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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8:27:59

프란츠 로어 폰 덴타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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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프란츠 로어 폰 덴타
Franz Rohr von Denta
파일:Rohr_Franz_1865_1927_Gdk_Austria_1911.jpg
이름[1] 프란츠 로어
Franz Rohr

프란츠 로어 폰 덴타 남작
Franz Freiherr Rohr von Denta[A] (독일어)
로어 페렌츠
Rohr Ferenc

덴터이 로어 페렌츠 남작
Dentai Rohr Ferenc báró[A] (헝가리어)
출생 1854년 10월 30일
오스트리아 제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아라드
사망 1927년 12월 9일(향년 73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로다운(Rodaun)
복무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6년 ~ 1918년)
최종 계급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제국원수 계급장.svg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8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3. 제1차 세계 대전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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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인이자 제국원수[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제1군 사령관이었다.

2. 생애

1854년 오스트리아 제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아라트에서 육군 부사관 요제프 프란츠 로어(Josef Franz Roh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징집병으로 황실군에 입대했었고 제국군 하사관이 되어 정보관이자 출납관 등으로 10년을 복무한 끝에 최종 계급 대위로 퇴역한 군인이었고, 프란츠 로어의 조부는 보헤미아 북부에 위치한 작은 촌락인 랑겐도르프(Langendorf)에서 목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모계 조상인 실바(Szilva) 가문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 가문이었다. 프란츠 로어는 요제프슈타트 (Josefstadt)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876년,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했고, 1876년 11월 1일 갈리치아의 황립 및 왕립 "대공 카를 3세" 울란 3기갑보병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78년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1881년 5월 1일 대위 계급으로 진급했다가 1883년 11월 1일 일반참모부 일등대위로 발령받았다. 1889년부터 후사르 제1보병연대에서 복무했고, 1890년 다시 참모부로 전임되었으며 1891년 5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894년, 13보병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894년 11월 1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894-1897년 황립 및 왕립 전쟁부 (K. u. K. Kriegministerium)의 6국에서 근무했으며 1896년 12월 30일에 대령으로 승진했다. 1897년 9월, 2군단 참모장으로 전보되어 1901년 4월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고, 1903년 5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포즈소니의 73보병여단을 지휘했다.

1889년부터 프란츠 로어는 후사르 제1연대에서 복무했으며, 1890년부터 다시 장군참모부로 배치되었으며, 1890년 5월 1일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894년 제13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 같은 해 11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황립 및 왕립 전쟁부 (K. u. K. Kriegministerium) 의 6부서에 배치되었던 프란츠 로어는 1897년 12월 30일, 제2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대령이 되었다. 1903년 마침내 소장에 진급하면서 별을 달게 되었으며, 왕립 헝가리 방위군으로 전속되어 포조니에 있는 제73보병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1907년 4월 30일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05년과 1909년사이에 기병 병과의 총감독관을 겸임했으며, 1909년에는 군부 국장 및 군사교육기관 총감독관에 임명되었다. 1911년 11월 1일에는 마침내 최종계급이나 다름없는 기병대장까지 진급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는 왕립 헝가리 방위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을 신용하지 못한 콘라트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 방면의 국경을 수비하게 되었다. 로어는 1915년 5월까지 총 112개 대대를 편성했는데, 그 중 7개 대대는 헝가리 노무자 부대에서 전환된 것이었고, 29개는 후비군, 21개는 행군대대, 1개는 해군, 39개는 티롤과 포어아를베르크 사수대, 15개는 티롤, 케른텐, 슈타이어마르크의 자원군 대대였다. 이 부대들을 그라츠, 인스브루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티롤, 포어아를베르크에 주둔시키고[5] 티롤과 케른텐 국경지대의 요새화 작업을 지휘했다. 1914년 8월 16일 로어는 장래 이탈리아 왕국군의 공격에 대비해 신설된 로어 군집단 (Armeegruppe Rohr)의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14년 9월에는 슈텔비오 고개(Passo dello Stelvio)에서 제스텐 돌로미테(Dolomiti di Sesto)까지 이어지는 "티롤 저항선" (Tiroler Widerstandslinie)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 프란츠 로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서부 국경지대와 제국의 핵심 영토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특히 카르니 알프스에서의 방어가 돋보였는데, 이탈리아군은 카린티아 지역에서 오직 산악전에 미숙한 후비군이 배치된 플뢰켄 고개(1,357m) 주변 산악지대에서만 진입에 성공했다. 이 지역은 1917년 카포레토 전투까지 이탈리아군이 점령한 유일한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았다. 그렇게 프란츠 로어가 이탈리아군의 침투를 최소한으로 막아낸 성공적인 방어작전의 공로로 로어는 1916년 1월 1일에 상급대장으로 진급되었다. 그리고 트렌티노 공세를 대비해 그의 군집단이 해체된 후에는 새로 창설된 제10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브루실로프 공세를 시도하자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 작전은 중단되었고, 프란츠 로어는 1916년 6월 트렌토 지구에서 제11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1916년 2월 26일 본격적으로 육군의 계급으로 공식도입된 제국상급대장에 한번에 임명된 6명[6] 중 1명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제10군과 제11군을 지휘하다가 콘라트와 교체되어 루마니아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케렌스키 공세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훌륭히 방어해냈고, 1917년 2월 아르츠가 일반참모총장에 임명되면서 프란츠 로어는 처음으로 동부전선에서 제1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917년 4월 14일 프란츠 로어는 남작 작위를 받고 "로어 폰 덴타 남작" (Freiherr Rohr von Denta)의 작위명을 갖게 되었다. 1918년 1월 30일 루마니아 왕국이 항복하자 제국원수로 진급하였다. 1918년 4월 15일 제1군이 해산될 때까지 제1군을 지휘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후 프란츠 로어는 퇴역했지만, 새로 독립한 헝가리 왕국 군대의 명예직 원수로 임명되었다.

프란츠 로어는 1927년 12월 9일 근교의 로다운(Rodaun) 마을에서 생을 마감했고 로다운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두 아들은 1918년까지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손자 로돌포 로어 (Rodolfo Rohr)는 브라질에서 화학기업 및 호텔사업으로 성공했다. 프란츠 로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공적으로 많은 훈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레오폴트 훈장 대십자장, 철관 훈장 1등급, 군공 십자장 1등급 등을 수여받았고, 1917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 기사십자장도 받았다.

4. 평가

프란츠 로어는 평민 출신으로 원수까지 진급한 보기 드문 사례로, 9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원수들 중에서 가장 출신 성분이 낮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급 과정을 보면 평시에는 꾸준하고 안정적인 승진을 했으나, 전시에 보여준 뛰어난 방어 능력이 고위 장성으로의 진급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국경 방어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러시아-루마니아 연합군의 공세도 막아낸 방어 전술의 대가였다. 특히 그가 이루어낸 전공은 열악한 장비와 병력으로도 효과적인 방어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고,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의 중요성과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운용이 승리의 핵심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1] 이름은 독일식이지만 성은 헝가리식이다.[A] 1917년 남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A] [4]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5] 그러나 이들의 군대를 지휘할 총사령관으로 오이겐 대공이 부임하였는데, 오이겐 대공이 프란츠 로어 기병대장과 직급이 같은데다가 나이까지 어린 상황(당시 오이겐은 31세, 로어는 60세)이라 오헝군은 오이겐 대공을 임시로 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켜서 지휘 체계 혼선을 방지하였다.[6] 빅토어 단클 폰 크라시니크,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카를 폰 키르히바흐,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