 로마로 보내졌다. 그러나 사도좌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복 절차를 시작하지 않았다.

1974년, 크라쿠프 대주교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가 야드비가 여왕이 폴란드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후 1978년 10월 16일 카롤 유제프 보이타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즉위하면서, 야드비가에 대한 시복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첫번째 폴란드 순례 이틀 전인 1979년 5월 31일에 야드비가의 공적 공경을 승인함으로서 그녀를 시복했고, 1979년 6월 8일 크라쿠프 대교구 대회 폐막식에서 그녀를 기리는 미사를 거행했다.

이후 폴란드 각계에서 야드비가를 시성해 달라는 요청이 교황청에 빗발쳤고, 크라쿠프 교구 차원에서 시성 절차가 실시되었다. 1994년 12월 18일, 교황청은 크라쿠프 교구 차원의 시성 절차가 끝난 직후에 그 타당성을 인정한다는 교령을 발표했다. 1996년 12월 17일 야드비가의 영웅적인 덕행에 관한 교령이 발표되었고, 1997년 4월 8일에는 1950년 안나 로미셰프스카가 야드비가 여왕의 전구를 청한 기도를 드린 후 치유되었음이 확인되었다는 교령이 발표되었다.

1997년 6월 8일, 야드비가 여왕의 시성식이 크라쿠프 교구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이는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시성식이었다. 이날 교황은 야드비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녀의 짧은 인생의 가장 깊은 특징이자 그녀의 위대함의 척도는 봉사 정신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재능, 사생활 전체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바쳤으며, 왕직의 임무를 받았을 때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도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후 야드비가 여왕의 축일은 시성식이 열린 날짜에 맞춰 6월 8일로 확정되었으며, 폴란드의 수호성인이자 리투아니아의 사도로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폴란드의 여러 도시 당국은 야드비가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세우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4. 기타

파일:Jadwiga_Civ6_Splash.jpg

문명 6에서 DLC로 추가된 폴란드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같은 DLC에 동봉된 시나리오 야드비가의 유산(Jadwiga's legacy)에선 폴란드, 리투아니아, 볼히니아를 고를 수 있는데, 이 시나리오에서 야드비가는 등장하지 않으나 시나리오의 시작 년도인 1385년은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결혼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동군연합이 세워진 해다.

위 사진처럼 헝가리 앙주 왕조의 문장을 상징하는 의복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푸른 바탕에 백합은 카페 왕조의 문장이고 붉은색은 헝가리의 문장이다.

가톨릭굿뉴스에서 검색할 수 있는 성인 정보에서 "야드비가"라고 검색하면 찾을 수 없고, 신분 항목에서 여왕으로 검색하거나 항목에서 찾으면 "성녀 헤드비지스"가 나오는데 헤드비지스(Hedvigis)는 야드비가를 라틴어로 표기한 이름이다.

신을 죽이는 방법에서 등장하는 성녀의 모티프란 추측이 있다.

2021년 8월 11일 발매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2번째 확장팩 군주들의 여명에서 그녀가 주인공인 캠페인이 등장한다. 특이하게 선교사 영웅으로 등장하며, 선교사를 기반으로 했기에 아군 치료 및 적군 전향이 가능하다. 남편인 요가일라와 마찬가지로 전투시 능력치가 증가하는 트리거가 존재하기에 전투에 오래 굴림과 동시에 오래 생존시키는 것이 좋다. 끝까지 키우면 힐량이 엄청나게 좋아진다. 전반적인 스토리는 요가일라와 결혼 후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기틀을 마련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1] 1373년생이 사실이든 1374년생이 사실이든 25세에 죽은 건 변함의 여지가 없다.[2]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이었던 알브레히트 1세의 증손자.[3] 몇몇 자료에서는 야드비가가 여성형 칭호인 'regina(여왕)'가 아니라 남성형인 'rex(왕)'의 칭호로 대관했다고 하지만, 당대에 발행된 문서에는 'regina'로 명백하게 기술되었다.[4] 요가일라를 폴란드어로 읽으면 야기에우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