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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4:14:04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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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
Władysław III Laskon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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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브와디스와프 3세.jpg
출생 1161년에서 1166년 사이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231년 11월 3일
폴란드 대공국 스로다 실롱스카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202년 ~ 1206년
1227년 ~ 12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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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미에슈코 3세
어머니: 키예프의 에우독시아
배우자 뤼켄의 루시아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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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2. 생애

1161년에서 1166년 사이에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3세키예프 루스 대공 이자슬라프 2세의 딸인 에우독시아 사이의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 소 미에슈코, 살로메아,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라스코노기(Laskonogi)'는 그의 별명으로,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 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매우 길고 얉은 다리를 가졌기 때문에 이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1177년, 이복형인 오도가 아버지 미에슈코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소폴란드 총독 헨리크 키에틀리츠,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 바실리카의 카지미에시 2세까지 가세하자, 미에슈코 3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179년 가족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으로 피신했다. 이때 그도 아버지를 따라갔다. 1181년 가족과 함께 대폴란드로 돌아왔고, 뤼겐의 공작 야로마르 1세의 딸인 루시아와 결혼했지만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1194년 아버지와 화해한 뒤 남부 대폴란드 영지를 다스리던 이복형 오도가 사망했다. 그 후 그는 미에슈코 3세로부터 남부 대폴란드 공작에선임되었고, 오도의 아들로서 칼리슈 공작에 선임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후견인에 선임되었다. 1195년 친형제인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미에슈코 3세와 함께 소폴란드로 진격했다가 모즈카와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그는 미에슈코 3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1198년 아버지가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는데 기여했고, 1199년 폐위된 아버지가 1202년 복위될 수 있도록 힘썼다.

1202년 3월 13일, 미에슈코 3세가 사망했다. 당시 크라쿠프 총독이었던 미코와이 그리피타는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인 레첵 1세에게 측근들을 해임하고 자신의 직위를 유지시켜주면 대공에 세우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레첵 1세가 거부하자, 미코와이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폴란드 대공에 세웠다. 그는 4년간 대공 직을 유지했지만, 1206년 미코와이가 사망하자 귀족들이 레첵 1세를 대공으로 추대하는 바람에 물러나야 했다. 이후 레첵 1세가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와 회담을 가졌을 때 참석했고,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1세와 협의해 칼리슈를 넘겨주는 대가로 루부슈를 받았다.

1209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하부 루사티아 변경백 콘라트 2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루부슈를 빼앗겼다. 이에 헨리크 1세가 분쟁에 개입했고 콘라트 2세가 1210년 5월 6일에 사망한 후 하부 루사티아 변경백국에서 후계 자리를 놓고 분쟁에 벌어진 틈을 타 1210년 8월부터 1211년 3월까지 원정을 감행해 루부슈를 탈환한 뒤 루부슈를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돌려줬다.

한편, 명목상 대폴란드 남서부 공작을 맡고 있었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야 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삼촌이 자기 영지로 여겼던 칼리슈를 헨리크 1세에게 넘긴 것에 불만을 품었다. 당시 16살이었던 오도니치는 일부 대폴란드 귀족들을 회유했는데,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도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교회의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도니치에게 가세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발각당했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헨리크 1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헨리크 1세는 이들을 받아들였고, 오도니치에게 칼리슈 공국을 제공했다.

이후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파문을 선고했고, 로마로 사절을 보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를 규탄하는 서신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여러 폴란드 공작들에게 키에틀리츠가 그니에즈노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권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헨리크 키에틀리츠, 브로츠와프 주교, 루부슈 주교, 포즈난 주교가 글로고프에 모여서 헨리크 1세의 중재하에 논의했다. 그 결과 헨리크는 파문을 해제하는 조건하에 그니에즈노로 돌아갔고, 그동안 입은 손실에 대한 보상도 받았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실레시아 귀족들의 로비에 따라 피아스트 왕조 일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실레시아의 미에슈코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기에 그 해 7월에 보르지코바에서 공작과 귀족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레첵 1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 교황에 의해 대공으로 추천받은 미에슈코의 아들 카지미에시, 헨리크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실레시아의 미에슈코와 함께 바벨을 장악했다. 이후 미에슈코는 대공을 칭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1211년 5월에 미에슈코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방문한 사절단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미에슈코의 아들 헨리크는 루부슈 공작에 선임되었다.

1215년,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볼보르츠에서 열린 공작들의 회의에 근거해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게 영지를 떼주라고 요구했다. 1216년, 그는 내전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가 소유했던 지역을 오도니치에게 넘겼다. 그가 어떤 영토를 내줬는지는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도니치가 크라쿠프를 포함한 포즈난 지역 전체를 받았다고 추정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오브라 강 유역일 거라고 본다. 그와 오도니치 사이의 합의는 1217년 2월 9일 교황 호노리오 3세의 교령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또한 그는 헨리크 키에틀리츠와 공식적으로 화해하고 레크노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대한 특권을 넘겼다.

1217년, 레첵 1세와 브와디스와프 3세는 남성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상호 상속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헨리크 1세로부터 우호적 중립을 약속받자, 그는 오도니치와의 결등을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조카의 영지를 공격해 오도니치를 쫓아냈고, 1217년 말 또는 1218년 초에 포즈난 주교 파웰의 중재하에 헨리크 1세로부터 칼리슈를 인계받는 대가로 독일 제후들을 상대하는 헨리크 1세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동맹 협약을 맺었다.

1223년 10월, 포메라니아로 피신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우이시치에 마을을 기습해 공략한 뒤 나크와나트 노태치앙을 공략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오도니치와의 내전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227년 7월 15일 우사이치에를 포위 공격하던 브와디스와프 3세의 부관 도브로고스트가 오도니치의 기습 공격으로 패사하면서 전세가 오도니치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오도니치는이 승리를 활용해 대폴란드의 거의 모든 영토를 점거했다. 그런데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돌연 오도니치와의 동맹을 끊고 나크워를 공략한 뒤 폴란드 대공에 대한 충성 서약을 깨고 자신을 포메라니아 대공으로 칭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도니치와의 전쟁에서 밀리자 그나마 남은 영토마저 잃을 것을 우려해 폴란드 대공 레첵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레첵 1세는 이 기회에 아들이 없는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대폴란드를 상속받기로 마음먹고 중재에 나섰다. 마침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앵토페우크 2세의 지원이 끊어져서 내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도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227년 11월, 대폴란드 국경지대에 있는 고싸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레첵 1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헨리크,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이 회담 결과에 관심이 가장 많았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1227년 11월 24일 아침, 그날 열릴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목욕을 하던 공작들은 암살자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다. 헨리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직한 기사인 비젠부르크의 페레그리누스가 자기 몸으로 가려서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반면에 레첵 1세는 반쯤 발가벗은 채 말을 타고 마르싱코보 마을로 달아났지만,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피살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로부터 포메라니아를 독립시키기 위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반면 후대의 여러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암살을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레첵 1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일전에 맺은 합의에 근거해 레첵 1세의 영지를 승계받았다고 선언했다. 1228년 초, 그는 실레시아 공작 헨리크 1세의 지원군을 받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공격해 단숨에 격파하고 생포했다. 이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레첵 1세의 후계자인 볼레스와프 5세가 아직 1살에 불과한 점을 들어 자신이 볼레스와프 5세를 대신해 폴란드 대공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레첵 1세의 형제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는 이에 불복해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1228년 5월 5일 비실리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진행된 선거 결과, 대부분의 폴란드 귀족들과 주교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그 대신, 브와디스와프 3세는 교회에 몇 가지 특권을 보장하고 레첵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5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며, 소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법률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선거에 의해 선임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곧 악화되었다. 앞서 그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감옥에서 탈출해 프워츠크로 도피한 뒤 전쟁을 재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조카를 토벌하러 가야 했지만,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언제라도 크라쿠프로 쳐들어와서 대공 직을 탈취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실레시아의 헨리크 1세를 크라쿠프 총독으로 세우고, 대폴란드에 대한 상속을 약속했다. 이는 그가 앞서 비실리차에서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볼레스와프 5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정하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1228년 여름, 콘라트 1세가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이에 헨리크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헨리크 2세가 반격을 가해 바위 전투, 브로치에레즈 전투, 미엥지보르제 전투 잇따라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콘라트 1세는 포기하지 않고 1229년 재차 원정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급기야 스피트코비체에서 평화 협상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온 헨리크 1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헨리크 1세의 아내인 실레시아의 헤드비히의 간절한 청원에 따라 헨리크 1세를 석방했지만, 소폴란드 대부분을 공략했다. 콘라트 1세는 즉시 산도미에시 공국에서 자신의 조카 볼레스와프 5세를 몰아내고 자기 아들 볼레스와프를 산도미에시 공작으로 삼았다.

그렇게 헨리크 1세를 쫓아내고 소폴란드를 장악한 뒤, 콘라트 1세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 맞붙고 있던 브와디스와프 3세를 공격해 칼리슈를 포위 공격했지만, 루스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3세는 1229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라시보르즈에 있는 오폴레 공작 카지미에시 1세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이후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실레시아의 헨리크 1세에게 양도함으로써 헨리크 1세와의 동맹을 갱신했다.

1231년 봄, 헨리크 1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함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초기에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그니에즈노 성벽에서 대폴란드 귀족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저지되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스로다 실롱스카로 이동했다가 1231년 11월 3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시토회 소속 프랑스 사제인 트루아퐁텐의 알베리크에 따르면, 그는 어느 독일 소녀를 강간하려 했다가 소녀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단검에 찔려 죽었다고한다.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브와디스와프 3세가 아니라 그의 조카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그는 생해 마지막 해에 매춘부와 음행을 저질러 신하들의 경멸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