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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2:42:19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

보스니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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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치 쿨린 스테판 쿨리니치 마테이 니노슬라프 프리예즈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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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브르트코 1세 부크 코트로마니치 트브르트코 1세 }}}}}}}}}

<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10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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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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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jepan II Kotromanić}}}
출생 미상
사망 1353년 9월 28일
재위 보스니아
1314년 ~ 1353년
아버지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
어머니 엘리자베타 네마니치
형제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 니노슬라프 코트로마니치
아내 오르텐부르크 백작의 딸, 불가리아 황제의 딸, 엘즈비에타 피아스트
자녀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 카타리나 코트로마니치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행적3. 가족
3.1. 아내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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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제10대 반(Ban). 보스니아의 영역을 대거 확장해 보스니아 왕국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2. 행적

보스니아 반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엘리자베타 네마니치의 장남이다. 형제로 볼레슬라프 코트로마니치, 니노슬라프 코트로마니치가 있었다. 스테판 1세 통치 기간 동안, 보스니아 대부분은 수비치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스테판 1세는 스레브니크 지역만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1314년 스테판 1세가 사망한 뒤 그가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아직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1314년 말에 믈라덴 2세 수비치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자녀들과 함께 두브로브니크로 망명했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두브로브니크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보스니아 대부분은 수비치 가문의 지배를 받았지만, 보스니아에서 강력한 입지를 다진 보고밀파를 신봉하는 귀족 및 민중들은 여전히 스테판 2세를 적법한 후계자로 여기고 수비치 가문에 항전했다. 믈라덴 2세는 보스니아를 안정시키려면 스테판 2세와 타협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지했다. 그는 스테판 2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고, 카란티아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오르텐부르크 백작 마인하르트의 딸들 중 한 사람과 스테판 2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교황청은 스테판 2세가 이단인 보고밀파 신도일 가능성이 있다며 결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지만, 믈라덴 2세의 연이은 설득에 결국 1319년 결혼을 허락하기로 했다.

스테판 2세는 초기엔 믈라덴 2세의 화해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믈라덴 2세가 보스니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믈라덴 2세를 주권자로 받드는 것도 동의했다. 하지만 믈라덴 2세는 여전히 보스니아의 반을 칭하는 등 기회만 되면 보스니아를 직접 통치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스테판 2세는 이런 믈라덴 2세의 영향력을 배제하지 않으면 보스니아에서 실권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던 1321년 말, 크로아티아에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믈라덴 2세를 배제하길 원한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지시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국경에 군대를 집결했다. 1322년 카로이 로베르트와 믈라덴 2세와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카로이 로베르트 편에 참전했다. 믈라덴 2세가 전쟁에서 패한 뒤 카로이 로베르트에게 체포되어 헝가리로 끌려간 후, 스테판 2세는 체티나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이르는 달마티아 해안 도시들과 보스니아 전역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1322년, 스테판 드라구틴의 아들이며 스렘의 왕이었지만, 부친이 사망한 뒤 삼촌인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밀루틴과 밀루틴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탈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스렘으로 돌아간 뒤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세르비아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주화를 주조했다. 스테판 2세는 불가리아 국왕 미하일 아센 3세,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함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 대항했다. 하지만 전세가 데찬스키 쪽으로 기울자 블라디슬라프에 대한 지원을 끊고 1324년 세르비아 북부 지역인 우소라와 솔리를 빼앗았다. 이후 볼레슬라프가 헝가리 왕국으로 축출된 뒤, 스렘 왕국 일부를 획득했다. 한편, 스테판 2세는 보스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수많은 특권을 줬는데, 특히 여러 귀족에게 주파(župa: 교구)를 하사했다. 또한 1326년 형제인 블라디슬라프를 보스니아 대공에 선임했으며, 자신과 통치권을 공유한다고 밝혔다. 다만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건 어디까지나 스테판 2세뿐이었다.

1323년, 크로아티아의 넬리피치 가문이 이반 넬리피치의 주도하에 헝가리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에 카로이 로베르트는 스테판 2세에게 슬라보니아 반 니콜라 오모디예프에게 가담해 넬리피치 가문에 대한 합동 공세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스테판 2세는 지원군을 보냈지만, 니콜라 오모디예프의 원정은 실패했다. 1324년 여름, 오미슈, 닌, 클리스 영주인 죄르지 2세 수비치가 카로이 로베르트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이반 넬리피치와 대결했을 때, 그는 죄르지 2세를 지원했다. 그러나 죄르지 2세는 크닌 인근에서 참패한 뒤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반 넬리피치는 뒤이어 보스니아를 침공해 비수차 시를 공략했지만, 보스니아 귀족 부크 부코슬라비치가 반격해 비수차 시를 탈환했다. 그 후 스테판 2세는 넬리피치 가문의 원정을 지원한 트로기르 시 주변 일대를 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트로기르 시민들은 1326년에 그를 "보스니아, 우소라, 솔리, 훔 및 기타 여러 지역의 통치자이자 주인인 위대하고 강력한 군주"로 떠받들겠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에 서명해야 했다.

파일:보스니아 반샤그 최대 영역.png

1325년, 카로이 로베르트는 넬리피치 가문을 상대로 고전하는 니콜라 오모디예프를 경질하고 미카크 미할예비치를 슬라보니아의 새 반으로 선임했다. 미카크는 그해 여름 크로아티아로 진군했고, 스테판 2세는 이를 돕기 위해 여러 함대를 파견했다. 1326년, 미카크는 여러 도시를 공략한 뒤 크로아티아로 더 깊이 진군해 스테판 2세의 지원군과 합세했다. 그러나 넬리피치 가문이 강력한 수비 위치를 선점하고 농성하는 걸 뚫지 못하다가 군대 일부를 미하치로 보내 넬리피치 가문의 반격을 저지하게 한 뒤 헝가리로 후퇴했다. 스테판 2세는 미카크의 원정을 도우면서 체티나 강과 네레트바 강 어귀 사이의 영토를 홥병해, 보스니아 반샤그의 영역은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확장했으며, 리반스코, 두반스코, 글라모치코 등 카르스트 폴레 지역을 합병했다. 이후 이 지역은 자파드네 스트라네(Zapadne Strane, 서쪽 지역)로 일컬어졌다. 1326년, 스테판 2세는 라구사 공화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를 공격해 자후믈례를 공략하고 네레트바 강 하구에서 코나블레까지 이르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더 넓은 지역을 확보했으며, 이모츠키, 리브노, 두브노, 글라모치, 그라호브 시와 요새도 공략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과거에 자후믈례 일대를 지배하는 브라니보예비치 가문이 자기가 선임한 총독들을 공격해 살해한 것에 원한을 품었기에, 스테판 2세가 자후믈례를 휩쓰는 걸 방관했다. 하지만 스테판 2세가 자후믈례를 공략하고 브라니보예비치 가문의 구성인 2명을 살해하고 브란코 브라니보예비치가 세르비아로 망명한 뒤 도움을 요청하자, 스테판 2세와 세르비아와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다. 1329년, 스테판 2세는 세르비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트레비네와 코나블리를 공격했다. 그러나 프리보이 부근에서 데찬스키의 아들인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이끄는 군대의 습격으로 참패했다. 스테판 2세는 전투 도중 말이 죽는 바람에 낙마했고, 가신인 부크 부코슬라비치가 말을 건네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부코 슬라비치는 스테판 2세를 대신해 세르비아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끝내 전사했다. 자후믈례인들은 대부분 스테판 2세의 통치를 받아들였지만, 페타르 톨예노비치만은 달랐다. 그는 자후믈례의 수도인 포포보에 군림하며 스테판 2세에 항전했고, 공략한 영토를 세르비아에 반환했다. 이에 스테판 2세는 토벌대를 보내 그를 격파하고 생포한 뒤, 족쇄에 채운 후 말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한편, 교황청은 보스니아에서 보고밀파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파비안을 슬라보니아의 심문관으로 임명해 보스니아에서 이단을 근절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교황청은 보스니아의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에게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1337년, 크로아티아의 실권자 이반 넬리피치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과거에 보스니아가 크로아티아 통치자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며, 자기를 보스니아의 주권자로 인정해준다면 이단을 타도하겠다고 제안해 승인을 얻어냈다. 스테판 2세는 이에 대응해 1338년 동생 블라디슬라프와 믈라덴 3세 수비치의 자매인 옐레나 수비치의 결혼을 주선해, 넬리피치 가문과의 전쟁에서 수비치 가문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여기에 믈라덴 3세 수비치의 아내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자매인 옐레나 네마니치였기 때문에, 코트로마니치, 수비치, 네마니치 가문의 동맹이 결성되었다.

1339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제라르가 보스니아 반샤그를 방문해 보고밀파에 대한 기소를 하는 것을 놓고 스테판 2세와 협상했다. 스테판 2세는 이단을 타도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고, 교황청은 이를 믿어보기로 하고 1340년 2월 그를 충성스러운 가톨릭 신자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가톨릭교회는 1340~43년 보스니아 전역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가톨릭 수도자들은 우소라와 훔에 여러 수도원을 건설했고, 라구사 공화국의 스톤으로 가는 길을 지나던 많은 보고밀파 신도들에게 세례성사를 줬다.

1342년 카로이 로베르트 왕이 사망한 뒤 미성년자인 러요시 1세가 헝가리의 새 국왕이 되었다. 스테판 2세는 이때를 틈타 보스니아를 헝가리로부터 독립시키고 보스니아 국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1343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 이반 넬리피치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과 넬리피치 가문간의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에 견고한 동맹이 형성되지 못했다. 1344년 이반 넬리피치가 사망한 뒤, 그의 미망인 블라디슬라바 쿠르자코비치가 어린 아들 이반의 이름으로 남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345년 6월, 러요시 1세가 크로아티아로 진군하자, 블라디슬라바는 도저히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항복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도 러요시가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앞다투어 귀순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테판 2세는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려던 마음을 접고, 자다르가 러요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치아 총독을 몰아내는 걸 도왔다.

이후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자후믈례 일대를 돌려달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자, 스테판 2세는 네레트바 강 어귀에 요새를 대거 건설해 그의 침략에 대비했고, 두샨이 발칸 반도 남부 일대를 공략하는 데 관심이 쏠린 틈을 타 1349년 약탈부대를 파견해 코나블레와 트라브니야를 황폐화했다. 이에 격노한 두샨은 1350년 군대를 소집해 보스니아를 침략할 준비를 했다. 스테판 2세는 정면 대결로는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두샨을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적을 험준한 지역으로 유인한 뒤 습격해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두샨은 적군의 유인책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고 보스니아 지역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대거 끌어들였고, 스테판 2세는 보보바츠에 고립되어 세르비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보보바츠 공략에 애를 먹은 데다, 보스니아인들의 유격 전술에 고전했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6세가 소규모 병력을 일으켜 칼키데스 반도를 점령한 뒤 베리아와 보덴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샨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스테판 2세는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은 뒤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고, 두샨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두샨의 후계자 스테판 우로시 5세와 스테판 2세의 딸 엘리자베타가 결혼하기로 했고, 자후믈례 일대는 지참금으로서 세르비아에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테판 2세는 약속을 깨고 1353년 6월 엘리자베타를 헝가리 왕 러요시 1세와 결혼시켰다.

그 후 스테판 2세는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었고, 1352년부터 자신을 보스니아의 헤르초크(Herzog)로 칭했다. 그러던 1353년 9월 28일에 사망했고, 비소코 인근 밀레에 있는 성 니콜라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형제 블라디슬라프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트브르트코 1세가 뒤를 이어 보스니아의 반이 되었다.

3. 가족

3.1. 아내

3.2.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