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사회 실험으로 유명한 생물학자에 대한 내용은 존 B. 칼훈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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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 |||
본명 | 존 콜드웰 칼훈 (John Caldwell Calhoun) | ||
출생 | 1782년 3월 18일 |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버빌 | |||
사망 | 1850년 3월 31일 (향년 68세) | ||
미국 워싱턴 D.C. | |||
묘소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성 필립스 교회 | ||
재임기간 | 제7대 부통령 | ||
1825년 3월 4일 ~ 1832년 12월 2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부모 | 아버지 패트릭 칼훈 어머니 마르타 콜드웰 | |
배우자 | Floride Bonneau Calhoun | ||
자녀 | 슬하 10명 | ||
학력 | 예일 대학교 (법학 / 학사) 리치필드 대학교 법학대학원 | ||
종교 | 유니테리언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5 (상원) 4 (하원) | ||
의원 대수 | 12, 13, 14, 15 (하원) 22, 23, 28, 29, 30 (상원) | }}}}}}}}} |
공식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7대 부통령. 19세기 초반의 미국 정계를 주도한 주권주의 및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1957년에는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주도하는 상원위원회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5명의 상원의원'의 일원으로서[1]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2. 생애
2.1. 초년기
1782년 3월 18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버빌에서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인 패트릭 칼훈과 마르타 콜드웰 사이에서 태어났다.14세였던 1796년 당시 수학 도중 농장주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농장을 관리하게 되면서 학업을 그만두었고 1804년에 예일 대학교 법학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 후,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법학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법원에 들어갔다.
2.2. 정치인
민주당 소속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반연방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인 사우스캐롤라이나가 1828년 관세법과 1832년 관세법을 거부한 것을 옹호하면서 무효당 창당에 가담했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려 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자 부통령직에서 사임한 후 주의회의 선출로 상원의원이 되었다.이후 존 타일러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했고 국무장관에서 퇴임한 후 다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남부 출신답게 노예제도를 지지했는데 그와 그 주변의 친노예제이론가들은 북부주의 산업가들과 금융인들이 주장하는 노예제 해방은 겉으로는 인권으로 포장되었지만 속은 흑인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서 자기들이 부리는 프롤레타리아로 편입시키려는 위선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흑인들의 인권을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고, 되려 "흑인들이 그리스어와 기하학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사람으로 대해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는 백인 우월주의자였다[2]. 또한 그는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한가지 획기적인(?) 주장을 했는데, 바로 노예제가 명백한 선(positive good)이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대체로 노예제가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폐지했을 때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이라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칼훈은 더 나아가 노예제가 선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남부에서 두 인종이 맺고 있는 기존의 관계야말로 자유롭고 안정적인 정치제도를 만들어내는 가장 견고하고 영속적인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고 저는 단호히 주장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3]
연방법 무효화 사태에서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가 연방 또는 주 다수가 주장하는 정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후 칼훈이 노예제 및 그 확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똑같이 사용한 논리였다. 주는 연방을 구성하는 주체로서 노예제 등 핵심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했고, 연방은 각 주는 물론, 아직 주가 형성되지 않은 연방영토에 대해서도 노예제를 금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칼훈의 주장이었다. 칼훈과 그 지지자들은 주의 권리를 근거로 연방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자는 공화당 등의 주장이나, 각 준주의 시민들이 스스로 노예제 문제를 결정하자는 스티븐 A. 더글러스 등의 국민주권(Popular sovereignty)론을 거부하였다.
무효화 사태 이후 칼훈은 주 하나가 단독으로 연방에 맞서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노예제를 중심으로 남부 주들이 폐지주의자들에게 맞서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노렸다. 칼훈 생전에는 칼훈에게 반대하는 남부 휘그당 및 남부 연방주의자 세력이 건재하여 그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훗날 남부연합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칼훈은 노예제 문제에서 북부 주들이 다수 및 압제자의 위치이며 남부 주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하였다. 칼훈에 따르면 연방의 다수파인 북부 주들은 다수이므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지만 소수인 남부 주들은 그럴 수 없었으므로 연방은 남부 주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했다. 현대의 소수자 보호 논리와도 유사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칼훈은 남부 주들 및 백인들에 의한 소수자 흑인 차별 문제는 무시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켄터키의 헨리 클레이, 매사추세츠의 대니얼 웹스터와 함께 1810년대부터 1850년까지 의회를 주도하여 위대한 삼두정(Great Triumvirate), 불멸의 트리오(Immortal Trio)로 불렸다. 클레이는 서부(현재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칼훈은 남부, 웹스터는 북부를 대표하며 의회에서 대립하고 협상하여 정책을 주도했다. 세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출생하여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여러 번 대통령직을 노렸다가 끝내 실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850년 타협은 클레이와 웹스터가 주도하였고, 칼훈은 이를 격렬히 반대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름을 날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칼훈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의회에 출석하여 연설문을 대독시키면서까지 북부에 대한 맹공을 퍼부었고, 노예제 논란이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마지막 경고를 남긴 뒤 사망했다.
3. 약력
- 1803. 제8대 하원의원 후보 (사우스캐롤라이나 제6선거구 / 민주공화당, 낙선)
- 1811. 제12대 하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6선거구 / 민주공화당)
- 1813. 제13대 하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5선거구 / 민주공화당)
- 1815. 제14대 하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5선거구 / 민주공화당)
- 1817. 제15대 하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5선거구 / 민주공화당)
- 1817.10. 제10대 전쟁장관 (1817.10.8. ~ 1825.3.4.)
- 1825.3. 제7대 미국 부통령
- 1833. 제22대 상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2부 / 민주당)
- 1835. 제23대 상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2부 / 민주당)
- 1841. 제28대 상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2부 / 민주당)
- 1844.4. 제16대 국무장관 (1844.4.1. ~ 1845.3.10.)
- 1846. 제29대 상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2부 / 민주당)
- 1847. 제30대 상원의원 (사우스캐롤라이나 제2부 / 민주당)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 - 1828 | 입당 정계 입문 |
| 1828 | 입당 |
1828 - 1839 | 창당 해산 | |
| 1839 - 1850 | 복당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0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사우스캐롤라이나 제6구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299 (29.81%) | 낙선 (2위) | |
181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610 (72.19%) | 당선 (1위) | 초선 | ||
181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사우스캐롤라이나 제5구 | 무투표 당선 | 재선 | ||
181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3선 | ||||
181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977 (43.22%) | 4선[4] | |||
1824 | 미국 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0 (70.00%, 182명) | 초선 | ||
1828 | 미국 부통령 선거 | | 701,780 (54.24%, 189명) | 재선 | ||
1832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사우스캐롤라이나 | 무투표 당선 | 초선 | ||
1834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재선 | ||||
184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3선[5] | ||||
1845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4선 | ||||
184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5선[6] |
[1] 나머지는 대니얼 웹스터, 로버트 A. 태프트, 로버트 M. 라폴레트, 헨리 클레이다.[2] 흑인 노예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로 올라가거나,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까봐서 고의로 무학 신세로 만들던 상황인데, 그리스어나 기하학에 정통한 흑인이 흔할 리가 없었다.[3] 이런 북부 자본가 계층에 대한 반발심리가 이후 민주당의 좌경화에 논리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경화를 걷게 된 공화당과 반대로 새 돌파구를 농민중심주의에서 찾은 샘. 그래서 진보적 민주당의 시작이라고 하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시절엔 민주당이 남부와 중서부에서 공화당은 북동부와 캘리포니아에서 지지세를 얻는 여도야촌 현상을 볼 수 있었다.[4] 1817.11.3. 미국 전쟁장관이 되기 위해 사직[5] 1843.3.3. 사직[6] 1850.3.31.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