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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나폴리 왕국 앙주 왕조 6대 국왕 헝가리 왕국 앙주 왕조 4대 국왕 카를로 3세 Carlo III di Napoli | |
출생 | 1345년경 |
나폴리 왕국 두라초 | |
사망 | 1386년 2월 24일 (향년 40~41세) |
헝가리 왕국 비셰그라드 | |
재위 | 나폴리 왕국의 왕 |
1382년 5월 12일 ~ 1386년 2월 24일 |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 |
1385년 12월 31일 ~ 1386년 2월 24일 | |
배우자 | 두라초의 마르게리타 (1370년 결혼) |
아버지 | 두라초의 루도비코 |
어머니 | 산세베리노의 마르게리타 |
자녀 | 조반나 2세, 라디슬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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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앙주 왕조 6대 국왕,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앙주 왕조 4대 국왕.2. 생애
1345년경 나폴리 왕국 두라초에서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와 산세베리노의 마르게리타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루도비코는 두라초 공작 조반니의 아들이고, 조반니는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와 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막내아들이다. 즉, 그는 카를로 2세의 왕비이자 헝가리 왕국을 수 세기 동안 다스린 아르파드 왕조의 일원인 마리어의 외증손자였다.1352년 10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나폴리 원정을 중단하고 헝가리로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복종하던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를 남부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세웠다. 루도비코는 현지에 남은 헝가리 병력에 의존하여 나폴리로 돌아온 조반나 1세에 대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심이 잔혹행위를 일삼은 헝가리가 아닌 조반나 1세에게 쏠리면서, 루도비코는 수세에 몰렸다. 이후 조반나 1세와 러요시 1세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루도비코는 체포된 뒤 카스텔누오보로 보내졌고 1362년 7월 22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루도비코는 죽기 전에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이제 17살이 된 아들 카를로가 헝가리로 망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그의 의사에 따라 러요시 1세에게 카를로를 거두라고 권유했다. 이에 러요시 1세는 1365년 조반나 1세의 승인을 받고 카를로를 부더로 데려갔다. 러요시 1세는 처음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의 딸 아나와 카를로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러요시 1세와 카를 4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 협상은 중단되었다.
이후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의 막내 딸인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와 카를로의 결혼을 추진했다. 조반나 1세는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를 반역 혐의로 처형한 적이 있었기에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러요시 1세가 강하게 추진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 결혼은 사촌간의 결혼이었기에 교황청의 승낙이 필요했는데, 1369년 6월 15일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승인이 내려지면서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1370년 1월 24일, 카를로와 마르게리타는 나폴리에서 결혼식을 거행한 뒤 9월 16일 자다르로 떠났다.
러요시 1세는 1371년 카를로에게 슬라보니아 공작의 칭호를 내렸으며, 1373년에서 1376년 사이에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을 겸임하게 했다. 1379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베네치아 공화국이 평화 협상을 요청하자, 러요시 1세는 카를로를 여러 심복과 함께 협상장으로 보냈다. 협상은 2년여간 질질 끌다가 1381년 7/8월에 사보이아 백국의 백작 아메데오 6세의 중재로 토리노에서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1378년 9월 20일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면서 서방교회 대분열 시대가 개막했다. 러요시 1세는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그런데 조반나 1세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고, 우르바노 6세는 그녀를 파문에 처한 뒤 러요시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카를로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아들은 없고 딸만 있던 러요시 1세는 그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웠다가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헝가리 국왕으로까지 즉위하려 할 것을 걱정했다. 이에 카를로는 러요시 1세가 죽더라도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으며 그의 딸이 헝가리 국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는 1380년 여름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호르바트 야노시가 이끄는 9,000명의 헝가리군과 이탈리아 용병대가 그와 함께 했다. 1380년 11월 11일 로마에 도착한 그는 1381년 6월 2일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반나 1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후계자로 지정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그들은 중재할 의사는 있지만 헝가리 국왕과 교황이 지원하는 인물을 대적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카를로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용병대를 고용한 뒤 나폴리 왕국으로 행진했다.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는 그를 막기 위해 출진했지만 아리엔초 인근에서 참패했다. 이후 카를로는 나폴리를 포위해 한 달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281년 8월 25일 조반나 1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조반나 1세는 순순히 퇴위하기로 했지만 비밀리에 추종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 카를로는 이 사실을 적발한 뒤 1382년 5월 22일 무로 성에서 조반나 1세를 끌어내어 목 졸라 죽이고 나폴리의 산타 키아라 교회의 깊은 우물에 던졌다. 카를로는 1382년 5월 12일 '카를로 3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얼마 후, 뒤늦게 도착한 루이가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카를로 3세와 대적했으나 군사적 역량을 좀더 갖춘 카를로 3세에게 고전했다.
그러던 1382년 9월 10일 러요시 1세가 사망했다. 그 직후 러요시 1세의 딸 마리어가 헝가리 여왕에 올랐지만, 많은 헝가리 귀족들은 여자를 왕으로 섬길 수는 없다고 여겼고 카를로 3세를 왕으로 섬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카를로 3세는 138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러요시 1세에게 자신을 지원하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고, 루이 왕자와 대결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마리어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384년 9월, 루이 왕자가 바리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끝나자, 카를로 3세는 비로소 헝가리 국왕이 될 야심을 품었다. 마침 마리어 여왕과 모후이자 섭정인 엘리자베타에게 불만이 가득했던 헝가리 귀족들은 팔 호르바티(Pál Horváti) 주교와 호바트 야노시를 필두로 카를로 3세에게 헝가리로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일찍이 마리어의 약혼자로 예정되었다가 취소되어버렸던 지기스문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지기스문트는 1385년 10월 부더에 도착한 뒤 마리어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그를 헝가리의 공동 왕으로 세우기를 거부했고, 어떠한 정치적 실권도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지기스문트는 부더를 떠나버렸고, 카를로 3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더로 진격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카를로에게 귀순하자, 엘리자베타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385년 12월 초 딸 마리어와 함께 그를 마중한 뒤 함께 부더에 들어갔다.
이후 마리어는 카를로가 자신을 죽일 것을 우려해 12월 중순에 퇴위했고, 카를로는 처음에는 총독이라는 칭호를 칭했지만 의회에서 왕으로 등극해줄 것을 요청하자 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카로이 2세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를 감금하지 않고 두 사람이 부더의 왕궁에서 살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어떻게든 딸이 왕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여기고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와 함께 카로이 2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에게 왕을 죽여주면 기메스(Gimes, 현재 슬로바키아 옐레넥)를 주겠다고 설득했다. 블레즈는 이에 눈이 돌아가서 엘리자베타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386년 2월 7일, 카로이 2세는 엘리자베타의 요청에 따라 부더 궁정을 방문했다. 이후 엘리자베타와 카로이 2세가 대화를 나누던 중, 벌라주가 둔기로 왕의 머리를 가격해 중상을 입혔다. 카로이는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마리어는 곧바로 복위했고, 엘리자베타는 전국에 "마리어 여왕께서 신성한 왕관을 되찾았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카로이 2세를 받들던 귀족들이 카로이 2세의 아들 라디슬라오를 왕으로 받들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헝가리는 내전에 휘말렸다.
카를로 3세는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와의 사이에서 라디슬라오와 조반나 2세를 낳았다. 라디슬라오는 아버지가 살해된 뒤 나폴리 왕이 된 후 헝가리 왕위를 되찾기 위해 마리어의 뒤를 이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된 지그몬드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하다 1414년 사망했다. 조반나 2세는 1401년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판돌펠로 알로포(Pandolfello Alopo)와 사귀면서 대시종장으로 삼았다. 라디슬라오가 적출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나폴리 여왕으로 등극하여 1435년까지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