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0:49:56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30000, #ff0000 20%, #ff0000 80%, #a30000);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비왕조
레흐 1세 크라쿠스 1세 크라쿠스 2세 레흐 2세 반다
비왕조 포피엘 왕조
레슈코 1세 레슈코 2세 레슈코 3세 포피엘 1세 포피엘 2세
피아스트 왕조
피아스트 시에모비트 레스테크 시에모미수 미에슈코 1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베즈프림 카지미에시 1세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 볼레스와프 4세 미에슈코 3세
카지미에시 2세 레셰크 1세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 미에슈코 4세 콘라트 마소비에츠키
헨리크 1세 헨리크 2세 볼레스와프 5세 레셰크 2세 헨리크 3세
피아스트 왕조 프르셰미슬 왕조 피아스트 왕조
프셰미수 바츠와프 1세 바츠와프 2세 브와디스와프 4세 카지미에시 3세
카페-앙주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
루드비크 야드비가 브와디스와프 5세 야기에우워 브와디스와프 6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
폴란드 공국 · 폴란드 왕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 바르샤바 공국
폴란드 입헌왕국 · 폴란드 인민공화국 · 폴란드 공화국
}}}}}}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
Konrad I mazowiecki
'''
파일: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jpg
출생 1187년 또는 1188년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247년 8월 31일
폴란드 대공국 시에리츠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229년 ~ 1232년
1241년 ~ 1243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카지미에시 2세
어머니: 츠노쳄의 헬레나
배우자 아가피아 스뱌토슬라브나
자녀 5남 5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생전에 헨리크 1세, 볼레스와프 5세와 대공위를 놓고 대립했다.

발트해 연안의 이교도 원주민들을 물리치기 위해 튜튼 기사단을 불러왔는데 이들이 세운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동군연합하여 프로이센 왕국으로 발전했고, 프로이센 왕국은 폴란드 역사를 좀먹는 끝에 분할로 폴란드를 123년 동안 지도에서 없애버렸다.

2. 생애

1187년 또는 1188년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와 즈노쳄 공작 콘라트 2세의 딸인 헬레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 카지미에시, 볼레스와프, 오도, 애들레이드, 레첵 1세 등이 있었다. 1194년 5월 5일 요트빙거족[1]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한 아버지 카지미에시 2세가 크라쿠프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찍이 카지미에시 2세에게 밀려 대공위를 빼앗겼던 대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3세는 이 기회에 소폴란드를 장악하고 폴란드 대공을 자처하려 했다. 그러나 소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2세의 살아남은 아들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첵 1세를 대공에 옹립하기로 했다.

이후 4년간의 내전에서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전사하는 등 크게 고전하던 미에슈코 3세는 무력으로 대공위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카지미에시 2세의 미망인이자 레첵 1세의 어머니인 헬레나와 협상했다. 마침 헬레나도 귀족들의 전횡에 자신과 자식들의 안위가 위협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198년, 미에슈코 3세는 쿠야비야를 카지미에시 2세의 두 아들인 레첵 1세와 콘라트 1세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1200년, 충분히 톨치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레첵과 콘라트는 토지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콘라트는 마조프셰, 쿠야비아를 가졌고, 레첵 1세는 산도미에시, 크라쿠프, 시에라츠, 웽치차를 확보했다.

1206년, 볼히니아의 공자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가 레첵과 콘라트의 영토를 침범해 각지를 약탈하면서 깊숙히 들어왔다. 이에 콘라트는 레첵 1세와 함께 출진해 자비호스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로만을 전사시켰다. 이후 레첵 1세와 콘라트는 로만이 가졌던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다퉜다가,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가 로만의 어린 아들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개입하는 바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1208년 레첵 1세가 볼히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참여했으며, 레첵 1세의 조언에 따라 노보고르드 공작 스뱌토플라프 3세 이고레비치의 딸인 아가피아 스뱌토슬라브나와 결혼했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실롱스크 귀족들의 로비에 따라 피아스트 왕조 일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실롱스크의 미에슈코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기에 그 해 7월에 보르지코바에서 공작과 귀족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레첵 1세, 콘라트, 교황에 의해 대공으로 추천받은 미에슈코의 아들 카지미에시, 헨리크 1세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군주가 사망한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권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 교령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교황에 의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미에슈코는 바벨로 들어가서 대공을 칭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1211년 5월에 미에슈코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방문한 사절단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헨리크 1세는 루부시 공작에 선임되었다.

콘라트는 고대 프로이센족과 요트빙거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많은 관심을 뒀다. 그는 마조프셰에 시토 수도회를 초청해 이들 지역에 대한 선교사업을 진행하게 했다. 1212년 몽콜노(Mąkolno)에서 레첵 1세와 함께 주교들을 불러모은 뒤 프로이센인과 요트빙거족에게 기독교(가톨릭)를 전파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216년에는 교황청에서 파견된 시토회 출신의 크리스티안을 선교 주교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선교 활동에 공을 들였음에도, 두 종족은 쉽사리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17년, 콘라트는 마조프셰 총독 크리스틴이 10년간 북쪽 국경 방위를 담당하면서 프로이센족과 요트빙거족과의 국경 분쟁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주민들의 존경을 받고 병사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끝에 긴급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했다가 나중에 살해했다. 크리스틴이 살해된 후, 그가 10년간 구축했던 국경 방어 체계가 무너졌다. 이때부터 프로이센인의 습격이 이전보다 훨씬 빈번하게 일어났고, 북쪽 국경지대는 폴란드인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폐해졌다.

콘라트는 프로이센족을 정벌하기로 마음먹고, 1217년과 1218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이교도를 응징하는 십자군의 칭호를 부여받고 프로이센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1219년부터 1222년까지 프로이센인들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마조프셰 일대가 파괴되는 참사를 막지 못했다. 1222년 실롱스크 공작 헨리크 1세, 폴란드 대공 레첵 1세와 함께 프로이센을 향한 십자군 원정을 개시해 일부 영토를 점거했지만, 포모제-그단스크 공작 스반토폴크 2세가 도중에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고, 프로이센족은 빼앗겼던 영토를 도로 되찾았다.

콘라트는 자기 힘으로는 프로이센족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실감하고 프로이센족과의 국경 지대인 헤움노에 기사단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에르데이에서 활동하다가 1225년 교황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시도하다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분노를 사 쫓겨난 튜튼 기사단이 새 보금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콘라트는 그들과 접촉한 끝에 1226년 튜튼 기사단장 헤르만 폰 잘차와 협상한 뒤 헤움노 지역에 새 거점을 마련하게 해줬다. 이후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원주민에 대한 원정을 개시해 강력한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콘라트는 기사단을 프로이센족을 꺾고 새로운 영토 팽창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 했지만, 기사단은 자신들이 정복한 영토를 그에게 넘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1230년, 그들은 교황청으로부터 프로이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협상해 리미니에서 금인칙서를 받아내어 소유권을 확약받았다.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이들을 지지하자, 콘라트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1230년 5월 16일 튜튼 기사단과 크루슈비츠 조약을 체결해, 그들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우호적인 교류를 하기로 했다. 1235년에는 콘라트가 1228년에 영지를 부여했던 도브진 형제 기사단이 튜튼 기사단과 합병하면서, 튜튼 기사단이 세운 독일 기사단국은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1227년 11월 24일,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간의 내전을 중재하기 위해 고싸바에서 회담을 열었던 폴란드 대공 레첵 1세가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포메른-그단스크 공작 스반토폴크 2세가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로부터 포메른을 독립시키기 위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반면 후대의 여러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암살을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레첵 1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일전에 맺은 합의에 근거해 레첵 1세의 영지를 승계받았다고 선언했다. 1228년 초, 그는 실롱스크 공작 헨리크 1세의 지원군을 받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공격해 단숨에 격파하고 생포했다. 이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레첵 1세의 후계자인 볼레스와프 5세가 아직 1살에 불과한 점을 들어 자신이 볼레스와프 5세를 대신해 폴란드 대공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자신이 레첵 1세의 형제인 점을 내세우며 이에 불복하고, 대공위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이후 1228년 5월 5일 비실리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진행된 선거 결과, 대부분의 폴란드 귀족들과 주교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그 대신, 브와디스와프 3세는 교회에 몇 가지 특권을 보장하고 레첵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5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며, 소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법률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선거에 의해 선임되었다. 콘라트는 일단 마조프셰로 물러났지만, 폴란드 대공위를 탈취할 기회를 엿보았다.

1228년 여름,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감옥에서 탈출해 프워츠크로 도피한 뒤 브와디스와프 3세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조카를 토벌하러 가야 했지만, 콘라트가 언제라도 크라쿠프로 쳐들어와서 대공위를 탈취할 수도 있다고 보고, 실롱스크의 헨리크 1세를 크라쿠프 총독으로 세우고 대폴란드에 대한 상속을 약속했다. 그렇게 브와디스와프 3세가 출진한 뒤, 콘라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이에 헨리크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헨리크 2세가 반격을 가해 바위 전투, 브로치에레즈 전투, 미엥지보르제 전투 잇따라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콘라트는 포기하지 않고 1229년 재차 원정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급기야 스피트코비체에서 평화 협상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온 헨리크를 사로잡은 뒤 프워츠크에 투옥시켰다. 이후 헨리크 1세의 아내인 실롱스크의 야드비가가 프워츠크로 향해 콘라트를 간절히 설득하자, 마음이 약해진 콘라트는 헨리크 1세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 대신, 헨리크 1세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자신에게 넘기게 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게 패배해 라시보르즈로 피신하자, 그는 폴란드 대공을 본격적으로 칭했다. 하지만 헨리크 1세는 브로츠와프로 돌아온 지 몇달 만에 교황에게 협박에 따른 맹세로부터 자신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콘라트는 산도미에시를 접수한 뒤 장남인 볼레스와프에게 맡겼다.

1231년 11월 3일, 브와디스와프 3세가 실롱스크의 스로다에서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유산을 유일한 동맹자인 헨리크 1세에게 넘겼다. 헨리크 1세는 이를 명분으로 삼고 1232년 소폴란드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당시 콘라트는 소폴란드를 장악한 뒤 강압적인 통치를 실시해 소폴란드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헨리크 1세를 따르기로 했다. 여기에 콘라트에게 산도미에시 공국을 빼앗긴 레첵 1세의 미망인 그지미스와바와 아들 볼레스와프 5세도 헨리크 1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한 헨리크 1세는 1232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콘라트 1세는 웽치차와 시에라츠만 간신히 지배할 수 있었다.

1233년, 콘라트 1세는 그지미스와바와 볼레스와프 5세에게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두 사람은 회담에 참석하러 갔다가 현장에서 콘라트 1세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심한 구타를 당한 뒤, 처음에는 체르스크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시에시에호프의 어느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지미스와바는 포로 생활 동안 콘라트 1세에게 뺨을 얻어맞는 등 많은 굴욕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루부슈의 클레멘스를 비롯한 그라피치 가문이 경비원들이 술에 취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수도원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헨리크 1세에게 피신한 뒤 스카와의 성에 은거했다.

1234년 8월, 콘라트는 루카나에서 헨리크 1세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콘라트는 헨리크 1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는 것을 인정했고, 그 대신 웽치차와 시에라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폴란드에서 양측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지속되었다. 1238년 헨리크 1세가 사망한 뒤 뒤이어 폴란드 대공이 된 헨리크 2세는 콘라트와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해 자신의 딸 콘슈탄치어를 콘라트의 아들 카지미에시와 결혼시켰다. 한편, 콘라트는 두 아들 볼레스와프와 카지미에시의 압력을 받고 영지를 나눠줬다. 볼레스와프는 비툴라 및 부그 강 북쪽 일대의 영지를 밭았고, 카지미에시는 쿠야비아를 영지로 받았다. 콘라트 본인은 시에라츠, 웽치차와 남은 마조프셰 일대를 통치했다.

1239년, 프워츠크의 폴란드 신부 얀 차플라가 콘라트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된 뒤 어떠한 재판도 거치지 않고 고문에 시달리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몇몇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교수대에서 시신을 꺼내 매장하려 하자, 콘라트의 아내 아가피아가 시신을 수도자들에게서 빼앗은 뒤 다시 프워츠 대성당 교회 맞은 편에 있는 교수대에 매달게 했다. 이에 분노한 그니에즈노 대주교 펠카는 콘라트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프워츠크 교구에 대한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콘라트는 파문을 풀기 위해 펠카 대주교에게 새로운 특권을 부여해야 했다.

1241년, 헨리크 2세가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 제국군을 상대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콘라트는 지금이야말로 폴란드 대공이 될 기회라고 여기고, 즉시 군대를 일으켰다. 그해 7월 10일 크라쿠프에 입성한 그는 헨리크 2세의 아들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로부터 대공 직임을 넘겨받았고, 지난날 자신에게 맞섰던 루부슈의 클레멘스에게도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콘라트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볼레스와프 5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클레멘스를 위시한 소폴란드 귀족들은 이에 격분해 볼레스와프 5세를 받들어 봉기를 일으켰다.

1243년 5월 25일, 콘라트는 수호도우 전투에서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1세와 오포에 공작 미에슈코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클레멘스가 이끄는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에게 참패했다. 이로 인해 소폴란드를 잃은 콘라트는 1244년 소폴란드를 탈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246년 재차 원정을 개시한 그는 자리슈프 전투에서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를로프(Lelów), 티니에크(Tyniec), 크라쿠프를 공략하고 루다와 강 어귀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더 진군하는 것을 망설이다가 시에리츠로 철수했고, 1247년 8월 31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프워츠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네만강과 비아위스토크 일대에 거주하던 발트계 종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