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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fff><colcolor=#041635> | |||
본명 | 스피로 시어도어 애그뉴 Spiro Theodore Agnew | ||
출생 | 1918년 11월 9일 | ||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
사망 | 1996년 9월 17일 (향년 77세) | ||
미국 메릴랜드주 벌린 | |||
재임기간 | 제55대 메릴랜드 주지사 | ||
1967년 1월 25일 ~ 1969년 1월 7일 | |||
제39대 부통령 | |||
1969년 1월 20일 ~ 1973년 10월 1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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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주디 주디핀드 | ||
자녀 | 4명 | ||
학력 | 존스 홉킨스 대학교 (중퇴) 볼티모어 대학교 (법학 / LL.B.) | ||
신체 | 188cm | ||
종교 | 개신교 (미국 성공회)[1] | ||
소속 정당 | |||
약력 |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 (1962~1966) 제55대 메릴랜드 주지사 (1967~1969) 제39대 미국 부통령 (1969~197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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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39대 부통령. 그리스계 미국인[2]으로 본래 성은 아나그노스토풀로스(Anagnostopoulos).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극우적 수사를 하여 많은 국민들의 미움을 샀다. 1973년 부정부패 혐의로 부통령 직을 사퇴했으며, 역대 미국 부통령 중 유일하게 불명예 사임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3] 강경한 발언으로 신보수주의의 아버지라는 평가도 받지만 정작 자신의 정치 성향은 록펠러 공화당원, 당내 진보파로 후대 레이건 공화당원들과는 상이했다.
2. 생애
2.1. 청년기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아버지를 둔 이민 2세대이다. 그리스에서 올리브 농부였던 애그뉴의 아버지는 19세기 말 미국으로 이민을 와 밑바닥부터 올라가 성공한 식당을 연 아메리칸 드림의 모범적인 예시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아버지의 레스토랑이 파산했고 애그뉴 가족도 도산해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했다. 이 때문에 애그뉴는 청소년기에 학교를 마치자마자 전단지 돌리기를 비롯해 온갖 일을 다해 집안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벌지 전투에 참여하며 죽을 위기도 넘겼고, 야간 수업을 받으면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이런 거친 성장 배경 때문에 애그뉴가 극단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1947년, 마침내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허리를 펴게 된다. 동시에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아버지는 평생 민주당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애그뉴 역시 민주당에 입당하려 했다. 법률회사 동료의 조언에 따라 공화당에 입당하는게 정치 생활을 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공화당에 입당했을 뿐 정치적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1956년 볼티모어 카운티 의회 출마를 준비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2년,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에 출마했다. 볼티모어 카운티는 1895년부터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때 맞춰 민권법과 관련해 민주당이 분열되며 애그뉴는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킨다. 행정관으로서 온건한 진보 정책을 추진하여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배리 골드워터 지지 거부 운동에 동참하는 등[4] 명확한 록펠러 공화당 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흑인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볼티모어 시내에서 과격 시위가 잦아지자, 법과 질서를 부르짖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진보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도시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시위대가 존재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어릴때부터 막노동을 하며 거칠어진 수사를 이용해 흑인과 신좌파 시위대를 마구 비난해 자신의 정치 성향과 별개로 "법과 질서"의 정치가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2.2. 메릴랜드 주지사
애그뉴가 볼티모어 행정관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민주당 조직이 분열되었기 때문이고 볼티모어 시내 민주당 조직이 다시 단합되기 시작하자 애그뉴의 재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이에 애그뉴는 죽기 아니면 까부러치기 정신으로 메릴랜드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다. 이는 엄청난 도박이었는데, 당시까지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당적으로 당선된 메릴랜드 주지사가 딱 4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1966년 메릴랜드 주지사의 민주당 후보로 공정주거보장법[5]에 반대하는 극우 인종주의자 조지 P. 마호니(George P. Mahoney)가 선출되자 메릴랜드 주 민주당 조직이 분열되었다. 분개한 일부 민주당원들은 하이먼 A. 프레스먼(Hyman A. Pressman)을 무소속 제3지대 후보로 밀었고 또 다른 일부는 "애그뉴를 위한 민주당원"을 조직해 애그뉴 당선운동을 벌이기까지 한다. 애그뉴는 마호니를 KKK단 후보로 매도했고 "불타는 십자가와 밝고 순수하며 용감한 정의의 불꽃 중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노골적인 선거 구호까지 내세웠다. 결국,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애그뉴는 49%를 득표해 40%를 득표한 마호니와 10%를 득표한 프레스먼을 꺾고 메릴랜드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이는 같은 날 치러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과 더불어 공화당이 1964년의 참패를 딛고 재기에 성공한 가장 상징적인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애그뉴는 주지사로서 진보적인 행정을 펼쳤으며, 세금 개혁, 환경 보호,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NAACP(전미 유색인종 인권 향상 협회)의 지지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극단적인 인종 평등 시위에는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으로 복무하던 시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1968년 3월 68혁명의 불길이 미국으로 옮겨붙어 보위 주립대학교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자, 애그뉴는 격분해 시위 주모자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200명 이상의 인종평등 시위대가 체포되었다. 뒤이은 1968년 4월 볼티모어 폭동 당시에도 주방위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과격진압했고, 6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체포되었다. 심지어 100명에 달하는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을 소환해 면전에서 비난하기도 할 정도였다. 흑인 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우리가 속았다. 이제 그는 조지 월리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라고 비난했지만, 윌리엄 노랜드 상원의원을 비롯한 미국 전역의 보수파는 애그뉴를 칭찬했으며 애그뉴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공화당 보수파의 새 영웅이 되었다.
2.3.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8년 대선이 다가오자 "일단은" 록펠러 공화당원이었던 그는 넬슨 록펠러를 대통령으로 지지했으며, 록펠러 캠프에서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록펠러는 1968년 3월 애그뉴에게 사전 통보 없이 언론을 통해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이는 다혈질 성격이었던 애그뉴를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애그뉴는 리처드 닉슨을 간접적으로 지지했으며, 4월에 록펠러가 다시 프라이머리에 참여했을때도 그에 대한 명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또한 동시기 볼티모어 폭동을 처리하면서 애그뉴는 당내 진보파이지만 범죄에 강력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고, 공화당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을 봉합하고 싶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가장 이상적인 러닝메이트감으로 받아들여졌다.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제럴드 포드는 록펠러 공화당 내에서도 좌파에 속했던 존 린지 뉴욕시장을 러닝메이트로 추천했다. 하지만 스트롬 서먼드를 비롯한 당내 보수파는 이 결정에 반대했고, 특히 남부 측에서 린지가 매우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지 W. 롬니가 부통령이 되어야한다는 여론도 당 내에 있었지만 닉슨은 사적으로 롬니를 싫어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애그뉴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를 받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애그뉴는 메릴랜드 주지사로 지내면서 통과시킨 많은 민권 정책을 예시로 들며 자신을 공화당 진보파로 홍보했다. 하지만 이는 효과가 없었는데, 유세마다 너무 우파적인 수사를 통해 반전 시위대와 진보파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애그뉴는 취재 나온 일본인 기자를 뚱땡이라고 비하했고 폴란드계 미국인들을 "폴락"[6]이라 부르며 인종주의적 식견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빈민층 비하 논란까지 일으키며 닉슨의 지지율을 떨어트렸다. 또 10월에는 부정부패 의혹까지 터지며 위기에 처했다. 휴버트 험프리는 애그뉴를 비난하면서 15초동안 미친듯이 비웃는 광고를 내보냈는데 이는 애그뉴가 당시 미국인들에게 어떤 이미지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10월에 제기된 부정부패 의혹이 증거 불충분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애그뉴의 극단적 수사가 오히려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던 보수 백인들의 표를 닉슨 측으로 결집시키면서 최종적으로 1968년 대선에서 닉슨은 아주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동안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합지로 간주되던 테네시, 켄터키, 노스캐롤라이나 등의 보수적이나 딥사우스(Deep South)에 비하면 중도적이었던 남부 주들이 닉슨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어퍼 사우스(Upper South) 주들이 월리스가 아니라 닉슨을 뽑은데 애그뉴가 미친 영향이 컸다는 분석도 있다.
2.4. 부통령으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당선된 애그뉴였지만 닉슨은 그를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스피커 정도로 생각했고 진지한 정책 파트너로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수위 시절부터 닉슨에게 개무시를 당했고, 부통령 시기에는 더해서 주무부처 장관들은 물론 닉슨의 개인 보좌관들보다도 정책에 대해 의견을 내는 빈도가 적었다. 언제 한번 애그뉴가 회의 도중 자신만의 외교적 주장을 펼쳤을 때 닉슨은 애그뉴의 "건방짐"에 분노해 보좌관을 통해 회의 중에는 입을 다물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닉슨은 애그뉴가 사소한 일로 자신에게 자꾸 전화를 거는걸 극혐했으며 애그뉴를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멀리하고자 했다.닉슨은 존 코널리 재무장관, 밥 홀더먼 보좌관, 존 얼리크먼 보좌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악관 인사들을 싫어했고, 그나마 헨리 키신저 등 일부와는 정책과 관련해 협의하기도 했지만 애그뉴는 말 그대로 어떤 공직도 맡지 못했다. 애그뉴는 닉슨의 여러 정책, 특히 데탕트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는 닉슨 행정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대신 닉슨은 애그뉴를 아주 효과적인 스피커로 사용했는데, 닉슨의 속내를 말한다는 의미로 "닉슨의 닉슨"(Nixon's Nixon)이라는 별명까지 애그뉴에 붙었다. 애그뉴는 주요 선거 때마다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며 남부 보수파의 결집을 유도하고 반전 시위대와 신좌파 그룹을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 이는 미국 보수파들에게는 환호[7]를, 반전좌파들에게는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언론은 농담삼아 애그뉴를 "암살 방지용 부통령"이라고 불렀다. 닉슨이 암살당하면 부통령 애그뉴가 대통령직을 승계할탠데, 반전좌파는 닉슨보다 애그뉴를 더 싫어하니까 오히려 닉슨이 암살되지 않기를 기도할 것이라는 비아냥이었다.[8]
1970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애그뉴는 닉슨보다도 더 많이 유세장에 모습을 비췄다. 그는 닉슨에 적대적인 좌파 민주당원과 일부 록펠러 공화당원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발빠르게 돌아다녔다. 주요 타겟은 테네시 주 상원의원 앨버트 고어 시니어와 공화당원이었는데도 반전 성향을 보여 하워드 진, 노엄 촘스키 등의 지지를 받았던 찰스 구델 뉴욕 주 상원의원이었다. 이 둘은 1970년 중간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공화당은 일시적 경기 침체로 선거에서 참패했고 특히 11명의 주지사 직위를 잃었다. 닉슨은 애그뉴에게 실망했고, 애그뉴의 극우적 수사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도 커져갔다.
애그뉴를 믿지 못한 리처드 닉슨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아예 부통령 후보를 자신이 신뢰하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던 존 코널리 재무장관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민주당원이었던 코널리를 부통령으로 임명하면 당내 보수파의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할 것이었으므로 측근들은 이를 만류했고, 닉슨은 1968년 대선 때와는 정 반대의 이유인 보수파를 달래려는 목적으로 애그뉴를 부통령 직위에 마지못해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애그뉴는 또다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5. 부정부패 스캔들
하지만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1973년 즈음, 애그뉴 부통령에 대해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메릴랜드 주지사 시절, 엔지니어링 회사로부터 계약 입찰을 대가로 뇌물을 수수했다는 것이 그 의혹의 골자.그에 따라 조지 비얼 검사를 중심으로 한 메릴랜드 지방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가 점차 종지부를 향해가며, 그 의혹이 이제 의혹 수준을 넘어 사실의 영역에 도달하기 시작하자, 애그뉴 부통령은 수사를 진행하는 법무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1973년 여름을 지나며, 슬슬 애그뉴 부통령에 대한 기소 가능성을 내비치기 시작했고, 이에 애그뉴는 현직 부통령에 대한 기소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법무부를 압박하였다.
1973년은 애그뉴 부통령 뿐만 아니라, 닉슨 대통령 역시도 수사 대상에 올라가 있던 혼돈의 정국이였었다보니 법무부는 현직 대통령&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 여부를 검토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통령과는 달리 부통령은 현직이여도 기소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렇듯 점차 코너에 몰리자, 애그뉴는 이번엔 연일 보도되는 본인의 부패 혐의를 문제 삼으며, 법무부의 수사 기밀 유출 의혹을 걸고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소되도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연신 외치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앞에서의 행보와 달리, 그도 점차 현실화되는 '현직 부통령의 기소'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인지 가을 무렵부터, 법무부와 뒤에서 '변론 협상'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당시 미국은 애그뉴 부통령의 부패 스캔들보다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에 더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는데, 그 사건 역시도 점차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닉슨 대통령의 중도 사퇴 혹은 탄핵 가능성이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법무부 역시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다. 만일 애그뉴와의 협상을 뒤로 하고, 전면 기소를 단행하게 된다면, 정말 장기간의 법리 다툼에 돌입하게 될 것이 뻔한데, 혹여 그때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애그뉴의 대통령 승계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결국 법무부 역시도, 애그뉴와는 다른 사정으로 그와의 변론 협상에 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10월 경, 애그뉴와 법무부의 협상은 완료되었다. 탈세에 따른 처벌 인정 및 부통령직 사임을 애그뉴가 받아들이는 대가로, 탈세를 제외한 모든 부정부패 혐의의 불기소 및 탈세 처벌 감형을 법무부가 받아들인 것.
협상이 마무리되자마자, 10월 9일 밤부터 검찰은 40페이지에 달하는 기소장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결국 10월 10일 아침 가까스로 기소장을 제출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소장의 사본은 10일 아침 8시 5분 경 애그뉴 부통령 측에도 전달되었다. 미국 역사상 첫 현직 부통령에 대한 기소가 이뤄진 것. 이후 10일 오후 2시 경, 애그뉴 측 변호인들이 볼티모어 법원에 도착했고, 이어 1분 뒤 애그뉴 부통령도 법정에 출석했다. 직후 애그뉴의 변호인 중 1명이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의 사무실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료에게 연락하여, 애그뉴 부통령의 사직서의 제출을 지시하고, 그에 따라 10일 오후 2시 5분경, 헨리 키신저에 의해 애그뉴의 사직서가 처리되었다.
이제 애그뉴는 전직 부통령, 즉 민간인의 신분이 되었고, 그 상태로 재판에 임하기 시작했다. 협상에 따라 유일하게 제기된 13,551$의 탈세 혐의에 대해 판사는 유죄를 인정했으며, 애그뉴에 대한 처벌도 협상에 따라, 1만$의 벌금과 3년의 무감독 보호관찰 수준으로 약하게 선고되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통틀어 가장 부패한 정치인 중 하나로서 평가된다. 주지사 시절부터 부통령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자신의 권력을 악용해 여러 개인과 기업들로부터 상습적으로 이권과 재물을 수수해왔기 때문이다. 부통령 시절에는 아예 백악관으로 기업인들을 불러 백악관 내에서 뇌물을 수수하는 파렴치함과 대담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형사재판에선 그의 이런 부정부패 행각 중 탈세만 사법처리 되고, 나머지는 불기소 처분되었으나, 이후 민사재판에서 14만 7,500$의 뇌물수수가 인정되었다. 이자까지 덧붙여 24만 8,735$의 상환명령이 내려진 건 덤.
애그뉴에 비하면 닉슨의 행각은 애교로 보일 정도인데, 원래대로라면 스피로 애그뉴는 악질 범죄자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어야 했음에도 사실상 거의 처벌을 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 이유가 매우 교묘하여 이에 대한 음모론이 있을 정도다.
스피로 애그뉴의 부패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 중에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는데, 이로 인해 닉슨이 탄핵되거나 사임해야 함이 명백해지자 애그뉴의 수사를 서둘러 종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부통령인 애그뉴가 대통령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직 대통령을 임기 중에 형사 처벌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는 나라이며, 애그뉴가 대통령이 되면 그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공소 시효가 만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검찰은 어쩔 수 없이 닉슨의 탄핵/사임 전에 애그뉴의 수사와 처벌을 완료해야만 했고 결국 애그뉴는 저지른 행동에 비해 상당히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때문에 혹자는 워터게이트를 터뜨린 것이 바로 스피로 애그뉴였다는 음모설까지 제기했을 정도.
한편 애그뉴의 사임 직후, 공백이 된 부통령직은 당시 하원의원이던 제럴드 포드가 이어받았다. 이때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선거로 뽑히지 않은 부통령이 탄생한다. 이후 그는, 닉슨 대통령마저 워터게이트로 사직하게 되며, 역사상 최초로 선거 없이 대통령이 된 인물이 된다.[9]
2.6. 부통령 사임 이후와 말년
부통령직 퇴임 이후 자신의 상관이었던 닉슨과 더불어 워터게이트 사건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 회고록을 폈으며, 노년기에는 아주 조용하게 지냈다. 1980년에는 자신의 몰락이 시오니스트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리처드 닉슨에게 배신감을 느껴 닉슨과는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닉슨의 유족이 초청한 닉슨의 장례식에서 모습을 보였다. 1996년 그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62 | 볼티모어 행정관 선거 | 볼티모어 카운티 | | 78,728 (56.19%) | 당선 (1위) | 초선 |
1966 | 미국 주지사 선거 | 메릴랜드 | 455,318 (49.50%) | 초선 | ||
1968 | 미국 부통령 선거[A] | 미합중국 | 31,783,783 (43.42%, 301명) | 초선 | ||
1972 | 미국 부통령 선거[A] | 47,168,710 (60.67%, 520명) | 재선[12] |
4. 여담
- 어렸을 때부터 궂을 일을 도맡아 한 성장 배경 때문에 성격이 매우 다혈질적이었고 입이 거칠었다. 이 때문에 생긴 일화가 있는데, 고보수주의자들과 평화주의 좌파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자 한국 내 여론이 동요했다. 이때 스피로 애그뉴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애그뉴를 6시간동안 앉혀놓고 주한미군 철수를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애그뉴는 백악관 내에서 어떤 업무도 맡지 않고 있었기에 자기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하냐고 박정희에게 항의했지만 박정희와 주무부처 장관들은 백악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따위를 알리가 없었다. 격분한 애그뉴는 대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앞으로 5년 내에 모든 주한 미군이 철수해야한다."라는 폭탄 선언을 날렸다. 리처드 닉슨이 이를 부랴 부랴 수습하며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이후로도 닉슨 행정부와 한국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 그의 과격한 발언이 후대 신보수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그는 수사법에 있어 극단적일 지언정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과 메릴랜드 주지사로 지내면서 제법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고, 부통령이었을 때에는 자기만의 정책을 펼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애그뉴를 사전적 의미의 신보수주의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68혁명 당시 과격한 반전 시위에 지쳤던 미국 중산층의 마음을 애그뉴가 달랬던 것은 사실이었고 로널드 레이건은 후대에 이를 훨씬 차분한 어조로 변형해 "법과 질서"를 자신의 핵심 어젠다로 내세웠다.
- 퓨쳐라마 에서는 머리가 없는 클론으로 나와서 마찬가지로 몸이 없는 클론 리처드 닉슨의 머리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는 역할을 한다. 시즌 6에서는 르어의 아들내미의 레이저 총에 맞아 먼지가 되어버리기도...
5. 둘러보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d164a,#FFC224> 정당 | 대통령 후보 | 순위 | |
<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민주당 | 휴버트 험프리 | 2위 | ||
에드먼드 머스키 | 낙선1 | |||
공화당 | 리처드 닉슨 | 1위 | ||
스피로 애그뉴 | 당선 | |||
AIP | 독립당 | 조지 월리스 | 3위 | |
커티스 르메이 | 낙선2 | |||
1 앨라배마 주에서는 앨라배마 전국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2 앨라배마 주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일부 주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 | ||||
| }}}}}}}}}}}} |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d164a,#FFC224> 정당 | 대통령 후보 | 순위 | |
<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공화당 | 리처드 닉슨 | 1위 | ||
스피로 애그뉴 | 당선1 | |||
민주당 | 조지 맥거번 | 2위 | ||
사전트 슈라이버 | 낙선 | |||
1 현직 미국 정·부통령 2 선거운동 도중 사퇴 및 후보 교체 | ||||
|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E81018; border-right: 10px solid #E81018;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 직위 | 명단 |
부통령 | <colbgcolor=#fff,#1f2024> 스피로 애그뉴 → 제럴드 포드 | |
국무장관 | 윌리엄 P. 로저스 → 헨리 키신저 | |
재무장관 | 데이비드 M. 케네디 → 존 코널리 → 조지 P. 슐츠 → 윌리엄 E. 사이먼 | |
국방장관 | 멜빈 레어드 → 엘리엇 리처드슨 → 제임스 R. 슐레진저 | |
법무장관 | 존 N. 미첼 → 리처드 클라인디엔스트 → 엘리엇 리처드슨 → 윌리엄 B. 삭스비 | |
우정공사국장 | 윈튼 M. 블런트 | |
내무장관 | 윌리 히켈 → 로저스 모튼 | |
농무장관 | 클리포드 M. 하딘 → 얼 버츠 | |
상무장관 | 모리스 스탠스 → 피터 G. 피터슨 → 프레드릭 B. 덴트 | |
노동장관 | 조지 슐츠 → 제임스 데이 호지슨 → 피터 J. 브레넌 | |
보건교육복지장관 | 로버트 핀치 → 엘리엇 리처드슨 → 캐스퍼 와인버거 | |
주택도시개발장관 | 조지 W. 롬니 → 제임스 T. 린 | |
운수장관 | 존 볼페 → 클로드 브리네거 | |
관리예산실장 | 로버트 P. 마요 → 조지 P. 슐츠 → 캐스퍼 와인버거 → 로이 애쉬 | |
주유엔대사 | 찰스 요스트 → 조지 H. W. 부시 → 존 A. 스칼리 | |
백악관 고문 | 아서 F. 번스 →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 → 브라이스 할로우 → 로버트 핀치 → 도널드 럼즈펠드 → 앤 암스트롱 → 딘 버치 → 케네스 러쉬 | }}} }}}}}}}}} |
[1] 아버지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공회교도로 자랐다.[2] 미국 내에서 비중이 0.6%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수 혈통으로, 애그뉴는 마이클 두카키스와 함께 거의 유이하게 전국구에 알려진 그리스계 미국인 정치인이다.[3]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존 C. 칼훈도 사퇴하긴 했는데 이 사람은 임기가 얼마 안남은 상황에서 상원의원 취임을 위해 정치적 이유로 사임한 것이라 애그뉴와는 사정이 다르다.[4] 윌리엄 스크랜턴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다만, 골드워터가 전당대회 표결에서도 승리하자 본선에서는 마지못해 골드워터를 지지하긴 했다.[5] 흑인의 주거 권리를 보장하는 민권법이다.[6] Polack. 주로 폴란드계 이민자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속어이다.[7] 1969년 갤럽의 조사에서 애그뉴에 대한 지지율이 62%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이 수치는 점점 떨어졌다.[8] 연예계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락덕들에게 아주 유명한 킹 크림슨의 노래 "21st Century Schizoid Man"에 대해 KC의 리더 로버트 프립은 "이 노래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그 남자, 스피로 애그뉴를 위한 헌정 곡입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1972년 대선에서 존 레논을 비롯한 많은 연예인들이 조지 맥거번을 지지한것도 애그뉴에 대한 혐오감이 크게 작용했다.[9] 결국 닉슨 행정부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정치적 스캔들로 사퇴한 정부가 되어버렸다. 성과, 업적 등을 배제하고 오직 도덕성만 따지고 보면, 역대 최악의 정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셈.[A] 대통령 후보는 리처드 닉슨[A] [12] 1973.10.10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