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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0:46:25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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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카지미에시 4세
Kazimierz IV
파일:Kazimier_Jagajłavič._(1645).jpg
이름 카지미에시 안제이 야기엘론치크
(Kazimierz Andrzej Jagiellończyk)
출생 1427년 11월 30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492년 6월 7일 (향년 64세)
리투아니아 대공국 가르디나스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440년 6월 29일 ~ 1492년 6월 7일
폴란드 왕국의 왕
1447년 6월 25일 ~ 1492년 6월 7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1454년 결혼)
자녀 울라슬로 2세,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조피아, 엘즈비에타, 지그문트 1세,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
어머니 조피아 홀샨스카
형제 브와디스와프 3세, 카지미에시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리투아니아 대공2.3. 형 브와디스와프 3세의 사망과 폴란드 공위기2.4. 폴란드 국왕
2.4.1. 초기 치세2.4.2. 13년 전쟁2.4.3. 보헤미아 왕위 계승 전쟁2.4.4. 오스만 제국크림 칸국과의 전쟁2.4.5. 말년
3. 가족4. 평가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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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어: Kazimierz IV Jagiellończyk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리투아니아어: Kazimieras IV Jogailaitis (카지미에라스 요가일라이티스)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3대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19대 대공.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13년 전쟁을 치른 끝에 158년만에 단치히-포메른을 되찾았으나, 대외전쟁에 귀족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귀족들의 특권을 점점 강화했다가 왕권이 매우 약해지고 귀족들의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멸망의 씨앗이 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427년 11월 30일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와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의 심복이었던 이반 홀샨스키의 손녀인 넷째 왕비 조피아 홀샨스캬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두 형제로 브와디스와프 3세와 카지미에시(1426 ~ 1427)가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427년, 폴란드 궁정은 심각한 스캔들에 휘말렸다. 조피아 왕비가 표트르 쿠로프스키, 얀 크라스카, 얀 코니에츠폴스크, 바브지니에츠 자랭바, 그리고 슈체코치니 출신의 피오트르와 도비에슬라프 형제 등 6명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고발을 당한 것이다. 피고인 중 얀 코니에츠폴스크, 슈체코니 출신의 두 형제는 탈출했고, 나머지는 투옥되었다. 만약 조피아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그는 사생아로 격하될 게 자명했다. 이에 조피아는 1427년 11월 카지미에시 4세를 낳은 뒤 "내가 결백하지 않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죽음을 내려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정화의 맹세(iuramentum purgatorium)'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건을 기각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재판은 아무런 결론 없이 종결되었다.

출생 직후인 1427년 12월 21일에 세례를 받았고, 앞서 사망한 둘째 형 카지미에시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머니 조피아와 그니에즈노 대주교 빈첸티 코트, 리트로의 기사 피오트르의 훈육을 받았다. 그는 폴란드어러시아어를 숙달했고, 체력도 단련했다. 특히 사냥을 좋아해 종종 리투아니아 숲으로 가서 들소 등을 사냥했다. 1434년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망한 후 맏형이 브와디스와프 3세로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지만 아직 10살이었기 때문에 통치를 직접 하지 못했다. 본래라면 어머니 조피아가 섭정을 맡아야 했지만, 루테니아계 여인이 폴란드 왕국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기 때문에,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니에프 올레스니키가 대신 섭정을 맡았다. 이에 조피아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폴란드 크라쿠프 대학교 총장이자 크루슈비차 주교 얀 사프라니에츠, 소폴란드의 비에츠 성주 스피테크 멜슈틴스키와 함께 올레스니키를 견제했다.

1437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황제였던 지기스문트가 사망했다. 올레스니키는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 3국과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로 선출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크로아티아 계승을 보장받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2세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후스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레스니키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올레스니키는 후스파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조피아는 아들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기회를 걷어차버린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올레스니키와 정쟁을 벌였다.

1438년 4월, 로키차니의 요한 대주교가 이끄는 보헤미아 귀족들은 쿠트나 호라에서 선거를 실시해 브와디스와프 3세의 동생 카지미에시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에 알브레히트 2세는 헝가리-크로아티아군을 이끌고 프라하로 진군한 뒤 6월에 보헤미아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자 보헤미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셍지워이 오스트로로그, 얀 텡친스키가 지휘하는 5,000명의 폴란드군이 이들과 합류해 알브레히트 2세를 몰아붙였다. 결국 보헤미아에서 물러난 알브레히트 2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징발해 보헤미아 반란 세력 및 폴란드군과 대결했다. 알브레히트 2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대에 작센,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아 보헤미아로 진군해 프라하에 입성하자, 5,000명의 폴란드군과 보헤미아 반란군은 타보르 요새로 후퇴했다. 1438년 가을, 양측은 젤레니체 전투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알브레히트 2세가 승리를 거뒀지만 적을 궤멸시키는 데엔 실패했고, 폴란드-보헤미아 연합군은 패배에 굴하지 않고 항전을 이어갔다.

1439년, 스피테크 멜슈틴스키의 지휘하에 노베 미아스토 코르친에서 귀족 연합이 신설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간섭하려 드는 즈비그니에프 올레스니키 주교를 실각시킬 때까지 싸우기로 맹세했다. 조피아 왕비는 초기엔 이들을 지지했지만, 올레스니키가 단호한 태도로 군대를 동원해 맞서는데다 본인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자, 입장을 바꿔 올레스니키 주교와 타협하고 스피테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결국 반란군은 그로트니키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피테크는 전사했다. 이후 올레스니키는 스피테크 등이 추진했던 카지미에시 4세의 보헤미아 국왕 옹립 계획을 백지화했다.

2.2. 리투아니아 대공

1440년 3월 20일, 리투아니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알렉산데르 차르토리스키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빌뉴스 총독 요나스 다우기르다스, 트라카이 총독 페트라스 렐류샤스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올레스니키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설득해 당시 12살의 소년이었던 카지미에시를 리투아니아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계승 문제로 정신없는 틈을 타 1440년 6월 29일 카지미에시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옹립했다. 당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놓고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내세운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을 치르는데 바빴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를 승인했다. 카지미에시는 유아세례를 받은 최초의 리투아니아 가톨릭 군주였다.

초기에는 어린 카지미에시를 대신해 요나스 고슈타우타스(Jonas Goštautas ?~1458)가 고문의 자격으로 통치를 행사했다. 어린 카지미에시는 고슈타우타스에게 리투아니아어와 리투아니아의 문화, 관습을 배웠지만 점차 고슈타우타스의 간섭에서 벗어나 리투아니아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고슈타우타스에게 적대적인 귀족 가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1440년 또는 1441년, 스몰렌스크에서 리투아니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안드류스 사카이티스를 스몰렌스크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후 사모기티아의 행정 및 사법부의 자율성을 인정했고, 사모기티아가 빌뉴스트라카이 등 리투아니아 수도권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했다.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포들라스키에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1444년, 카지미에시는 포들라스키에의 도브진을 놓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왕국에 속한 마조프셰 공국 사이의 분쟁을 매듭지었다. 그는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4세에게 6,000 프라하 그로센을 지불하고 도브진을 구입했다. 이 성과에 고무된 리투아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카지미에시에 대한 지지도가 상승했다. 1444~1445년에는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노브고로드 공화국간의 전쟁에 개입해 노브고로드 공화국에게 병력을 지원했으며, 1444년부터 뱌지마강 유역을 놓고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을 벌여 1448년까지 교전을 이어가다가 현상 유지 및 타타르에 대항한 동맹을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2.3. 형 브와디스와프 3세의 사망과 폴란드 공위기

1444년 11월 10일, 폴란드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국왕이었던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국무라트 2세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엔 브와디스와프 3세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폴란드 귀족들은 한동안 브와디스와프 3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자, 1445년 4월 시에라츠에서 회의를 소집해 카지미에시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카지미에시가 폴란드 왕위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자신들의 고귀한 특권을 확인 및 확장하며,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종속시키길 바랐다. 그러나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귀족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위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폴란드 귀족들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형이 확실히 죽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자신은 형의 귀환을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카지미에시가 폴란드 왕위 계승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자, 올레스니키는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종속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리투아니아 대공을 세우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보다 앞서, 전임 리투아니아 대공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의 외아들 미하즈우슈카 지기만타이티스는 아버지가 살해당한 뒤 사모기티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놓고 카지미에시와 적대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마조프셰 공국에 망명간 상황이었다. 올레스니키는 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내세워서 카지미에시를 압박하려 했다. 이에 카지미에시는 미하즈우슈카가 리투아니아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튜튼 기사단장 콘라드 폰 콘라트 폰 에를릭스하우젠과 폴란드를 공동으로 견제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에도 카지미에시가 폴란드 왕위에 오르는 것을 고의로 지연시키자, 올레스니키는 폴란드 왕위에 대한 다른 후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다른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호응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에 카지미에시 4세의 모친인 조피아 왕비가 나섰다. 1446년 4월 24일, 빌지체에 열린 회의에 참석한 소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를 폴란드 국왕으로 선포하고 리투아니아 출신인 피오트르 쿠로프스키에게 카지미에시를 설득하게 했다.

이후 어머니와 쿠로프스키의 간절한 설득을 받은 카지미에시는 1446년 9월 17일 폴란드 왕위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고 이리하여 장장 3년간 이어졌던 폴란드 공위기는 막을 내렸다. 대신, 리투아니아가 폴란드 왕위에 속한다는 것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도록 했다. 이 때부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2개의 동등한 국가 기구를 구성하게 되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동등한 지위로 취급되었다. 1447년 5월 2일, 카지미에시는 빌뉴스에서 리투아니아 영토의 불가침성을 보장해 폴란드 영주들이 더 이상 현재 리투아니아에 속한 볼히니아와 포돌리아 동부를 요구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카지미에시 특권(Kazimiero privilegija)'을 반포했다. 이 법령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모든 공직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람(리투아니아인, 루테니아인)으로 채워졌지만, 농민들은 리투아니아 대공이 아닌 농민들의 주인 귀족에게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고 리투아니아 인구 대부분이 대공 산하의 자유민이 아닌 귀족 소유의 농노로 전락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의 세수와 자유민이 크게 줄었고 결과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의 권한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2.4. 폴란드 국왕

2.4.1. 초기 치세

1447년 8월 25일, 카지미에시 4세는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빈첸티 코트의 주관으로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폴란드 국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여러 차례 세웠던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니에프 올레스니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기로 했다. 때마침 1447년부터 1449년까지 교황 니콜라오 5세대립교황 펠릭스 5세간의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올레스니키가 펠릭스 5세를 지지하자, 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니콜라오 5세를 교황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대가로 성직과 교회 직위를 자기 지지자들로 채울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니콜라오 5세는 그에게 20명의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고 타타르와의 싸움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1만 두카트를 모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1448년, 미하즈우슈카 지기만타이티스가 크림 칸국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스타로두보,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를 공략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공격으로 체포된 뒤 모스크바로 끌려갔다가 1452년경에 중독사했다. 카즈미에시 4세는 미하즈우슈카를 지지했던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고, 올렐케 브워지미에조비차를 새 키예프 총독으로 선임했다.

1449년, 니콜라오 5세는 펠릭스 5세를 물리치고 정통 교황으로서 인정받았다. 니콜라오 5세는 올레스니키와 화해한 뒤 카지미에시 4세에게 내려줬던 특권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폴란드 주교를 임명했다. 이로 인해 파문을 선고받았지만 무시했다. 이리하여 폴란드 교회에 추종자들을 마음껏 임명할 수 있게 된 카지미에시 4세는 1452년 성신 강림 축일에 올레스니키 반대자 및 추종자들을 산도미에시로 불러모아 일주일간 회의를 열고 올레스니키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카지미에시 3세의 유대안에 대한 관용 조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폴란드 국왕이 된 이래 귀족들의 특권을 좀처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대폴란드의 여러 귀족들이 올레스니키를 지지하면서 내전이 발발할 위기에 봉착하자, 카지미에시 4세는 일단 올레스니키와 화해했다. 올레스니키는 이후에도 카지미에시 4세와 지속적으로 반목하면서도 크라쿠프 주교직을 유지하다가 1455년에 사망했다.

1453년 6월 24일,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왕실 귀족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4세는 장차 있을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에서 귀족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그들의 특권을 공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 폴란드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자 루스의 세습 영주인 카지미에시는 이 거룩한 복음을 바탕으로 나의 폴란드 왕국의 성직자와 세속적 모든 권리, 자유, 특권, 유증 및 보조금을 다음과 같이 맹세하고 맹세하며 약속한다. 교회와 폴란드 왕국, 주교와 공작, 영주, 기사, 도시, 주민, 일반적으로 모든 계급과 직업의 모든 신민, 왕자, 왕, 통치자 및 모든 영주와 상속인에게. 축복받은 기억의 폴란드 왕국, 즉 내 아버지 브와디스와프와 내 형제 브와디스와프에 의해 폴란드 국왕들이 부여하고 부여한 것을 모든 조건과 설명 하에서 유지하고 유지하고 실행할 것이다. 이 왕국에서 부당하게 분리되거나 분리된 것이 무엇이든,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복원하고 국가 전체와 통합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국경을 축소하지 않을 것이며, 온 힘을 다해 국경을 방어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그 후 카지미에시 4세는 피오트르쿠프에서 공언한 대로 확장정책을 실시했다. 1454년 3월 실롱스크에 속한 오시비엥침 공작 얀 4세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봉건적인 맹세를 강요하였으며, 1456년에는 자토르 공국을 획득했고, 1457년 2월에는 오시비엥침 공국을 구매해 폴란드 왕국으로 통합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주요 목표는 튜튼 기사단이 장악하고 있던 단치히-포메른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탈취한 이래 폴란드와 오랜 세월 무력 충돌을 벌였고, 폴란드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으며, 폴란드인들이 포메른 도시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결과 비스와강발트해 연안의 도시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경제적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제압하고 고토를 회복하기로 마음먹었다.

2.4.2. 13년 전쟁

1440년, 독일 기사단국 내 반 튜튼 조직인 '프로이센 연맹'이 설립되었다. 귀족과 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폴란드 통치자들에게 프로이센의 권력을 장악할 것을 수시로 요청했다. 1453년 1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튜튼 기사단의 요청에 따라 프로이센 연맹을 즉각 청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연맹은 이에 따르지 않고 1454년 2월 6일 기사단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기사단의 본거지인 마리엔부르크와 슈툼을 제외한 프로이센 전역이 연맹에 넘어갔다. 이후 연맹은 크라쿠프로 사절을 보내 카지미에시 4세에게 프로이센 전체를 바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454년 3월 6일, 연맹 대표들은 2주간의 협상 끝에, 폴란드에서 분리된 포메른의 정당한 상속인인 폴란드 국왕에게 프로이센 전체를 바친다는 내용의 공식 문서를 발행했고, 카지미에시 4세는 프로이센 합병 법안을 반포했다. 카지미에시 4세가 반포한 법은 모든 국가 특권과 지역 권리의 유지를 보장하고 폴란드 귀족과 동일한 권리를 추가로 부여했으며, 가장 중요한 권리인 폴란드 국왕 선거[1]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프로인센 항구의 관세와 난파된 선박에서 일부 재산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튜튼 기사단이 도입했던 모든 관세와 수수료가 폐지되었으며, 프로이센 상인들은 폴란드에서 무역의 자유를 얻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대응해 신성 로마 제국 내 용병들을 고용한 뒤 반격을 개시해 그해 3월 코니츠(Konitz)[2]를 탈환했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에게 노이마르크[3]를 넘겨주는 대가로 독일과 보헤미아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이에 카지미에시 4세는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폴란드 귀족들은 전쟁에 회의적이었고, 왕이 새로운 특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카지미에시 4세는 '니에샤바 특권(przywileje nieszawskie)'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세임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세금을 채택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아야 하며, 귀족이 제시한 후보자를 영지의 주인, 법원 관리, 서기 등에 임명하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왕의 직속 관료들은 각 지역의 의장을 맡은 스타로스타 직책에 선임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 특권으로 왕권은 약화된 반면 귀족들의 권한은 강력해졌고, 세임의 역할이 늘어나면서 장차 폴란드 정국이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니에샤바 특권 반포 후, 대폴란드와 프로이센, 그리고 용병 부대 18,000명이 카지미에시 4세에게 귀속되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대폴란드에서 징발되었고, 카지미에시 4세와 포즈난 지사 우카시 구르카, 칼리슈 지사 스타니스와프 오스트로그, 브제크 지사 미코와이 샤를레이스키 등이 군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군자금이 부족해 전투력이 우수한 용병대를 제대로 고용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1454년 9월 18일 코니츠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튜튼 기사단에게 참패했다. 그후 기사단은 잃어버린 요새 상당수를 탈환했다.

상황이 이렇듯 악화되자, 카지미에시 4세는 보헤미아 왕관령 출신 용병을 고용해 포메른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폴란드 왕국 전역에 징수금을 한꺼번에 거둬들이기로 했다. 이에 소폴란드 귀족들이 오포카에서 그가 대폴란드 귀족들과 맺었던 니에샤바 특권에서 제시한 것과 유사한 특권을 자신들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했고, 카지미에시 4세는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후 카지미에시는 1454년 11월에 왕이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때, 군대 동원을 부과할 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때 귀족들의 의회인 세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니에샤바 특권을 허락함으로써 귀족들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많은 특권을 귀족들에게 넘긴 대가로 3,0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용병을 새로 고용하는 데 성공한 뒤, 카지미에시 4세는 반격에 착수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들과 공개 전투로 싸우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피했고, 폴란드군은 오스트리아 용병 프리츠 라베네크(Fritz Raweneck)가 수비대장으로 있던 레센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을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공성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후 카지미에시 4세는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돈을 빌렸고, 포메른-슈톨프 공작 에리히 2세에게 2개 도시를 영지로 주는 대가로 그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에서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그는 그곳으로 가서 1455년 여름까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튜튼 기사단은 카지미에시 4세가 리투아니아로 가서 포메른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1455년 4월 17일 쾨니히스베르크를 포함한 프로이센 동부 일대를 회복했다. 이들이 이토록 빨리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카지미에시 4세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메른 각지에 대규모 전쟁세를 매겨서 민심이 악화된 것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크나이호프(Kneiphof)[4]는 동프로이센에서 유일하게 카지미에시 4세에 대한 충성을 이어갔지만, 튜튼 기사단장 하인리히 로이스 폰 플라우엔이 지휘하는 기사단의 포위 공격 끝에 1455년 6월 14일에 함락되었다. 폴란드군은 이후에도 연달아 패전했고, 나중에는 바르미아를 상실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했다. 그러자 보헤미아인 올드르지흐 체르벤카(Oldřich Červenka)가 이끄는 용병대는 마리엔부르크, 디르샤우, 아일라우를 무단으로 점령한 뒤 폴란드 측과 협상한 끝에 1457년 6월 6일에 이 성들을 매각했다. 올드르지흐는 폴란드 치안관이 되었으며, 다른 3개의 영지도 별도로 수여받았다. 기사단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를 새로운 동맹자로 끌어들이기도 했지만, 크리스티안 1세는 스웨덴 섭정 대 스텐 스투레와의 전쟁에 몰두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후 양측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중재하에 평화 협상을 벌였다. 이때 폴란드 측은 튜튼 기사단에게 이교도인 타타르족의 영역 인근의 포돌리아로 가서 타타르족과 맞서 싸워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자간의 의견 차가 너무 컸기에,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1457년 9월 28일, 베른하르트 폰 치넨베르크(Bernhart von Zinnenberg)가 이끄는 용병군은 폴란드에 넘어간 것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마리엔부르크를 기습 공격했다. 그 결과 올드르지흐가 버틴 성채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튜튼 기사단에게 넘어갔다. 그후 그들은 아일라우를 탈환하기도 했지만, 대폴란드에서 파견된 새로운 군대에게 저지되어 더 이상의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1458년 봄, 카지미에시 4세는 다시 마조프셰인들을 포함한 대규모 징병을 벌이고 리투아니아인과 타타르 보조군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한 뒤 프로이센으로 재차 진군했다. 포즈난 성주 샤모투위의 피오트르가 실질적으로 지휘한 이들은 그해 8월 10일 마리엔부르크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도로 탈취하기 위해 공세를 벌였지만, 양자간의 긴 협상과 피오트르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함락시키 못했다. 그 사이에 프로이센 남부에서 폴란드 통치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몇 개의 성을 점령하고 이를 튜튼 기사단에 넘겨줬다.

카지미에시 4세는 튜튼 기사단과 재차 협상을 벌여 튜튼 기사단에게 프로이센을 떠나 포돌리아로 가라고 재차 제안했다. 튜튼 기사단은 포돌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엔 동의했지만 프로이센을 떠나는 것은 거부했다. 이에 보헤미아 용병으로서 폴란드군에 배속되었다가 중재 역할을 맡은 얀 이스크라(Jan Jiskra z Brandýsa 1400~1469)는 폴란드가 프로이센 대부분을 차지하되, 일부는 튜튼 기사단이 계속 점유하게 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양자는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9개월간 휴전 협정을 맺고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나중에 프로이센 귀족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로이센에서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협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458년 7월, 스웨덴 국왕 칼 8세 크누트손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를 일시적으로 몰아내고 스웨덴 왕권을 회복했고, 칼 8세가 고용한 사략선에게 발트해 무역로가 차단당한 크리스티안 1세는 일시적으로 칼 8세와 휴전했다. 이리하여 크리스티안 1세가 보내주던 물자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지만, 튜튼 기사단은 이에 개의치 않고 1459년 폴란드를 향한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사단장 시보르 폰 바이젠의 지휘하에 대폴란드 북부의 도시들을 몇 달간 점령하는 등 폴란드에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는 튜튼 기사단에 속한 군인들을 왕국의 영토에 고용하기로 결정하고, 폴란드를 도왔던 올드르지흐와 그의 동료들을 체포해 투옥시켰다.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자,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 왕국과 프로이센의 부유한 도시인 단치히, 엘빙, 토른 등지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금을 최대한 끌어모인 뒤 새로운 군대를 동원했다. 1460년 3월 21일, 폴란드군은 마리엔부르크를 재차 포위한 뒤 포격을 퍼부은 끝에 7월 5일에 함락시켰다. 마리엔부르크 시장 블루메는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튜튼 기사단에게 마리엔부르크 성문을 열어줬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대응해 1460년 7월 프라우스트 근처에서 단치히군을 격파하고 단치히 교외를 불태웠다. 여기에 포메른-슈톨프 공작 에리히 2세가 소유하고 있던 레바, 푸치히, 라우엔부르크, 뷔토우를 공략했다. 여기에 프로이센의 성들과 도시들은 점점 튜튼 기사단 쪽으로 기울었다.

카지미에시 4세는 또다시 동원령을 내렸지만, 큰 소득이 없이 질질 끌기만 하는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귀족들은 동원령에 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폴란드 대귀족 안제이 텡친스키는 1461년 7월 16일 크라쿠프에서 갑옷 제작자인 클레멘스가 갑옷 수리를 만족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의된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만 지불했다. 이에 클레멘스가 항의하자, 안제이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후 그는 크라쿠프 시장에게 귀족에게 감히 불손한 언사를 내뱉은 클레멘스를 체포하라고 요청했고, 시장은 이에 따랐다. 클레멘스는 곧 체포되어 끌려가던 중 안제이와 마주치자 "당신은 제 집에서 저를 수치스럽게 때렸지만, 더 이상 저를 때리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소리쳤고, 안제이는 다시 그를 마구 구타해 초주검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자 대귀족의 오만하고 가혹한 태도에 분노한 크라쿠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안제이는 자신의 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버티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아들 얀 텡친스키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란시스코회 수도원으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폭도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유해는 거리로 질질 끌려다니며 훼손되었다. 포메른 전선에서 튜튼 기사단의 공세를 어렵게나마 저지하고 있던 카지미에시 4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급히 크라쿠프로 달려가서 폭동을 수습한 뒤 재판을 열어서 폭동 주모자 6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크라쿠프 시에 벌금 80,000 플로린을 부과했다.

가장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던 안제이 텡친스키의 불미스런 죽음 이후, 대다수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 귀족들의 사병대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표트르 두닌이 이끄는 용병군이 주축이 된 정규군에게 전쟁을 맡기고 귀족들에게는 이들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세금을 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461년 10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한 표트르 두닌은 레센과 슈툼을 성공적으로 탈환해 폴란드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에 세임은 폴란드 정규군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1462년 9월 17일, 표트르 두닌이 이끄는 폴란드군 2,000명과 용병대장 프리츠 라베네크가 이끄는 튜튼 기사단군이 포메른의 패권을 놓고 슈베친(현 폴란드 시비에치노)에서 맞붙었다. 두닌은 소규모 기병 부대를 파견해 튜튼 기사단을 도발해서 숲과 갈대밭으로 유인했다. 기사들이 이에 넘어가 그들을 추격하자, 숲과 갈대 속에 숨어있던 석궁병들이 갑작스럽게 공격해 이들을 물리쳤다. 그 후 두닌은 패주하는 기사들을 추격해 적진까지 이르러 맹공을 퍼부었다. 오랫동안의 격전 끝에 프리츠 라베네크가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한 기사단은 붕괴되었다. 70명이 항복하여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1,000명이 전사했으며, 나머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250명이었다.

슈베친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막대한 전력을 손실한 튜튼 기사단은 요새 수비에만 전념했고, 폴란드군은 최근에 풀려난 보헤미아 용병대장 올드르지흐의 지원을 받으며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하면서 천천히 밀어붙였다. 1463년 7월 27일, 두닌은 포메른의 요충지인 그니에프를 포위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 도시를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 44척의 선박을 슈타르가르트에 소집하여 파견했지만, 1463년 9월 15일 자토카 시비에차 해전에서 폴란드에 가담한 두 해안 도시인 단치히와 엘빙 소속 함대 30척의 급습으로 궤멸되었다. 결국 그니에프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1464년 1월 1일에 항복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튜튼 기사단군의 핵심인 용병들은 급여를 받지 못하자 어떠한 전투도 치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두닌은 그런 그들을 천천히 몰아붙인 끝에 1466년 9월 28일 코니츠를 함락했다. 결국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기사단은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 교황 바오로 2세의 중재하에 협상이 이어진 끝에, 1466년 10월 19일 토룬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폴란드는 단치히-포메른, 마리엔부르크, 엘빙, 쿨름, 알트 포어베르크, 바르미아를 획득하며,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프로이센의 나머지 부분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사단장은 선출된 후 6개월 이내에 폴란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었다. 이리하여 폴란드 왕국은 158년만에 단치히-포메른 지역의 주권을 회복하고 비스와 강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2.4.3. 보헤미아 왕위 계승 전쟁

1460년대, 후스파에 호의적인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반감을 품은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기를 들어 이단 왕을 폐위를 촉구했다. 이에 보헤미아 내 가톨릭 신자들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통치하고 있던 마차시 1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마차시 1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1469년 5월 3일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일부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가 이르지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이르지는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를 차기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카지미에시 4세는 1469년 10월 피오트르쿠프 회의에서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를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마차시 1세가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준비하자, 카지미에시 4세는 자신의 차남 카지미에시를 헝가리 왕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고, 마침 마차시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을 포섭했다. 이 정보는 도중에 샜고, 마차시 1세는 즉시 의회를 소집해 "앞으로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으며 매년 의회를 소집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했고, 9월 21일 50명 가량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1년 10월 2일, 카지미에시 왕자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는 판노니우스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니트러를 공략했지만, 오직 로스고니 야노시와 페레니 미클라시만 가담했을 뿐, 다른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시가 즉각 반격을 가해오자, 카지미에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판노니우스 야노시는 헝가리에서 도주하던 중 사망했고, 비테츠 야노시 대주교는 교구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1472년 3월 1일, 교황 식스토 4세는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가 마차시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그해 5월 31일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 그리고 마차시는 평화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휴전을 갖는 데 합의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의 끝에 1474년 2월 21일 스타라 베스 스피스카에서 3년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이후 슬레스코-모라바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마차시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12월 8일 마차시와 3년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76년, 교황 특사 발타자르 데 피시아가 카지미에시 4세의 궁정에 찾아와서 몰다비아와 헝가리 왕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헝가리와의 휴전 협정을 파기할 경우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왕위에 대한 주장을 그만두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휴전 협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1477년 5월 25일 3년간의 휴전이 만료되었지만, 양국 모두 전쟁을 재개할 의사가 없었기에 협상이 재차 이뤄졌고, 1478년 11월 21일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79년 4월 2일에는 카지미에시 4세가 직접 부다로 가서 마차시 1세와 화해했다.

2.4.4. 오스만 제국크림 칸국과의 전쟁

1484년, 오스만 제국몰다비아 공국흑해 항구 도시인 킬리아체테테아알버를 점령하고 폴란드 동부 무역을 차단했다. 이에 폴란드와 몰다비아의 경제가 악화되자,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는 1485년 9월 15일 콜로미아로 가서 카지미에시 4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얀 칸코프스키가 이끄는 수천 명의 폴란드 용병을 줘서 몰다비아에 진주한 투르크군을 물리치게 했다. 하지만 몰다비아에 대한 지원을 곧 중단하고 크림 칸국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슈테판 3세는 1년 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당시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은 루테니아와 포돌리아를 매년 습격해 수천 명의 포로를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고, 각지를 심하게 약탈했다. 급기야 1482년에는 타타르군이 키예프를 공략하고 황폐화시켰다. 이에 견디다 못한 카지미에시 4세는 1486년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에게 크림 칸국에 보복 원정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얀 1세 올브라흐트는 1487년 9월 8일 포돌리아의 코피스트친 전투에서 타타르군 5,000명과 맞붙어 1,500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뒀고, 이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동쪽 국경지대를 맡아 타타르족과 튀르크족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2.4.5. 말년

1490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가 사망했다. 헝가리 의회는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왕으로 받들어달라는 마차시 1세의 유언을 묵살하고,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를 새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하지만 독일왕 막시밀리안 1세는 1463년 노이슈타트에서 마차시가 합법적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를 상속하자고 했던 협약을 상시키기며 자신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미 보헤미아 국왕인 장남 대신에 셋째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1490년 9월 18일, 울라슬로 2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에 얀 올브라흐트는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에게르를 점령한 뒤 커셔를 포위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 역시 헝가리를 침공해 11월 말에 솜버트헤이,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는 에스테르곰에서 마차시 1세의 전 왕비였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했고,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반격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을 포섭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막시밀리안은 12월 연말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울라슬로는 여세를 이어가 커셔를 구원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글로가우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1491년 가을 얀 1세가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지만,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이 격파했다.

1491년 11월 7일, 울라슬로 2세는 포조니에서 막시밀리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마차시 1세 생전에 헝가리가 빼앗았던 모든 오스트리아 영토를 막시밀리안에게 돌려주며, 울라슬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은 헝가리에 대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헝가리 왕위는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 울라슬로 2세의 차지가 되었다.

1492년 6월 7일, 카지미에시 4세는 폐렴에 걸려 64세의 나이로 가르디나스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셋째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가 폴란드 왕위를 이어받았고, 넷째 아들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3. 가족

4. 평가

폴란드 역사상 가장 활동적이었던 통치자 중 하나로 13년 전쟁 끝에 튜튼 기사단을 물리쳐 그단스크를 회복하는 한편 발트해 무역로로 접근하는 성과를 내었다. 또한 합스부르크의 엘리자베트와의 결혼을 통해 여러 자녀를 얻었고 이들을 유럽 주요 국가들의 왕실과 결혼시켜 야기에우워 왕조를 유럽의 주요 통치 가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평생동안 폴란드 귀족들을 경계한 것과 별개로 전쟁을 위해 귀족들에 많은 권한을 허락하는 한편 세임을 강화시켜 결과적으로는 부르주아 세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장기적으로 폴란드에서 상공업 발전이 미진하도록 했으며 폴란드 왕권 약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리투아니아에서는 훨씬 평가가 박하다. 그가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했던 통치자였던 것과는 별개로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시켰고, 폴란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동유럽 정세에 몰두했던 탓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침입을 막지 못해 서서히 폴란드에 종속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는 악평을 받는다.

5. 대중매체에서

Europa Universalis IV에서 4/4/1의 능력치와 기본적으로 학자 트레잇(기술 비용 -5%)을 가지고 있는 군주로 등장한다. 시작 시점인 1444년에 재위 중이지는 않고, 공위기를 거쳐 1440년대 후반에 뜨는 왕위 계승 이벤트를 통해 즉위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마차시 1세가 개혁교회를 받아들이자 이에 반발한 헝가리 귀족들이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언급된다. 물론 상대가 그 마차시라 헝가리 귀족들이 박살나는 바람에 직접 등장하진 않는다.

6. 관련 문서



[1] 야기에우워 왕조 폴란드 국왕들은 모두 선출제였다. 대대로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후손들이 선출되어 세습처럼 보일 뿐이다.[2] 현 폴란드 호이니체(Chojnice).[3] 현재 폴란드 루부스키에주 일대.[4]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이 있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중심부.[5] 작센 선제후 모리츠와 아우구스트 형제의 백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