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催淚彈 / Lachrymator, Tear gas
비치사성의 화학무기. 구토제, 재채기제와 함께 무력화제의 하나로 주로 시위진압에 쓰이는 도구. 일상적으로 최루탄으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최루제로 호칭하는 것이 옳다. 영문으로는 보통 진압제(Riot Control Agent)로 분류한다.
분류상 화학무기이기 때문에 경찰의 최루가스 시위 진압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국제법으로 전쟁터에서조차 사용이 금지된 화학무기를 자국 민간인에게 거리낌없이 사용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비치사성무기 중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무기 중 하나이다. 이유는 후술 참조.
여러 종류가 개발되어 사용중이지만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현역 및 예비역들이라면 가스실습이라는 단어로 치를 떠는 CS가스(2-클로로벤질리덴말로노나이트릴 : 2-chlorobenzylidenemalononitrile/C10H5ClN2)와[1] CN가스(클로로아세트페논: chloroacetophenone/C8H13ClO)가 대표적이다.
- CS가스는 이름과 달리 기체가 아니라 미세한 고체 분말, 거대한 에어로졸로 구성되어 있다. 그 입자 크기는 보통 수십 미크론(μm) 수준으로 아무리 작아도 평범한 미세먼지 수준이다. 게다가 열분해된 미세 분말조차 1미크론 이상이기 때문에 방진마스크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훈련소에서 쓰는 오래된 정화통으로도 최루탄을 막을 수 있는건 필터의 방진필터에 최루 입자가 모두 걸러지기 때문. 다만 눈이나 피부는 알아서 보호해야 한다.
- CN/OC(캡사이신) 성분 최루작용제 역시 P100(방진 특급) 필터의 0.3미크론 필터를 거의 통과할 수 없기에 효과가 있다. 최루탄을 막기 위해 꼭 화학적 방호, 즉 방독면이 필요한 건 아닌 셈. 당장 예전 시위 사진을 봐도 단순한 천조각으로 호흡기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최루작용제를 어느 정도 걸러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2. 작용효과
CS제와 CN제 둘 다 인체 작용효과는 비슷하여 호흡곤란, 점막 자극, 피부 발진과 가벼운 화학화상을 일으킨다. 다만 CS제가 좀 더 호흡기 자극이 심하고 대량 흡입시 치사성이 높다. 그렇기에 CN제는 경찰 조직에서 주로 사용하고 CS제는 군대에서 주로 사용했었다. CN제는 수용성이므로 물대포로 방사하는 최루액의 원료로도 쓰인다. 민간판매 가스총이나 호신용 스프레이에 들어가는 것도 보통 CN제나 그 수용액이다.엄연히 비치사성무기이기는 하지만, 일반인도 다량 흡입하면 위험하며, 특히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이나 어린이, 노인의 경우 심하면 질식사할 수도 있는 위험물이다. 그래서 유격훈련장 등지에서 가스실습을 할 때는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미리 나오라고 한 뒤 훈련을 열외시킨다. 또한 점막 자극성 때문에 눈물이 나더라도 함부로 닦아서는 안 되고 눈물이 흐르도록 놔두거나 깨끗한 물로 세척해야 한다. 마구 문질러서 닦아내다가는 각막이 손상될 우려도 있어서 시력교정수술자들도 열외시킨다.
군에서 훈련 시 사용하는 CS 캡슐도 충분히 맵지만, 실제 교전에서 사용하는 CS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하다. 익숙해지면 방독면 없이도 어느 정도 버틸 만한 연습용과 다르게, 실제 CS는 맨몸으로 버틸 만한 물건이 아니며,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바로 눈 감고 도망치게 만드는 매콤함을 자랑한다. 구토유발은 덤.
3. 국가별 사례
CS제의 최고 애용국은 단연코 영국이다. CS를 개발한 주체가 바로 영국의 연구소인 포턴 다운이며, 여기서 비밀리에 개발 및 테스트까지 다 했다. 1958년, 키프로스 폭동 진압차 출동한 영국군이 사상 최초로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북아일랜드에서 IRA 상대로 마르고 닳도록 사용했다.미국과 러시아는 2차 대전 이후로 유서깊은 CN 사용국이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베트콩의 땅굴 진지 소탕을 위해 사용한 최루가스가 대외발표와는 달리 CN가스가 아니라 CS가스라는 것이 들통나 한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열심히 쏴대고 있다.
시위 살벌하기로는 누구 부럽지 않은 프랑스도 프랑스 국가경찰이나 프랑스 헌병대가 시위 진압용으로 최루탄을 애용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 시위대는 방독면을 구비하는 등 밀당이 일어나고 있다.
헤이그 협약에 의해 군용으로는 제한돼 있기도 하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단지 제정 당시 독가스의 일종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은 정규군과 정규군간의 전쟁에서만 해당되지, 게릴라나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적용 안된다는 해석을 내세워 CN을 현용으로 잘만 쓰는 중.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1970년대까지도 시위 현장에서는 CN가스 사용만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CS가스 또한 상당량 사용했다. 특히 삼양화학공업에서 생산하는 국산 최루탄 SY-44[2]는 CN가스에 클로로피크린(Chloropicrin/CCl3NO2)을 칵테일한 오리지널 특제로 필리핀 경찰이 CN제인 줄 알고 도입했다가 반품했던 사례도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서는 고강도 폭력시위 진압용으로 소량의 폭약을 넣어 최루 효과 뿐만 아니라 충격 효과까지 노리는 종류의 최루탄을 쓰기도 한다. 가장 애용하는 프랑스의 GLI-F4 경우 TNT 당량이 25g씩이나 해서 손이 날아가는 등의 사고가 잦아 과잉진압 논란이 심한편.
4. 종류
기본적으로 투척식과 스프레이식, 총류탄(銃榴彈)식이 사용되며 박격포나 곡사포로 쏘는 포탄형도 존재하지만 1차대전 이후 노골적으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독가스를 쓸거라면 훨씬 본격적인 물건도 많아서 특이한 경우로 국내에서만 사용되던 다연장 발사식과 연무식이 있다.보통 발사체를 유탄발사기, 소총, 산탄총 등을 개조한 발사기(라이엇 건)로 상방 45도 각도로 쏘면 80~120m를 곡사 형식으로 날아가는 총류탄 방식이 상호 거리 유지에도 쉬운고로 가장 널리 쓰이지만, 이 경우 상황이 격화되면 직사로 쏘는[3] 놈들이 나오기에 잘못하면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4]
미국의 경우 수류탄 형태의 투척식을 애용하는데, 이를 '블래스트 볼'이라고 하며, '최루공(Tear Ball)', '고무공 수류탄(Rubber Ball Grenade)'이라고도 부른다. 연막탄 형태야 예전부터 쓰이긴 했으나 블래스트 볼의 경우 단순히 최루가스만 뿜는 게 아니라 섬광탄처럼 격발시 큰 폭음과 빛을 뿜어내어 시위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는 기능까지 있다. 거기다 심지어 라이엇 건[5]으로 쓰는 산탄총에 쓰는 탄으로도 최루탄을 만들었다. 이놈은 산탄 그 자체에 최루액을 넣은 것으로 앞의 총류탄식과는 또다른 놈이다.
가장 골때리는 사례는 프랑스제 GLI-F4라는 최루탄인데 이 물건은 터진다. 문자 그대로 폭발한다![6]
5. 역사
한국 현대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민주화 운동에서 꾸준히 사용되어 왔고 최루탄에 의해 숨진 김주열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각각 4.19 혁명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면서 정권이 두 번이나 뒤집어졌다.[7][8]이승만 정부 시절 3.15 부정선거로 분노한 마산에서 3.15 의거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이 최루탄을 왼쪽 눈에 맞아 사망한 뒤 시체가 바다에 유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유당 정권은 모른다고 발뺌했지만, 이 일이 알려짐으로 인해 시위는 더욱 더 격화되어 결국 4.19 혁명으로 번졌다. 당시 주력이 된 최루탄은 M25 기종이었다가 1969년부터 미국에서 M25 및 총류탄인 MPG100 최루탄, 그리고 어깨에 매는 가스분사기 '페퍼포그'까지 수입해 1개 중대당 2대씩 배정했다. 1979년부터는 가스차가 등장했으며 1986년에는 다연발 가스차(지랄탄)까지 나왔다.
또한 5공 시기인 1987년 6월 9일, '6.10 대회를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대회' 도중 연세대생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고 뉴욕 타임즈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그 후 6월 항쟁이 도래했다.[9] 항쟁 중인 6월 18일에 부산에서 회사원 이태춘이 시위 도중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좌천동 고가다리 밑으로 추락하여 6일 뒤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제6공화국 출범 및 민주화 이후인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8월 22일에 대우조선 파업 현장에서 당사 노동자인 이석규가 왼쪽 가슴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숨을 거두기도 했다.
오죽 많이 쐈으면 1980년대 개인 소득세 납부 1위가 바로 최루탄 생산업체인 삼양화학의 한영자 사장이었다. 당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격화되면서부터 경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쏴댔고, 화공약품 전문 생산업체인 삼양화학은 연간 200만 발 이상의 SY-44 최루탄을 정부에 납품하여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이러면서 한영자 사장이 국내 유수의 재벌 회장들을 모두 제치고 수년간 개인종합소득세 납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한영자 사장은 최루탄 납품을 놓치기 싫었는지 전두환 정권에 비자금 100억을 은밀하게 상납했다는게 훗날 밝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양화학의 한영자 회장은 이미 전두환 정권 이전에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부터 이미 최루탄을 납품하고 있었다. 6월 항쟁 즈음부터 최루탄 피해자 가족들의 주도로 최루탄 추방운동이 벌어지면서 국내외의 비난에 직면한 삼양화학은 1988년 10월에 생산을 중단하고[10] 1995년에 부도 이후 세제원료 등을 생산하는 중견 기업으로 변했다. 사실 최루탄은 삼양화학이 생산하는 100여 가지 화공약품 중에 하나일 뿐인데, 워낙 이게 잘 팔리다보니 마치 최루탄만 생산하는 흉악무도한 업체로 비춰진 측면도 있다. 삼양화학은 최루탄 생산을 포기한 이후에도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화학전문 그룹으로 잘 나가고 있다. 삼양화학은 이후에도 계속 군납 사업 위주로 성장했으며, 각종 군납비리 사건 때마다 이름이 오르고 있다.
반면 1990년부터 최루탄의 규격이 국방규격에서 경찰규격으로 바뀌어 투척용 KP3, 5와 발사용 KP1 및 2가 보급되었으며, 1993년 9월에는 비활성 훈련용 최루탄(KP1, KP2탄 각 13,000발, 투척용 KP3, KP5탄 각 13,000발)을 보급해 예산절약 및 훈련효과를 거양하였고, 진압부대에서 쓰던 이스라엘제 근접분사기(7.5kg, 70cm)가 무게가 무거워 휴대사용에 불편하고 고압가스 충전이 불편함에 따라 우리 체형에 맞게 2.3kg에 40cm로 소형화하고 액화가스에서 최루분말로 바꿔 최루농액을 조절한 국산 분사기가 나왔다. 이는 1992년 3월 1일에 시제품이 나온 걸 시작으로 총 5번의 평가를 거쳐 1993년 4월 14일에 경찰 진압장비로 보급되었다. 이후 1997년에는 근접분사기 215(중형 165, 소형 50)대를 보급하였고, 이어 배낭형분사기 개발 완료에 맞추어 경찰장비로 채택하고자 표준 규격을 총 중량 10.5kg, 전장 55cm, 유효사거리 12m, 발사횟수 30~40회로 정한 뒤 이듬해에 기존 규격보다 0.5g 늘어난 신형 근접분사기 503대를 보급하였다.
국내에서 육상경찰은 1998년 9월 3일 만도기계 총파업에 사용된 걸 마지막으로[11] 쓰지 않은 뒤 1999년부터 경찰청이 '무최루탄 원칙'을 관철시키면서 시위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 이 때 시위대도 화염병을 던지지 않겠다고 했었다고. 2003년에 재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하지만 최루탄을 쓰지 않겠다는 이야기일 뿐으로 물대포에 최루액이 섞여 발사되기도 하는데, 2006년에 폭력시위가 급증하자 경찰청이 살수차에 최루액을 섞어 분사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 사실 한국이 가입국으로 있는 화학무기 금지 기구(OPCA)에서 최루액 등은 규제대상으로 분류하여 농업용 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반면에 해양경찰은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단속등에 최루탄을 현재 제한적으로 사용중이다.보도기사
반면 최루탄 생산업계의 경우 1999년 경찰이 최루탄 구입을 제한함에 따라 야산화공, 대화화공 등 최루탄 제조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해 버렸다. 최루탄은 대광화공 등 몇몇 중소기업이 수출을 목적으로 생산 중이며 2013년 터키 시위진압 당시에 수출된 바 있었다.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각 경찰서나 상설중대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긴급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잔탄을 소량씩 보유하고 있다.[12] 실제로 전의경 기동중대의 경우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경찰버스에 최루탄을 싣고 다니는 중대가 많았는데, 가끔 가다가 노후화된 탄이 한 두 발씩 터지는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시위양상이 점차 비폭력시위 형태로 변해 과거에 비해 온건해지면서 남아있는 최루탄도 점차 폐기하고 있다. 실제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전량 폐기를 목표로 점차 그 수를 줄여나가고 있다.
6. 사례
하지만 미국, 프랑스 같은 국가들은 시위가 격해지면 개인화기 소지와 관계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쓴다. 물론 시위대는 그에 맞서 더 과격하게 맞선다. 고무탄도 널리 쓰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고무탄은 1999년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13]진압에 사용했다가, 관계자들이 줄줄이 모가지된 이후로 잘 안 쓰인다. 영화 '배틀 인 시애틀'을 볼 것.사실 1997년 화학무기금지협약에서도 환경 독성 우려가 있는 클로로피크린만이 사용 제한[14] 되었을 뿐이라 CN, CS가스 모두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15] 게다가 그 동네 경찰들은 요즘엔 전적으로 CS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 각종시위가 다발하자, 일부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과격해지는 최근의 시위 행태에 따라 이걸 부활시켜야한다"고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뉴스사이트 댓글창 등지에서 입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극히 소수이고, 위에서 언급했듯 과거에 비해 폭력성이 약해져가고 있는 대한민국 시위 현장에 더이상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게다가 최루탄 냄새를 직접 맡아본 중년층 이상들은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최루탄 냄새라면 신물난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16]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도 홍콩 경무처가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홍콩 경찰은 최루탄에 그치지 않고 물대포를 독일로부터 도입해 시범 운영 후 지난 8월 25일 부로 실전배치했으며 최루탄 남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지라 조만간 최루탄 사용 대신 물대포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시위를 완전히 끝내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17] 물대포가 최루탄에 비해 화학물질 잔류 등의 문제가 없으면서도 손 쉽게 시위대를 대량 검거할 수 있어 왜 진작 쓰지 않았나 의문이 제기될 정도. 그만큼 거리 시위는 이제 위험해졌다.
7. 여담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최루탄 및 최루액에 의해 사망한 사람으로 인해 시위가 격화되면 정권이 뒤집히는 법칙 아닌 법칙이 있다.[18]시위에서 학생들이 시위 중 최루액을 뒤집어 쓴 뒤 후퇴하다 보면 대학가의 상인들이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학생들이 얼굴을 닦도록 도와줬다는 일화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 후반부에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학생 데모로 인해 경찰이 하도 최루탄을 쏴대는 통에 최루탄으로 인한 일반인들의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자 시민들이 "최루탄 좀 그만 쏴라! 시내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라며 시위에 합세한 것.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직원이 신입생들에게 과학도서관이 왜 안 쪽에 있는지 설명할 때 최루탄 냄새가 건물 안까지 들어와 공부가 안 돼서 지금의 위치로 지었다고 했을 정도다. 참고로, 영대 정문이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6월 항쟁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이 쏴댔는지, 6.29 선언 직전 시점에선 경찰의 최루탄 재고가 3일 치 밖에 안 남았을 정도였다. 이는 6.29 선언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시위 진압에는 최루탄을 비롯한 비살상 무기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만일 최루탄 재고가 바닥나면 경찰이 맨몸으로 백병전을 치러야 하는데 당시 시위의 규모를 고려할 때 최루탄 없이 시위대를 쫓아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시위대가 청와대로 쇄도해 전두환을 효수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으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승만처럼 경찰에게 카빈 소총을 나눠주고 시위대에게 실탄 사격을 가해 사살하는 방법 또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학살하는 방법뿐이다. 당연히 어느 것도 멀쩡한 선택지가 아니며 특히 미국이 벼르고 있는 상황에선 그러했다.
운이 좋아서 1980년 쿠데타 때 처럼 미국이 신경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때와 달리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위를 학살로 진압하면 5.18 민주화운동을 넘어선 내전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1989년의 중국과 달리 1987년의 대한민국은 머리 위에 거의 대등한 국력을 갖춘 북한[19]이라는 적국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내전이 장기화되어 대한민국이 혼란해지면 북한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분명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국민에게 굴복하게 된다.
가스가 시위대만 정확하게 덮치는 게 아니다 보니 무고한 피해가 나오기도 하는데, 경남 마산에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당시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20]를 열던 중에 경기장에 최루탄 연기가 흘러들어와서 대회가 중단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마산의 축구/야구장에서는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쪽수 맞추기로 관람시켰는데 최루탄 연기 탓에 경기가 중단되어 독재정권에 불만도 많았던 성난 관중들이 시위에 합세하기도 했다. 마산아재 참조.
서울어린이대공원 관람객들이 애꿎게 피해를 보기도 했다. 어린이대공원 정문과 세종대학교 정문이 마주보고 있는 탓에, 그쪽에서 터진 최루탄 연기가 어린이대공원 안까지 날아들어왔다.
바리에이션으로는 지랄탄과 사과탄이 있다. 지랄탄은 탁구공만한 조그만 최루탄으로 한번 발사되면 이리저리 지랄같이 욕 나오게 굴러다니면서 최루가스를 내뿜기 때문에 지랄탄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일단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종잡을 수가 없어서, 이놈이 착지하는 곳을 예측해서 곧바로 붙잡는 것을 연습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탄은 발사기에 장전하여 원거리 투척하는 일반적인 원통형 최루탄과 다르게 수류탄 처럼 근거리에 손으로 던지는 구형 투척식으로 동그란 모양 때문에 사과탄이라고 불린다. 크기는 형식에 따라 직경 7~10cm 정도로 별명처럼 실제 사과 크기와 비슷하다.
KBS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 2009년 2월 9일 방송분에도 나왔다.
2011년 11월 22일 한미 FTA로 인해 벌어진 국회 공성전 도중, 민주노동당의 김선동 의원이 국회 안에서, 그것도 본회의장 안에서 최루탄을 투척했다. 그리고 김선동 의원은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저는 이토 히로부미를 쏜 안중근 의사의 심정으로, 윤봉길 의사의 심정으로, 우리 대한민국 서민을 짓밟고 서민의 운명을 깔아 뭉게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게 참을 수 없었고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후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선동은 대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면서 의원 직을 상실하였다. #
2015년 10월 15일 코소보 의회에서 야당이 최루탄을 투척했다.
한국제 최루탄이 세계적 가이드 라인을 따르지 않고 수출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2013년 12월에는 영미의 유명 인권변호사들이 이의신청을 제출하기도 했다. 한국 최루탄 수출, OECD지침 어겼다 특히 바레인에서 민주화시위 진압용으로 150만 발 이상 수출되어 사용되어 큰 악명을 떨치고 있다. 현지 활동가들이 한국에 항의하기도 했다.
1980년대~2000년대 초반에 전의경에는 최루탄 발사기 사수와 부사수 보직이 따로 있었다.[21] 시위가 많을땐 하루종일 탄박스만 까다 복귀했다는 일화도 있으며 수요가 하도 많아서 재고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노려 한두개씩 불출 해갔다가 걸려서 영창 갔다 온 선임들의 이야기나 나이트에서 여자한테 퇴짜맞고 빡쳐 텨트렸다는 일화가 있다. 마음의 소리 작가 조석[22]은 전경 시절 부대에서 탄박스 불출 중 최루탄이 탄박스째로 터져 부대 전체가 피폭된 일이 있다고 한다. #
폴리아세탈에 열을 가할 경우, 포름알데히드가 방출되면서, 그 비슷한 냄새를 풍겨댄다.
아기공룡 둘리 꼴뚜기 왕자 편에서 둘리 일당이 은행 건물을 들고 도망가는 장면에서 경찰들이 둘리 일당에게 발사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였다.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내기 위해 과도하게 슬프고 우울한 설정을 집어넣는 신파극을 최루탄 작품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1] 'CS가스'라는 명칭 때문에 세슘 가스로도 불리지만 전혀 무관하다. 세슘의 원소기호는 Cs, 이건 CS다. CS는 개발자 2인의 이니셜(Ben Corson/Roger Stoughton)에서 따온 명칭이다. CS1, CS2, CSX로 바리에이션도 풍부하다.[2] 본 항목 맨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이 최루탄이다.[3] 한국 경찰의 최루탄 발사기구는 이탈리아 베넬리사의 산탄총을 사용하는데 총의 격발기구 안쪽에 안전장치를 추가하여 총구가 상향 45도를 이루지 않으면 노리쇠 격발이 이뤄지지 않게 되어있다. 직사에 대해서는 안전장치가 걸리지 않게 총을 옆으로 뉘어서 쏘거나 안전장치에 이쑤시개 등을 꽂아 무력화시킨 후 사용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45도 이상 올리고 곡사로 적정한 위치를 맞춘다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답답한 일이었으니. 물론 고의적 직사를 하는 것은 사망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절대 해서는 안 될 큰일날 일이다. 추진탄은 일반 산탄총에 쓰이는 12게이지 구경탄과 같게 생긴 공포탄이다. 약협에 추진탄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이 산탄총은 잉여부속 없이 총만 일정 수량 수입했기 때문에 고장 수리가 필요할 경우 다른 총을 헐어서 부품을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4] 당장 이한열 열사의 사망 원인도 최루탄 직격으로 인한 뇌사 및 합병증이다. 최루를 발사하는 탄이니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탄보다 덜 위험하다 뿐이지 최루탄 자체가 슬러그탄과 같은 쇳덩이다. 당연히 화살에 맞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5] 폭동 진압용이지만 유사시 사살 가능.[6] 내용물이 CS가스 가루 10g, TNT 26g인 물건이라 저렇게 폭발해서 충격파와 소음으로 제압하는 물건이다. 참고로 수류탄 폭약이 100g쯤 되니까 가까이에서 터지면 그냥 죽는다.[7] 여기에 최루탄 외에 최루액까지 포함한다면 사례는 더 늘어난다. 대표적인 예시라면 백남기.[8]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 때 많이 쓰였고, 의외로 민주화 이후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에도 최루탄이 많이 쓰였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 1년차에도 최루탄이 쓰인적이 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 2년차인 1999년 사용이 금지되었고 여러 최루탄 회사들이 문을 닫았으며, 노무현 정권 때 잦은 폭력시위로 최루탄 사용을 재개 하려다가 무산되었다. 현재 한국의 최루탄 회사는 수출 위주로만 하고 있다.[9] SY-44탄은 대형 금속외피를 가진 깡통모양 탄이라 직사가 아니라 곡사로 맞아도 위험했다. 사고 이후 삼양화학은 1988년 10월에 최루탄 생산을 중단했다가 1990년에 SY-44의 추진탄을 만들던 야산화공에서 외피를 연질PVC로 만든 KP시리즈 최루탄이 개발되었는데 탄 자체도 소형 경량이고 말랑한 파편도 크고 넓적하게 쪼개져서 비교적 많이 안전해졌다.[10] 이 무렵 조선일보가 삼양화학 본사로 항의하러 간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와 한영자 사장이 서로 화해했다고 오보를 일으켜 논란이 되었다. 당시 오보 기사 이 오보를 들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와 민주화 유가족들은 조선일보 본사까지 찾아가 항의 시위를 한 끝에 정정기사를 받아냈다.[11] 1998년 12월 23일 조계종 사태때 마지막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12] 2017년 대구지방경찰청 기준으로 경찰서와 기동부대에 17,000발을 보유하고 있다.[13] 1999년 11월 30일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 제3차 각료회의를 약 5만여명의 시위대가 인간사슬로 봉쇄한 사건.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반세계화 운동, 진보좌파 진영에선 시애틀 대전투(The Battle of Seattle)라고 부른다.[14] 농약으로만 사용 가능. 다만 분해 과정에서 염화수소, 질소산화물 같은 유독성의 환경 오염 물질을 발생시키므로 사실상 농약 목적이라도 쓰지 않기를 권고하고 있다.[15] 협약상 폭동진압작용제로서 실제 전투목적의 사용만 금지하고 있다.[16] 굳이 시위를 참가하지 않았더라도, 아침에 등교하면 대학에 최루냄새가 가득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필수지참품으로 손수건이 있었는데 코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다.[17] 물대포의 경우 수압이 아주 강한 편이라 아무리 방호장구를 갖추어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넘어져 검거되며, 시위대가 사용하는 안전모는 전혀 효과가 없어 벗겨지거나 깨질 뿐이다. 물대포에 형광물질을 혼입한 형광 물대포의 경우 한국 경찰이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적극 사용해 수많은 사람을 검거하기도 하였다. 형광물대포에 맞아 얼굴이나 옷 등이 변색되면 마스크나 복면도 이제 무용지물이 된다. 실제로 지난 8월 25일 췬완 시위 때 시범 출동시킨 물대포차가 길가에 물대포를 뿌렸는데 시위대 대부분은 과격시위를 하다가 물대포를 보고 혼비백산해 흩어졌으며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도주하다 미끄러운 바닥을 밟고 넘어져 경찰에 손쉽게 체포되었다.[18] 이승만 정부 시기 김주열이 3.15 시위 중 사망했다가 한달뒤 발견된 일로 4.19 혁명이 격화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했고, 6월 항쟁 때도 이한열의 사망으로 전두환 정권이 6.29 선언으로 백기를 들어야 했다. 2015년 11월 1차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 참석했다가 최루액을 맞은 농민 백남기가이듬해 9월 사망한 후 한달여만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스캔들이 터져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19] 21세기 북한은 최악의 거지 국가 중 하나로 악명 높지만 1995년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 북한은 그럭저럭 굴러가는 개발도상국 중 하나였다. 당연히 군사력도 대한민국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냉전이 계속되던 당시 엄연히 실재하는 외부의 위협이었다. 그래서 1979년 말 노태우 장군이 전방 사단을 무단으로 빼돌려 반란에 동원한 것이 이적행위에 준하는 반역행위로 지금까지 비난받는 것이다. 만일 국제정세와 김일성의 결단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면 한반도가 다시 한번 불바다가 될 수도 있었다.[20] 현재의 구) 대한축구협회 FA컵과는 무관하다.[21] 최루액 분사기를 담당 하는 보직이 존재한다.[22] 조석은 전경 2748기 순천 716전경대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