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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9년 8월 27일 |
미국 매사추세츠 주[1] 파리 | |
사망 | 1891년 7월 4일 (향년 81세) |
미국 메인 주 뱅고어 | |
재임기간 | 제15대 부통령 |
1861년 3월 4일 ~ 1865년 3월 4일 | |
서명 | |
배우자 | 새라 에머리 (1833~1855) 엘렌 에머리 (1856~)[2] |
자녀 | 6명 |
종교 | 유니테리언 |
정당 | (~1856) (1856~1891) |
의원 선수 | 2 (하원) 5 (상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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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5대 부통령이다. 민주당 소속으로 메인 주의 주 하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주지사[3]를 역임했으며 노예제에 반대하여 1856년에 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적했다.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미국 부통령에 선출되었다.햄린의 지명은 특히나 링컨이 공화당의 통합된 지지를 얻는데 크게 작용했는데 중서부 일리노이 출신이었던 링컨이 대선에서 북동부 지역인 매사추세츠, 메인 등에서 이탈표 없이 안정적으로 선거인단을 확보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 메인 주지사까지 지낸 햄린의 공이 있었기 때문.
다만 행정부에서의 역할이 크진 않았는데, 본인이 부통령이라는 역할보다는 겸임하는 상원의장이라는 역할에 좀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예 해방 선언이나 흑인들의 무장을 강력하게 촉구했지만 본인이 여기 직접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사실 조지프 후커를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압박을 넣었다가 후커가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한 탓에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로버트 E. 리가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에게 대패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던 점을 생각하면 전시 부통령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던듯 하다.
1864년 대선에서는 링컨이 분열된 국가를 통합한다는 의미로 남부 출신임에도 연방에 잔류했던 민주당원인 앤드루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재선 도전엔 나서지 못했다.
남북전쟁 전후에는 공화당 급진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869년에 상원의원으로 복귀하여 1881년까지 재임했다. 1881~1882년 동안 주스페인 공사를 역임한 후 공직에서 은퇴했고 1891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사망했다.
2.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84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메인주 제8구 | | 7,115 (47.50%) | 낙선 (2위) | |
1841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메인 | 1 (0.50%) | 낙선 (3위) | ||
1843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메인주 제8구 | 4,638 (54.61%) | 당선 (1위) | 초선 | |
184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6,874 (52.55%) | 재선 | |||
1848 |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 메인 | 92 (67.15%) | 초선 | ||
1851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단독후보 | 무투표 | 재선[4] | ||
1856 | 미국 주지사 선거 | | 69,574 (58.07%) | 당선 (1위) | 초선[5] | |
1857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단독후보 | 무투표 | 3선[6] | ||
1860 | 미국 부통령 선거[A] | 미합중국 | 1,866,452 (39.88%, 180명) | 당선 (1위) | 초선 | |
1869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메인 | 146 (80.66%) | 4선 | ||
1875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단독후보 | 무투표 | 5선 |